소설리스트

09. 부러진 열쇠와 영원치 않은 자물쇠-(10) (165/190)

언젠가 버려질 테니 그 전에 당신을 떠날 것이다.

살아 있는 자들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원하듯 자신 같은 자에게도 마지막 소원은 기원할 수 있는 법이다.

“비너스? 초상화야? 다 됐네? 봤어?”

아주 어릴 적부터 보아 왔던 붉은색 눈동자가 햇볕 아래 보석처럼 반짝인다. 그토록 찬란하다.

칼 수십 자루를 삼킨 듯한 통증은 항상 그녀의 미소에서 비롯된다.

“예. 아가씨. 잘 그렸더군요.”

비너스는 수만 번을 웃었던 것처럼 블란데아에게 또다시 웃었다. 블란데아는 눈이 부시다며 이마를 찌푸렸다.

***

“그 기사 초상화는 왜 그렇게 그려 대는 거지?”

슐로이츠의 목소리가 삐딱하게 들렸다. 나는 눈을 깜빡이며 그를 응시했다.

“비너스가 예쁘잖아.”

“예쁘면 그렇게 마구잡이로 그림을 그려 남기나? 네 눈에 그 기사만 차는 건 아닐 테고.”

“그건 그렇지만….”

여긴 제목 값을 하는 세상이라 미인들이 즐비했다.

‘그런 미인들 중에서도 유독 독보적인 미인들이 있는 법이잖아.’

비너스나, 그리고 또.

슐로이츠나.

하지만 전자의 말을 했다간 슐로이츠의 기분이 아주 나빠질 것 같다는 확실한 직감이 들었다.

나는 초상화를 내려다보다가 의자에서 일어났다.

“슐츠.”

“…….”

그와 제법 오랜 시간을 함께 지내면서 깨달은 사실이 몇몇 가지가 있다. 슐로이츠가 기분이 나쁠 땐 이름을 먼저 불러 주면 명백히 노기가 가라앉는다.

맹수를 길들이는 기분이라고 하면 슐로이츠는 무슨 표정을 지을까?

그에게 가까이 걸어가는 동안에도, 슐로이츠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는다. 오히려 두 눈은 내게 고정되어 있어서 심장이 뛰었다.

슐로이츠의 앞머리는 조금 흐트러져 있었다. 그리고 물기로 젖어 있었다. 슐로이츠는 왕도에서 군부까지 숨 가쁘게 이동하느라 제대로 쉴 시간도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군부에 귀환하자마자 간단히 씻고 바로 나를 보러 온 게 분명했다.

난 그의 까만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살짝 넘겨 주며 말했다.

“그럼 우리도 내일 같이 초상화를 그릴까? 아, 내일 시간이 된….”

“그래.”

“…….”

“화가를 초빙하지. 특별히 마음에 드는 화가가 있나? 네가 원한다면 왕도나 타국에서 초빙해도 상관없어.”

“…….”

“블란데아?”

내일 시간이 되기는 하냐는 질문은 꺼내지도 못했다.

나는 비너스를 그려 준 화가가 아직 군부 자치 마을에 머물고 있으니 그를 부르면 되겠다고 말했다.

슐로이츠의 눈동자가 가까이서 보인다. 언제나 차갑고 건조하며, 때때로 권태로운 그의 눈빛이 이럴 때만은.

오직 이럴 때만은 다르게 느껴진다. 내 뺨과 어깨를 간지럽히는 깃털이 된 것 같은 기분.

눈빛의 깊이가 달라진다. 나를 이렇게 가까이서 바라볼 때의 슐로이츠는 묘하게 넋을 놓는 것 같다. 그래서 더 기분이 간지러웠는지도 모른다.

슐로이츠의 손이 내 귓가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넘겨 준다. 솜털 돋은 뺨에 닿는 그의 손가락은 굳은살로 딱딱하다. 그마저도 견디기 어렵게 뱃속이 저릿해진다. 와중에도 슐로이츠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그 시린 눈에 차고 넘칠 정도로 열망을 가득 담고서도 한마디도 하지 않는 이 남자가 얄밉게 느껴졌다.

“날 보려고 이렇게 일찍 돌아온 거 아니야?”

새침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더 할 말 없으면 이만 자러 가. 나도 이젠 자러….”

뒤돌았던 허리가 홱 잡혔다. 순식간에 돌려 세워진다.

내 몸을 터뜨릴 듯 품 안으로 껴안은 슐로이츠가 허리를 숙인다. 내 입술을 찾아 들어오는 그의 혀는 다급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금세 숨이 가빠졌다. 턱이 얼얼했다. 아플 정도로 빨리는 혀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나는 한참을 헐떡이다가 결국 슐로이츠의 가슴을 때렸다.

“그만…. 그만 좀….”

“네가 보고 싶었어.”

한순간 심장이 멈춘다. 내 목덜미를 감싸 안고서, 그는 첫사랑에 빠진 소년처럼 열렬하게 속삭인다.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다고.”

귓가가 밀랍으로 변한 것 같다. 열기에 속절없이 녹아내려 버리는 연약하고 말랑한 무언가가 되어 버린 기분이었다.

“울었다며.”

몽롱한 기분이 한순간 사라진다.

“왜 울었지?”

슐로이츠의 말엔 많은 것이 생략되어 있으나 바로 어떤 때를 얘기하는지 알아차렸다.

잠든 파놉테스 앞에서 울다가 그를 끌고 밖으로 나왔을 때.

‘라파엘? 아그네스? 누구지?’

누가 슐로이츠한테 고스란히 이른 거지?

당혹스러운 기분에 한 걸음 물러섰다. 붙잡지 않고 그저 나를 훑어보던 슐로이츠가 불현듯 내 두 손목을 잡았다.

그대로 잡아당긴다.

“…슐츠!”

나는 거의 무너지듯 슐로이츠의 품으로 허물어졌다.

“얼굴 좀 보고 있으면 알아서 얘기해 줄 줄 알았는데.”

“…….”

“그렇게 빤히 쳐다봐서 입이나 맞추게 하고. 너도 정말 못돼 빠졌지, 블란데아 르페브르.”

“내가 언제 입을 맞추게 했다고….”

“그 젊은 신관과 함께 있다가 울면서 끌고 나왔다던데.”

“…….”

“그 새끼가 무슨 짓을 했는지 말해, 블란데아. 네 약혼자니까 그 정도는 들을 권리가 있지 않나?”

나는 그제야 슐로이츠의 눈이 조금도 웃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알았다.

***

슐로이츠가 귀환한 직후, 군부령은 아주 바빠졌다.

“본 지휘관은 경들에게 몹시 실망했다.”

라파엘이 엄숙한 얼굴로 말했다. 그가 손에 들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자갈이었다.

“분명히 자갈을 다 닦아 놓으라고 했을 텐데 왜 이렇게 짙은 얼룩이 남아 있지? 이 정도는 얼룩이 아닌가? 그러면 내가 경들의 얼굴에 이 정도의 피멍을 얼룩으로 남겨 줘도 되겠나?”

“시정하겠습니다!”

“제대로 닦는다!”

“닦는다아아악!”

분명 예전에 본 적 있는 장면이었다. 아그네스가 나를 보고 민망한 얼굴로 말했다.

“소란스러우시죠? 왕실 근위대가 내려온다는 소식에 라파엘 경이 제정신이 아닙니다.”

“어쩔 수 없지, 괜찮아.”

왜냐면 나는 저 노동에 포함되어 있지 않으니까. 원래 한 발짝 멀리 떨어져서 보면 뭐든지 재미있는 구경거리일 뿐이었다. 비 구경도 눈 구경도 따뜻한 집 안에서 하는 게 제일이듯이.

힐드온이 개처럼 지붕을 문질러 닦는 걸 보니 웃기기도 했다.

“근위대는 언제 도착한다고 했지?”

“예. 세 시간 후 도착 예정입니다.”

“정말 일정을 빠듯하게 잡았네.”

“덕분에 여기저기서 불만이 많습니다. 엄연히 절차가 있는데도 말이죠.”

늘 단정한 아그네스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올 정도면, 다른 군부 기사들은 속이 부글부글 타오르고 있다는 소리였다.

“그래. 어딜 가나 그런 식으로 약속 시간을 잡는 손님은 환영받지 못하지. 아무리 금사 기둥의 정상화가 시급한 사안이라지만, 꽤 무례하잖아.”

이런 식의 기세 싸움?

나는 언젠가부터 계속 들고 다니게 된 지휘봉을 한 손으로 툭툭 쳤다.

***

“휘유, 이거 생각보다 규모가 크네.”

라파엘이 휘파람을 불었다.

“그만한 일이긴 하지. 금사 기둥이 그냥 돌기둥이 되었다니…. 역사 속 전설의 한 페이지에 내가 있다니 영광이 따로 없지.”

슐로이츠가 들어간 국무 회의가 끝난 지 며칠 되지도 않아 왕실에서는 근위대와 각종 인재를 군부로 보냈다.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세간이 주시하고 있는 일인 데다가 사안이 중요하기도 했고.

“모든 금사 기둥이 힘을 잃은 건 아닙니다.”

“유적 부근에서부터 점차… 금사 기둥들의 빛이 꺼져 가고 있습니다. 꼭 전염병 같군요.”

“도대체 군부에서는 폐허의 유적에서 멋대로 뭘 발견한 겁니까? 역병을 퍼뜨린 것도 아니고.”

마지막은 시비조였다. 근위대 기사의 명백한 시비에 라파엘의 이마에 힘줄이 돋았다.

“군부에서 멋대로 발견하긴 했지.”

순간 들려온 목소리에 라파엘이 반사적으로 부동자세를 취했다. 군부 소속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슐로이츠가 걸어 들어오며 얼어붙은 왕실 근위대를 훑어보았다. 그들은 이렇게 일찍 슐로이츠가 올 줄 몰랐기에 숨조차 똑바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이쪽 총지휘관은 누구지?”

근위대 부단장이 막 나서려고 했을 때. 디오스가 갑작스러운 보고가 있다며 찾아왔다.

왕실 근위대들의 긴장이 한순간 녹아내린 그때.

“마저 보고해.”

특유의 우아함. 조금은 가냘프게도 들리는 미성이 긴장으로 팽팽했던 방 안을 채웠다.

“누가 근위대의 총지휘관이지?”

“아, 접니다. 르페브르 제1 사령관님. 저는 왕실 근위대 부기사단장 로….”

“잘 부탁해, 부단장.”

블란데아가 미소를 지었다. 왕실 기사단도 르페브르에 한해서는 기세가 누그러졌다.

비록 그녀가 자신의 이름을 다 듣지 않고 무례하게 잘라 먹었다고 할지라도.

“군마를 계속 갈아타면서 왔지? 이동 내내 습보를 하지 않으면 이렇게 빨리 오는 게 어렵잖아.”

“예. 제1 사령관님. 군부령에 최대한 빠르게 도착하기 위해 쉬지 않고 군마를 달려 왔습니다.”

“누구 돈으로?”

“…예? 그야 물론 근위대에게 할당된 예산을 이용….”

“근위대의 예산이 그리 풍족한 건 모국의 은혜겠지?”

“라자크는 대륙 중에서도 가장 강대한 나라입니다. 왕실 국고의 풍요로움을 일개 근위 기사가 함부로 입에 올릴 수는 없지만, 언제나 신과 주군의 은혜에 감사하며 살고 있습니다.”

“기사의 도리를 잘 알고 있네. 경은 입에 올릴 수 없지. 그런데 군부에선 입에 올릴 수가 있어.”

블란데아의 발걸음은 요정처럼 가볍게 보인다. 다만, 손에 들고 있는 금속제 막대가 심상치가 않다.

쿡.

순간 부단장은 자신이 무슨 짓을 당했는지 바로 인지를 하지 못했다.

쿡. 쿡. 쿡.

블란데아는 금속성 지휘봉으로 부단장의 머리와 가슴과 배를 한 번씩 찔렀다.

“군부는 발견한 어마어마한 황금을 그대로 국고로 헌납했으니까. 동전 하나 남기지 않고 말이야.”

“…….”

“저택 한 채 값과 맞먹는 군마들을 낭비하듯 갈아타며 온 주제에….”

블란데아의 목소리는 차가우면서도 다정하다.

“역병?”

“…….”

“돈은 즐겁게 쓰고 재난을 미리 발견한 군부의 공로는 아득바득 깎아내리려고 애를 쓰네. 너무나 천박하고 한심하잖아.”

“사령관님! 말씀이 심해도 너무 심하십니다!”

“심해?”

블란데아가 턱을 가볍게 기울였다.

“어디가 심한지 설명해 봐.”

“외람되오나 방금 제1 사령관님의 언사는 명백히 군의 사기를 저하시키며, 협력을 위해 군부로 온 기사들 사이를 편 가르는 행위….”

“편?”

블란데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부단장의 얼굴이 굳었다.

“경의 부하가 아까 뭐라고 지껄였는지 그대로 다시 말해 보게 해.”

부단장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응? 저 건방진 새끼가 뭐라고 했는지 다시 반복하게 하라고.”

“하…!”

“못 하겠나 보네.”

쿡.

“큽!”

목젖 아래를 가혹하게 찌르는 지휘봉.

굴욕감에 부단장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지금 블란데아의 행동은 높은 귀족이 아랫것들을 노리개로 갖고 노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아무런 항변도 못 하는 부단장을 보면서도 블란데아의 얼굴은 여전히 얼음 같은 미소로 덧씌워져 있다.

“큽…!”

그녀에게 무릎이 걷어차인 근위대 기사가 휘청거렸다.

“기강이 이렇게 무너져 있는 기사단은 처음인걸.”

꼴같잖은 벌레와 눈앞의 기사가 다르지 않다는 표정이다.

“한 번만 더 이따위 소리를 지껄이면 군부 재판에 넘길 테니 입조심하도록 해. 이 건방진 새끼야.”

라파엘은 튀어나오려는 웃음을 참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정말… 성격 안 좋으시네. 우리 블란데아 사령관님이.’

너무 좋지 않은 데다가 악랄하기까지 하질 않은가.

블란데아는 또 누군가가 건방진 소리를 지껄이길 고대하겠다며 웃고는 나갔으니까. 끅끅거리느라 라파엘은 블란데아가 의미심장하게 자신을 보고 나갔다는 사실은 꿈에도 알지 못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