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부러진 열쇠와 영원치 않은 자물쇠-(5) (160/190)

“중앙의 세 명을 제외하고는 전원 사살해라.”

“존명!”

“블란데아. 정중앙부터 이 공간 전체가 오염되어 있는 게 맞나?”

“맞아요.”

“정화할 수 있겠나?”

“음….”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흑마법사들이 서 있는 곳을 신중하게 가늠해 보았다.

“저 정도면 할 수 있어요. 쓰러지지 않을 것 같습니다.”

오염으로 이어진 곳을 한 번에 깨끗이 하는 게 정화의 기본이다. 폐수는 약간으로도 주변을 쉬 오염시키기 때문에, 한 번 정화할 때 맞닿아 있는 모든 곳을 정결하게 해야 했다. 아니면 의미가 없었다.

“따라와. 내 뒤에 붙고, 절대로 멀어지지 마.”

슐로이츠가 주의 깊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정 멀어졌다 싶으면 움직이지 말고 그 자리에 있어.”

차가운 목소리와 사무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냉담한 태도. 성검을 들었을 때 나오는 슐로이츠의 버릇이다.

그러나 읊조리는 내용만은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들려서, 급박한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찾으러 오게요?”

“그래.”

“알겠어요.”

나는 슐로이츠를 따라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고함 소리와 비명 소리. 이상한 주문 소리며 검을 휘두르는 소리. 그리고 흑마법을 잘못 맞은 성검들이 터져 파편이 되는 소리들이 고막을 꽉 채웠다.

끊임없이 우박과 빗줄기가 쏟아지는데, 거대한 우산이 머리 위에서 모든 걸 막아 주는 것 같았다.

슐로이츠의 검을 맞고 깨져서 흘러내리는 암흑색 파편들을 눈에 담는다. 바닥에 닿기도 전에 사라져 버리는 그 빛 덩어리들은 전부 흑마법이었다. 이것들이 사람을 먹어 만들어 낸 에너지라고 생각하자 속이 조금 울렁거렸다.

왜 <미친 미인의 최후>에서는 제대로 등장도 않는 흑마법사가 내 눈앞에, 그것도 ‘폐허의 문’ 안에서 발견되었는지는 이제 궁금하지도 않았다.

저 자식들을 잡아다 고문하면 뭐라도 토설하겠지.

신관들은 공식적으로 르페브르에서 보호 중이라 몸에 흠집 내는 게 어렵지만 이놈들은 아니니까.

‘엔리코르가 들었으면 아무리 그래도 신관이랑 흑마법사를 같은 선상에 두면 어떡하느냐고 그러겠지.’

오늘 어떤 놈이든 반드시 사로잡아 두들겨 패서라도 진실의 일부나마 듣고 말 것이다.

나는 검을 꽉 쥐었다.

슐로이츠의 무자비한 공격에 흑마법사들은 괴성을 지르며 쓰러지거나 흩어지고 있었다. 애초에, 슐로이츠를 상대할 수 있는 존재란 게 있기는 한지 의구심도 들었고.

나는 이미 비어 있는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댔다. 르페브르의 이능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건 당연히 가주인 아버지였다. 남들은 가주로서의 권위를 먼저 생각하겠지만 가족인 나는 알고 있었다. 정화의 이능을 사용하는 건 생각보다 체력이 많이 소요되었고, 심력도 달렸으며, 언제나 위험한 곳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노련한 아버지라면 이 정화도 빠르게 진행을 하였겠지만, 나는 아니었다. 정화에 있어서는 초보자나 다름없었다.

덕택에 시간을 조금 더 잡아먹고서야 가늠할 수 있었다.

“슐츠, 여기선 안 돼!”

시끄러운 소리에 내 목소리가 묻힐까 봐 일부러 크게 외쳤다.

“정중앙이 아니야!”

“그럼 어느 쪽으로 가면 되지?”

“저기… 안쪽으로 가야 해!”

슐로이츠가 날아오는 흑마법을 쳐 낸 후 내 팔목을 잡아 일으켰다.

“움직여. 뒤에 붙어서 따라갈 테니.”

나는 망설이지 않고 곧장 걸음을 옮겼다. 안쪽에 있는 문으로 막 걸어 들어가려고 했을 때였다.

“……!”

나는 흠칫 멈춰 섰다. 발 앞으로 쏟아진 수많은 흑마법들이 슐로이츠의 검에 의해 부서져 산산조각이 났다.

“각하!”

“블란데아 사령관님!”

동시에 흑마법사들이 온몸을 비틀며 발광을 하기 시작했다. 두 눈이 찔린 맹수처럼 사납게 날뛰었다.

“안쪽에 뭐가 확실히 있는 모양이군.”

다급한 기사들과는 달리 슐로이츠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당혹감도 묻어나지 않았다.

나는 또 바보처럼 그 나른하며 조금은 권태롭게 들리는 목소리에 안심을 하고 만다.

우리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달렸다.

폐허의 문. 이 알 수 없는 미지의 공간은 마치 포도송이 같았다.

거대한 원형 공간이 다닥다닥 붙어 이어져 있었으니까. 우리가 입구에서부터 걸어온 복도도 사실상 벽에 빙 둘러져 있는 통로가 틀림없었다.

달려드는 흑마법사들은 내게 어느 정도 이상 다가오지 못했다. 그 전에 절명했으니까. 나는 쉬지 않고 달렸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문에는 두꺼운 천이 쳐져 있었다. 나는 곧장 들고 있던 검으로 천을 잘라 냈다.

이런 사소한 것도 함부로 만지지 않는 이유는, 표면에 독을 발라 놓았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잘려 나간 천은 꼭 르페브르 성에 있는 신관들의 옷과 재질이 비슷하게 느껴졌다. 무언가를 보호하기 위한 두껍고 거친 옷감이 흔치 않아 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순간 안쪽에도 이만큼이나 많은 성검들이 꽂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아니,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작중’에서처럼 수많은 괴수들이 우글거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스며든 그때.

나는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

귓가로 불길하고 장엄한 레퀴엠이 들리는 듯한 환각마저 느껴졌다.

세 개의 문을 통과해 마침내 당도한 폐허의 가장 안쪽에는 성검도 괴수도 없었다.

다만 온통 황금이었다.

짙고 매혹적인 빛깔의 황금이 마치 모래알처럼 바닥에 가득 쌓여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꿈 같은 정경에 마음이 빼앗긴 게 아니었다.

나는 멍하니 입구 반대편의 벽을 바라보았다.

황금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언덕이 그곳에 있었다. 아름다운 선으로 물결치는 황금빛 곡선은 어쩐지….

내 머리카락과 닮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내가 르페브르의 직계답게 짙은 금발이라 들었던 생각일지도 몰랐다.

정신을 차리고 정중앙으로 걸어가기 위해 막 걸음을 뗀 직후.

“지, 지진입니다!”

“굴이 무너질지도 모릅니다!”

바닥으로 진동이 느껴졌다. 흔들렸다. 이대로 압사할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에 압도된 것도 잠시.

나는 천천히 입을 벌렸다.

나와 마주한 거대한 황금색 언덕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미인이 돌아눕는 것 같았다.

황금색으로, 아니. 황금으로 이루어진 얼굴은 벽을 등지고 완전히 내 쪽을 향했다.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성인 서른 명은 족히 둘러쌀 수 있을 만한 거대한 면적의 얼굴이 말 그대로 나를 돌아보았다.

속이 울렁거렸다.

그 얼굴은 분명히 내 얼굴이었으니까.

악랄할 만큼 유혹적인 황금으로 이루어진 얼굴은 조금도 아름답지 않았다.

깨진 도자기를 억지로 이어 붙인 것처럼 그저 누덕누덕 기워져 끔찍하기만 한 얼굴.

“…하.”

순간 등줄기가 곤두선 내가 주춤하며 뒤로 물러서려 할 때, 허리를 감싸 당기는 단단한 팔을 느꼈다.

“르페브르라 그런지 별의별 광신도가 다 붙나 보군.”

“슐….”

꽉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간신히 목을 가다듬은 내가 입을 열었다.

“슐츠…. 저게 보여?”

“보여. 네 얼굴 같은데.”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릴 뻔했다. 너무나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하면 현실인지 꿈인지 차마 구분할 자신도 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때였다.

내 쪽을 향해 멎어 있던 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내 몸이 차갑게 굳는 것과 거의 동시에 나를 껴안고 있던 슐로이츠의 팔에 힘이 더욱 들어갔다.

“눈이 움직이는 게 아니야. 블란데아.”

“…….”

“똑바로 봐. 눈동자를 채워 넣을 루비는 미처 구하지 못한 모양이니까.”

조각상의 눈동자를 채우고 있던 붉은색이 말 그대로 출렁이고 있었다. 조각상의 옆얼굴을 타고 흘러내린 붉은색 액체가 쉬지 않고 바닥을 적셨다.

동시에 느껴지는 비린 냄새. 역겹게도 한 가지 사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아주 가지가지 하는군. 짐승의 피인지 사람의 피인지 구분도 안 가는 걸 채워 놨어.”

슐로이츠가 짜증스럽게 내뱉었다.

“미친 새끼들.”

빈정거리는 욕설을 듣고서야 차갑게 식어 있던 손발에 미약하게나마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각하!”

“세 명을 제외하고 전부 사살했습니다. 셋은 포박해 놨습….”

“……?!”

치열한 전투를 끝낸 디오스와 기사들이 서둘러 뛰어 들어왔다. 헐떡이며 보고를 하던 그들은 이 괴기스러운 방을 보고 흠칫 놀랐다.

“이… 이 황금들은 다 뭡니까?”

다만 그들은 나와 다른 지점에 놀란 것 같았다. 그저 이 넓은 공간을 가득 메운 황금에 정신을 못 차리는 기색이었다.

“흑마법사들이 모아 놓은 것 같은데….”

“…가히 왕실 예산의 몇 년 치를 압도하는 양인데요.”

“저 누더기 같은 조각상은 도대체 또 뭐고…. 아주 이상한 악취미가 있는 놈들이었군요.”

“흑마법사가 황금에 집착한다는 얘기는 또 처음 듣습니다만….”

놀랍게도 그 어떤 기사도 나와 조각상을 번갈아 보지 않았다. 예의로 그러는 게 아니었다. 아무리 공손한 이라고 해도 불가능한 행동을 기사들은 하고 있었다.

“디오스 경.”

“…예. 블란데아 사령관님.”

내 긁힌 상처를 이를 악물고 보고 있던 디오스가 가볍게 묵례를 했다.

“저 조각상이 어떻게 보여?”

“…황금이라 반짝거립니다?”

“그거 말고는?”

“눈에 흐르는 액체가 피 같습니다.”

그게 다였다. 나는 반사적으로 깨달았다.

슐로이츠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여전히 네 얼굴로 보이는데, 블란데아.”

“…저도 그래요.”

“그만 봐. 더 봐서 좋을 것도 없겠군.”

난 고개를 끄덕였다. 바늘로 얼기설기 꿰맨 것 같은 내 얼굴을 더 보고 있기 힘든 참이었다.

“각하. 이 황금들은 여기 그냥 두고 갑니까?”

“보고가 끝날 때까지는 둬야지.”

“국고로 귀속되기 전에 개인적으로 좀 챙겨 가면….”

기사 한 명이 설레는 표정을 지었다가 등을 얻어맞았다.

“이 황금들은 흑마법의 증거라고! 주웠다가 가족이 병들고 가세가 망하고 나라가 멸망하면 어쩌려고 그래!”

“아니… 그런가?”

금세 기사들이 찝찝하다는 표정으로 손을 털었다.

“정화를 시도해도 될까요? 슐로이츠 경.”

“어디에서 해야 하지?”

“이쪽이요.”

그쯤 해서 벌렁거리던 가슴은 억지로 가라앉힌 상태였다. 나는 아까 전 가늠해 보았던 오염지의 정중앙으로 걸어갔다.

무릇 군부의 정예라고 하면 이런 놀라운 일들을 수도 없이 겪어도 그저 의연해야 하는 법이다.

기사 하나가 물었다.

“제1 사령관님. 낯빛이 영 창백한데 무리하게 정화를 시도하다가 쓰러지시는 것 아닙니까?”

“아니야. 이 정도쯤이야….”

나는 황금으로 반짝거리는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