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로이츠가 왕궁으로 떠난 후, 나 역시 숨 돌릴 틈 없이 바빴다.
‘총사령관과 제1 사령관이 동시에 군부를 비우려면 이렇게 많은 서류를 처리해야 하는구나.’
저번 쉴론 항로 복구는 국가적인 일이라 그렇다 쳤지만, 프로키온 영지에 간 건 순전히 개인적인 일이었는데.
물론 내가 제1 지휘관이었을 시절이라 지금처럼 행보 하나하나가 공적인 문서로 남아 있는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걸 다 해결하면서까지 날 프로키온 영지로 끌고 간 게 보통은 아니야.’
어깨를 으쓱한 나는 걸음을 옮겼다. 나를 본 기사들이 바로 가볍게 묵례 후 문을 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귀족가의 고급 저택 응접실에서나 쓸 법한 은은하고 달콤한 향이 흘러나왔다. 사교계의 시류나 일반적인 선호와는 동떨어진 군부의 구역에서 이런 향을 들여놓는 공간은 몇 개 없다.
“블란아!”
타지에서 온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응접실. 앉아서 차를 마시고 있던 엔리코르가 벌떡 일어나 나를 반겼다.
“엔리, 신관들은?”
“보자마자 신관들부터 찾네. 동생 키워 봤자 소용없다더니….”
툴툴대면서도 엔리코르의 입가엔 미소가 가득했다.
“서기관들이 같이 왔어.”
“……?”
뜻밖의 말이었다.
“오늘 우린 주고받을 서류가 없는데. 왜?”
이해가 가지 않았다.
군부와 르페브르 간의 이동하는 서류를 공적으로 기록해야 하는 문서로 취급한 건 이유가 합당했다. 원래 있던 국법이 적용이 된 사례라 불편한 점이 많았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엔리코르가 ‘직접’ 왔는데도 왕실의 서기관들이 군부까지 따라온 것은 몹시도 과한 처사였다.
심지어 나는 듣지도 못했으니, 고의적으로 늦게 합류한 게 맞다는 소리였다.
달칵.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무려 네 명의 서기관들이 들어왔다.
“블란데아 사령관님. 서기관들을 데려왔습니다.”
아그네스가 공손한 목소리로 보고했으나 나는 전혀 유쾌하지 않았다.
“서기관들.”
그들에게 자리도 권하지 않고 물었다.
“예, 제1 사령관님.”
“나는 서기관들이 온다는 얘길 들은 적이 없는데, 오기 전 보고를 했나?”
“군부에 들어오기 위한 서류는 이미 작성 후 제출했습니다. 다만 시간이 급박하여 아직 확인을 못 하신 모양….”
“아니.”
나는 팔짱을 끼며 말했다.
“내게 보고를 했냐고. 군법에 따라 내가 지금은 군부 최고 결정권자라서 받아야 할 서류가 적지 않은데.”
“…그건 관례상 서류가 중복 적용이 되는 걸로 압니다만….”
“관례?”
나는 픽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아그네스.”
“예, 블란데아 사령관님.”
“미쳤나?”
아그네스가 곧장 기합이 들어가 부동자세를 취했다.
“시정하겠습니다.”
“도대체 군부의 어떤 정신 나간 새끼가.”
순간 서기관들의 어깨가 굳었다.
“이 왕실 서기관들에게 관례라는 말을 써도 된다고 허락해 줬지? 경인가?”
“저는 아닙니다만 시정하겠습니다.”
“서기관들의 출입을 허락한 기사 전부 징계야.”
“존명.”
얼어붙은 서기관들을 중앙에 두고 나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서기관들.”
“…말씀하십시오. 제1 사령관님.”
“관례를 입에 담을 수 있는 건 서기관들보다 높은 사람이지. 여긴 군부니까, 군부에서 가장 높은 사람만이 말할 수 있는 거고.”
“…….”
“지금은 그게 나야.”
건방진 새끼들.
“알아들었어? 서기관들.”
속뜻을 알아챈 모양인지 서기관 중 한 명이 발끈했으나 이내 제지당했다.
“단 한 자의 누락도 허락할 수 없으니 똑바로 서류를 작성해 가져와. 그때까진 군법에 따라 서기관들은 단 한 발자국도 출입을 허락해 줄 수 없으니까.”
이쯤 했으면 꺼지라고 사납게 눈썹을 치켜뜨자 서기관들은 더 버티지 않았다. 오히려 서둘러 나가는 게, 확실히 머리는 좋다는 게 느껴졌다.
“실랑이하는 것보다 실리를 택하네.”
뒤에서 손뼉을 치는 엔리코르에게 시선을 옮겼다.
“엔리? 신관들은 어딨어?”
“급한 걸 보니 서류 작성이라는 것도 얼마 안 걸리나 보네, 블란아.”
“그래 봤자 몇 분짜리야. 쟤넨 왕실 소속 서기관들인데 서류쯤이야 오 분 내로 작성해 오겠지.”
“이쪽에 데려다 놨어.”
어쩐지 기가 찼다.
이곳은 군부인데, 엔리코르는 꼭 주인처럼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거만이 아니라 대귀족 특유의 자신만만하고 확연한 기품이 자연스레 배어 나오는 까닭이다.
내가 보기엔 그저 푼수 같은 엔리코르가 남들에게는 번듯한 르페브르의 후계자로 인식되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다.
“너 갑자기 왜 웃어?”
엔리코르가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제1 사령관님이 웃으시겠다는데 무슨 말이 그렇게 많아.”
“세상에… 어머니, 아버지. 블란데아 르페브르의 이 모습을 좀 보세요.”
엔리코르가 혀를 차던 그때. 나는 안쪽 응접실의 문을 열었고, 순간 당황해 멈춰 섰다.
“어?”
놀랍게도 잠들어 있지 않고 살아 움직이는 눈동자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안 자?”
“…저희가 맨날 자진 않습니다. 블란데아가… 윽!”
나는 가까이서 개소리를 지껄이는 신관들의 멱살을 차례로 잡고 흔들다가 눈을 돌렸다.
맨날 죽은 듯 잠들어 있던 신관들이, 하나같이 눈을 뜨고 있는 모습은 오히려 비정상적으로 보였다.
‘설마….’
개중 하나와 눈이 마주친 나는 서서히 입을 벌렸다.
“파놉테스?”
“오랜만에 인사드립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아가씨.”
“…….”
나는 잡고 있던 신관의 멱살을 던지듯 놓았다.
“얘 총사령관보다 더 행동이 무지막지해졌는데?”
엔리코르가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지만 들은 척도 않고 파놉테스의 앞에 가 섰다.
나는 신관들의 멱살을 하나씩 잡아 흔들던 것처럼, 파놉테스의 멱살을 잡아 흔들려다가 하, 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그랬는데….
순식간이었다. 파놉테스의 눈이 둥글게 휘는가 싶더니 그의 두 손이 멀어지는 내 손을 붙잡았다. 그대로 자기 뺨으로 가져가더니.
찰싹!
내 손이 파놉테스의 뺨을 때렸다.
“미쳤어?!”
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와중에도 반사적으로 손을 빼내려다가 멈칫했다. 파놉테스가 내 손을 쥔 손에 힘을 주었기 때문이다.
“다른 신관들은 멱살을 잡혔으니 저는 뺨 정도는 맞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파놉테스를 노려보며 말했다.
“그럼 네 손으로 때리지 그랬어.”
“아프셨습니까?”
“한 번만 더 두루뭉술하게, 멋대로 내 행동을 조종하려 하지 마.”
파놉테스가 천천히 웃었다.
“그러겠습니다.”
파놉테스는 꼭 신기루 같았다. 구름이나 안개 같기도 했다. 그래서 괜히 나만 더 약이 올랐다. 대답은 순순히 하는데 그마저도 진의를 확신할 수가 없어서, 무지개를 쫓아 한참 달리다가 혼자 남게 된 어린아이처럼 씨근덕대게 되는 것이다.
‘열받네.’
의도치 않게 근거리에 서게 되어서 그런지, 그의 눈동자 색깔이 아주 눈에 잘 들어왔다. 파놉테스의 눈동자에 비치는 내 얼굴이 어렴풋이 보일 정도였다.
여전히 붙잡혀 있던 내 손이 파놉테스의 뺨 위로 움직인 건 그때였다.
제 뺨 위로 멋대로 내 손바닥을 갖다 댄 파놉테스는 아무 말 없이 나를 응시했다. 그저 희미하게 짓고 있는 미소. 아까부터 멋대로 내 손을 가져가 움직여 놓고 무도함이라곤 조금도 읽어 낼 수 없다.
눈동자가 거울 같은 건 신관 특유의 차분한 분위기 때문일까?
그는 대단히 단정하고 뛰어난 미남이긴 했으나 그뿐이었다. 파놉테스에게서는 나를 향한 약간의 성애적인 면모도 발견할 수 없었다. 아니, 조금이라도 그런 게 있었으면 이미 내가 무릎을 걷어찼겠지만.
파놉테스의 입술이 조금 벌어졌다.
“최후는 잘 준비하고 계십니까?”
‘미친놈….’
파놉테스의 말에 순간 정신이 팍 들었다. 이 신관들은 다 정신병자 같았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압도적인 놈을 고르라면 당연히 파놉테스였다.
그때, 파놉테스의 뒷덜미가 잡혀 끌려갔다.
“웬일로 깨어 있나 했더니, 내 여동생한테 집적대려고 이랬나 보네.”
엔리코르는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아주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러나 파놉테스의 입가에 걸린 부드러운 미소만은 여전해 기분이 참 묘했다.
새삼 그가 잔잔하게 타오르는 촛불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 위에서 흔들리는 불빛은 시선을 빼앗는 힘이 있질 않은가.
의식을 해야만 파놉테스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 있다는 소리였다. 나는 그에게서 눈길을 떼며 말했다.
“엔리. 잠깐만 나가 있어 줘.”
“이 미친놈들 사이에 널 두고 나가라고?”
고작 한 번 손이 잡혔다고 엔리코르는 신관들을 미친놈이라고 부르고 있었다.
가만히 내게 멱살이나 잡혀 털렸던 다른 신관들이라면 조금 억울하겠지만.
“파놉테스만 있으면 돼.”
“이 자식이 제일 미친놈 같거든? 문 앞에 있을게.”
엔리코르는 못마땅한 기색으로 신관들을 데리고 나갔다.
달칵.
문이 닫히는 소리.
“파놉테스.”
나는 파놉테스의 무릎을 발로 콱 걷어찼다. 예상했듯이 그는 아까 신관들처럼 신음조차 내지 않았다.
“너도 사실은 괴수야?”
“거기까지 알아내셨습니까?”
“……?”
그냥 던져 본 말의 대답이 의미심장했다.
“내 주변의 누가 혹시 사람이 아니라 괴수야? 아니, 그게 말이….”
말이 되나?
바로 스쳐 간 건 루리였다.
“살아 있는 사람이 어떻게 괴수가 되겠습니까. 농담입니다.”
맥이 탁 풀렸다. 나는 파놉테스를 한 대 더 걷어차고 물었다.
“넌 사람은 맞아? 똑바로 대답이나 해. 괴수야?”
“그렇게 보이십니까?”
파놉테스가 그답지 않게 조금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괴수는.”
“넌 대체 뭐 하는 놈인데? 여기가 책 속 세상인 건 맞아? 아니, 애초에 너는….”
계단을 오르면서 말하는 사람처럼 자꾸 숨이 가빠졌다. 나는 갈비뼈를 조이려고 애썼다. 언젠가 라파엘이 알려 준 분노 조절법이었다.
지금 나는 화가 난 걸까? 아니면….
무서운 걸까?
“블란데아 아가씨.”
“…….”
“저는 대답할 수 있는 게 한정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