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단 숙소로 안내해 드리겠다고 하며 라파엘과 아그네스는 절도 있게 걸음을 옮겼다.
“그나저나 저 공자님도 좀 …와 비슷한 과인 것 같습니다.”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별걸로 다 질투하시네. 저래서 사령관님 결혼은 어떻게 허락한 거지?”
“…가 손아래 처남으로 들어오면 그때부터 사사건건 트집을 잡아 괴롭히겠다는 전략 아닐까요?”
“아!”
토끼 눈을 뜨는 라파엘을 지켜보던 엔리코르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경들. 저 다 들립니다. 일부러 목소리 줄인 그 부분은 뭐, 총사령관님이요?”
“…….”
***
헥토르에게 편지를 보내고 난 후에는 어머니에게도 편지를 보내고 싶었다.
‘서기관들 하는 모습을 보니 절대 안 되겠지만.’
첫날에 그나마 기를 죽여 놓아서 저 정도지, 서기관들은 마치 감시하는 간수처럼 내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엔리코르가 직접 온 게 다행이지.”
내 말에 엔리코르가 픽 웃었다.
“아니었으면 한마디도 전하지 못했을 테니까. 오늘만 해도 그래. 자기들이 뭐 어쩔 거야?”
엔리코르가 턱을 기울이며 말했다.
“남매가 사이좋게 차를 마시겠다는데 감히 끼어들 정신 나간 놈이 있을 것도 아니고.”
나는 빙긋 웃었다.
날이 선선한 가을이었기에 우리는 바깥에 마련된 테이블에서 서로의 맞은편에 앉아 차를 마셨다. 우아한 곡선이 가득한 사교계의 티 테이블처럼 화사하고 사랑스러운 맛은 없었지만, 고상하고 단단한 선들이 정교하게 이어진 가구들은 장엄할 정도로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내뿜었다.
“원래 이건 귀빈이 올 때 사용하는 건데, 굳이 내놨네.”
이런 때 권력을 실감하게 된다. 난 굳이 명령하지도 않았는데, 엔리코르가 내 오라버니라는 이유로 기사들은 군부에서 제일 좋은 것들을 일단 내놓고 본다.
“…나도 본래 귀빈급으로 대접받는 게 맞거든, 블란아? 르페브르 공자라고.”
“아버지도 아니고 한낱 후계자한테 내어 줄 만큼은 아니란 말이야.”
“블란아. 너 군부 임시 소속이야. 르페브르의 직계라고. 이 오라버니를 이렇게 홀대해도 되겠어? 동생 키워도 소용없다더니….”
엔리코르가 배신감에 찌든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실랑이를 하다 보니 슬슬 주변을 맴도는 시선도 멀어졌다.
나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감시 맞지?”
“맞아. 확실히.”
엔리코르가 지루하다는 눈으로 서기관들이 머물던 자리를 훑었다.
“있잖아, 엔리.”
나는 엔리코르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이고 물었다.
“혹시 가문에 첩자가 있는 거 아닐까?”
“첩자?”
“물론, 르페브르니까 첩자의 잠입은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냥 갑자기 노파심이 들었을 뿐이라고 변명하려고 할 때.
“그만큼 더 교묘하게 파고들겠지. 아주 오랫동안 가문에 봉사하면서 완전히 내부인으로 정착할 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을 수도 있고.”
엔리코르는 의외로 내 말에 순순히 수긍했다.
“그게 몇십 년이나 이어진다면, 누가 감히 의심을 하겠어?”
‘말투에 약간 날이 선 것 같은데?’
최근에 몰래 숨어 있던 가문의 첩자를 잡아낸 걸까?
엔리코르는 내 동그래진 눈을 보더니 천천히 입매를 허물었다. 그는 평소다운 다정한 미소를 그려 내며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런데 첩자 얘기는 왜 비너스가 없을 때 하는 거야?”
“응?”
왜 갑자기 그런 질문을 하느냐고 묻는 게 아니고, 왜 비너스가 없을 때 질문하는 거냐고 묻는 이유가 뭐지?
아까부터 엔리코르의 반문들이 조금씩이지만 어긋난 퍼즐 조각처럼 느껴졌다.
일단 이 주변엔 아무도 없는 게 맞았다. 비너스조차.
“비너스는 지금도 맡고 있는 일이 많잖아. 내 미약한 의심이라도 알게 되면 또 그 첩자를 찾아내려고 이리저리 신경을 쓸 텐데….”
“뭐, 그러다가 또 그 얼굴이 상하면 어쩌냐고?”
내가 어릴 적부터 농담으로 하던 말을 엔리코르는 곧장 저렇게 놀리곤 했다. 그렇다고 말하면서 픽 웃으니까 엔리코르가 착잡한 미소를 지었다.
“엔리?”
“착하기는.”
“……?”
“당신이 너무 선량했던 게 문제였습니다.”
엔리코르의 말을 듣는 순간, 파놉테스의 희미했던 미소와 목소리가 겹쳐졌다. 엔리코르는 별생각 없이 한 말일 텐데도 내용이 비슷해서일까….
“이건 내가 알아볼게. 나는 종복을 성으로 보내면 되는 거니까. 아버지께 상의를 드려 봐야지.”
“응. 엔리.”
“넌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으레 이어지는 잔소리를 한 귀로 흘리면서도 엔리코르의 표정이 평소보다 밝지 않은 점이 신경이 쓰였다.
‘짐작 가는 이라도 생겼나?’
아니면 혹시 벌써, 의심되는 이가 있어서 감시를 하고 있다든지.
***
비너스는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엔리코르는 블란데아와 단둘이 대화하는 도중에 누군가가 끼어드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엔리코르 르페브르는 대귀족 가문의 후계자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말랑한 성격이었으나 속내는 사실 냉정한 편이었다. 선을 넘으면 가차가 없었다.
가문의 후계자가 이런 성격이니, 당연히 휘하 기사들도 충실히 복종했다.
“아이고, 기사님!”
그때 멀리서부터 들려온 목소리에 비너스가 몸을 움직였다.
허겁지겁 달려온 건 다름 아닌 화가였다. 잘 알고 있었다. 블란데아가 초상화를 맡기겠다며 군부까지 불러낸 저 화가는 왕도에서도 상당한 유명세를 갖고 있었다.
“여기 계셨군요. 군부는 지도가 제공이 되지 않는 곳이라 어찌나 길이 복잡한지…. 건물도 수백여 채고요. 아이고, 내 정신 좀 봐. 보여 드릴 게 있어서 가져왔습니다!”
화가는 헉헉대더니 등에 지고 온 넓적하고 커다란 꾸러미를 풀었다.
비너스는 내용물이 뭔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었다.
“초상화가 드디어 완성이 되었습니다. 르페브르 아가씨께서 어찌나 독촉을 하시던지…. 저는 기사님이 뭐 어디로 떠나시는 줄 알았습니다.”
화가가 하하 웃으며 땀을 닦았다. 비너스는 초상화를 내려다보았다.
블란데아가 함께 웃고 있는 그림에 비너스의 눈길이 고정되었다.
“아가씨는 같이 그리지 않은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땐 일정 때문에 바쁘다고 하셨는데, 나중에 틈틈이 피사체로서의 역할을 다 해 주셨습니다.”
화가는 덕분에 두 배로 작업을 했지만, 의뢰 착수금은 네 배로 받게 되어서 아무 문제 없었다. 역시 그 대가문 르페브르의 아가씨다운 화통한 씀씀이라고 찬양도 했다.
“르페브르 아가씨가 어찌나 신신당부하시던지요. 기사님을 참 많이 아끼시는 것 같습니다. 보아하니 어릴 적부터 아가씨의 곁에서 호위해 온 듯한데….”
“그랬지.”
“아이 때부터 함께하셨으면 그야말로 가족이나 마찬가지겠습니다. 캬, 아가씨를 위해서라면 목숨도 바칠 수 있고, 완전히 동화 속의 기사 아니겠습니까?”
비너스는 그림을 받아들였다.
블란데아에게 목숨도 바칠 수 있다.
목숨도.
불시였다.
문득 가슴이 조이며 심장에 불길이 붙은 것처럼 괴로웠다. 늘 참아 넘기던 게 한순간 불가능할 정도로 고통스러웠다. 저도 모르게 흘러나온 통증의 파편을 화가는 대번 감지했다.
“아이고, 기사님. 갑자기 안색이 왜 그러십니까? 아프십니까? 다, 당장 군의관을…!”
“호들갑 떨지 말고 가 보게. 이건 오랜 지병이니 신경 쓸 것 없어.”
“예? 예….”
화가가 “미인박명이라더니….” 하고 안쓰럽게 중얼거렸다.
비너스는 초상화에 다시 부드러운 덮개를 씌웠다. 어린 시절부터 인생사에 별 관심이 없던 무뚝뚝한 블란데아가, 거의 유일하게 가졌던 몇 안 되는 취미 중 하나라서.
항상 비너스의 얼굴을 그리고 그 옆에 자신도 함께 그리는 게 취미였던지라 초상화를 다루는 건 눈 감고도 할 수 있었다.
그사이 폐를 조이던 통증도 차차 잦아들었다.
비너스는 초상화를 든 채로, 여전히 웃고 있을 엔리코르와 블란데아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돌아가야지. 평생 그렇게 떠돌 것이냐?”
“너는 괴수야. 인간으로서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고!”
“순진하기는! 르페브르의 아가씨는 네가 사람인 줄 알고 귀애하는 것이지. 시체를 여전히 아껴 줄 인간이 세상에 어디 있느냐?”
“돌아가고 싶으면 그분의 말씀에 복종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