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부러진 열쇠와 영원치 않은 자물쇠-(4) (159/190)

“오늘 참 희한한 것들을 많이도 구경하는군.”

표식이 없는 금사 기둥에 황금색 숲에 이런 문까지….

나만 알고 있던 비밀에 사람들이 점차 다가온다는 건 묘한 기분이었다. 나는 조금 웃었다.

“그러게. 너무 많이 보네.”

우거진 나무들은 처음에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숲처럼 보였으나 사정을 알고 나니 달랐다. 그저 인위적으로만 느껴졌다. 이 문을 은폐하기 위해 일부러 조경을 복잡하게 해 둔 것 같았다.

‘소설에선 이런 묘사는 못 봤는데.’

슐로이츠는 바닥에 붉은색 표식을 심어 둔 후 말했다.

“어때, 블란데아. 함께 들어가 확인해 봐도 되겠나?”

난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가 있을지 모르잖아.”

실제로는 저 안에 어마어마하게 많은 괴수들이 있단 말이지.

어느 정도냐면 왕국과 대륙이 멸망의 초입에 들어설 정도로.

“지금도 충분하지 않나? 주요 병력은 적잖게 끌고 왔는데.”

“적잖게 끌고 온 정도니까, 할 수만 있다면 다 끌고 와서 탐색해야 해.”

물끄러미 나를 보던 슐로이츠가 툭 던지듯 말했다.

“문 안이 많이 위험한가 보군.”

“척 보기에도 의심스럽잖아?”

“아니면 위험할 걸 알고 있는 건가?”

“그….”

내가 바로 마땅한 대답을 찾지 못하자, 슐로이츠가 피식 웃었다.

“너는 정말 알면 알수록 신기하고 수상해.”

그 말은 꼭 수면 위의 파동처럼 내 마음을 울렸다.

“그럼, 네가 원하는 만큼 준비를 하고 다시 올까.”

슐로이츠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막 문에서 멀어지려던 찰나였다.

문득 몸이 멈춰 섰다.

자의가 아니라 타의였다. 굳이 표현하자면 마리오네트가 된 느낌. 나는 감히 인지하지도 못하는 거대한 힘이 내 몸에 달린 실을 멋대로 잡아당기는 듯한 낯선 기분이었다.

“……!”

일전, 쉴론 항로에서의 일 이후로 오파츠는 반드시 군복의 바깥에 매다는 것으로 군법이 바뀌었다.

전투 중 분실을 우려해 오파츠는 군복의 옷감이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단단하게 고정되었는데 그 오파츠가 거대한 문 쪽으로 있는 힘껏 당겨지고 있었다.

슐로이츠의 날카로운 칼날이 나를 질질 끌고 가던 오파츠의 끈을 잘라 냈다.

쾅!

그때 둔탁한 철문에 누군가 힘껏 돌을 던진 것 같은 굉음이 온 숲을 울렸다. ‘나’라는 무게를 잃은 오파츠가 그대로 철문에 날아가 박힌 것이다.

슐로이츠가 가볍게 욕설을 짓씹으며 제 품에서 달아나려는 오파츠의 끈을 끊어 내 던졌다.

쾅!

동시에 거짓말처럼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열렸다.

***

“조용히 포위해라. 이탈 없이 자리를 지키는 것을 최우선으로 한다.”

라파엘이 낮은 목소리로 지시했다. 이미 열려 있는 문 근처로 열 명이 넘는 기사들이 포진되어 있었다. 이 거대한 절벽 역시 백여 명에 가까운 군부 기사들이 포위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 주변을 빈틈없이 지키던 와중. 벌써 열댓 마리의 괴수들이 달려들었다.

‘꼭 이곳을 지키는 번견처럼….’

괜한 상념이라고 생각하며 라파엘이 고개를 털어 버렸다.

개소리였다.

“이상하지 않습니까? 라파엘 경.”

아그네스가 신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괴수란 모름지기 눈에 띄는 인간은 반드시 뜯어 먹었습니다.”

“…그래. 그랬지.”

“그런데 요즘은… 느낌이 조금 다릅니다.”

“…….”

“인간을 꼭 봐주고 있는 듯한…. 개소리겠죠?”

“저기 가서 개처럼 짖어.”

면박을 주었지만 사실, 라파엘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괴수만 십 년 넘게 상대했다. 그러니 이런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괴수가 인간을 봐줘?

왜?

왈왈 짖고 온 아그네스가 한숨처럼 웃었다.

“위험 신호 개편을 다 끝내 놓은 게 새삼스럽습니다. 블란데아 사령관님이 있기 전에는….”

그러니까 오파츠라는 게 세상에 등장하기 전에는.

괴수가 열 마리만 나타나도 최고 위험 신호를 울려야 했다. 고작 반년 전의 일이다.

아그네스는 군복에 달린 아름다운 돌을 만지작거리다가 물었다.

“그런데 라파엘 경. 각하와 블란데아 사령관님께서는 굳이 같이 수색조로 저 문 안에 들어가셔야 하는 겁니까?”

라파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어쩌겠어. 각하께서 뒤에 서 계시는 성정이 아닌데.”

“아니, 그건 저도 잘 알지만 블란데아 사령관님은 들어가지 않고 여기 계셔도 되잖습니까? 애초에….”

“안에 괴수들이 많을 것 같습니다. 르페브르에게 의탁하고 있는 신관들에게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거든요.”

블란데아의 말은 높은 신뢰성을 지녔다. 안에 괴수들이 많든 적든 당장 수색을 해 봐야 한다는 것에는 모든 지휘관들의 의견이 합치하기도 했다.

다만 블란데아가 꼭 안에 들어가야 하는지는 의문이었다.

“내부가 혹시 많이 위험하면….”

“위험한 걸 직감하고 데리고 가신 거야.”

“…예?”

라파엘이 눈동자를 한 번 굴렸다. 온통 황금색 일색인 이 아름다운 유적에서 갑자기 나타난 의문의 거대한 철문….

그 높이만 해도 2층 건물을 압도할 정도였다. 왕도에 올라가서 보았던 왕궁의 정문이 생각날 정도였다.

왜 폐허의 유적 안에 이런 미지의 문이 있는 것인가.

“위험하니까 차라리 옆에 두는 게 낫다는 거지.”

아그네스는 수색조에 포함되어 있어서 미처 보지 못했을 터다. 아까 전, 지반이 무너져 내리면서 블란데아가 절벽 밑으로 떨어질 때.

바로 옆에 있었던 덕에 라파엘은 순간 슐로이츠의 표정이 얼마나 딱딱하게 굳는지 모두 보았다.

군부의 그 역사적인 총사령관은 단 한 번도 그런 식으로 긴장한 적이 없었다. 화를 내거나 욕설을 내뱉을지언정 단 한 번도 두려워하는 꼴을 본 적이 없었다.

그런 슐로이츠 프로키온이 순간이지만 이성을 잃을 정도로 동요했다는 소리였다. 블란데아가 절벽 밑으로 미끄러질 뻔했다는 이유로.

“도대체 안에 뭐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포위를 하는 건 미지의 상대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이쪽이어야 해.”

“예. 라파엘 경.”

“왕국이 아니라 대륙이 뒤집어지겠군….”

라파엘이 헛웃음을 지었던 그때.

문 안에서부터 기사들의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

시간을 돌려 조금 전.

“…수정등이 이렇게 많을 수가 있습니까?”

“갖다 팔면 떼돈 벌겠는데요.”

“확실히 누가 지내고 있는 흔적이 있습니다.”

나는 슐로이츠의 뒤를 부지런히 따라가고 있었다. 내 옆에는 디오스, 뒤에는 1월대 소속 기사들이 함께였다.

문 안의 공간은 크고 넓었으나 어둡지 않았다. 발은 쉴 새 없이 움직이면서 머릿속 생각을 헤집느라 정신이 없었다.

여기서 분명 루리는, 그리고 루리를 지키기 위해 날쌔게 움직이느라 덩달아 이 문을 발견한 힐드온은 바로 문을 열지 못한다.

작중에서는 왕실에서의 도움까지 받고 나서야 겨우 폐허의 문을 여는 것으로 나오는데….

‘폐허의 문이 오파츠를 끌어당겼고 그대로 문이 열렸어.’

왜 오파츠가 열쇠 역할을 하는 거지?

이건 아직 라파엘이나 아그네스도 모르는 일이었다.

오파츠는 그저 괴수에게서 사람을 보호해 주는 성물 정도로 인식되는 게 전부였다.

“여기부터 울리는 소리가 달라집니다.”

디오스가 나지막한 소리로 보고했다. 여기까지는 똑같다. <미친 미인의 최후>에서 읽었던 문 내부의 모습과 묘사가 거의 일치했다.

제법 길게 이어지는 복도. 그리고 어느 순간 거대한 극장 안에 들어온 듯 뻥 뚫려 있는 중심부….

그 안에 얼마나 많은 괴수가 우글거리고 있었는지 힐드온의 손마저 벌벌 떨렸다고 나왔다.

나는 보충해 둔 오파츠를 의식하며 성검을 꽉 쥐었다.

“전원 재정렬.”

슐로이츠의 낮은 목소리에 여기저기서 검을 고쳐 쥐는 소리가 들렸다.

군부에 입단한 지 반년 남짓한 나 역시 괴수가 접근할 때의 꺼림칙한 느낌이 뚜렷이 구별됐다.

그러니 반평생을 괴수 토벌을 하며 살아온 기사들은 닿아 오는 공기가 다르게 느껴지겠지.

불길하고 축축한 공기.

그림자를 손으로 잡아낼 수 있다면 지금 모두의 손은 새까맣게 물들어 있을 것이다.

문 대신 두껍게 쳐져 있는 천이 디오스의 검에 의해 반으로 갈라져 바닥에 떨어졌다.

가려져 있던 입구로 들어선 순간.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말문을 잃었다.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거대하고 압도적인 공간. 밤의 장막이 드리워진 것처럼 그저 높기만 한 천장 아래, 수만 자루의 성검이 끝도 없이 꽂혀 있었기 때문이다.

“성검을 든 괴수….”

누군가의 중얼거림이 퍼뜩 뺨을 때려 왔다. 마치 성검을 들고 죽어 있는 괴수가 떠오르는 괴기한 장면이었다.

다만, 그 어디에도 괴수는 없었다.

죽어 있는 괴수도. 살아 있는 괴수도.

군부의 1월대가 발견한 것도, 내가 활자로 읽었던 것도.

그 어떤 것도 존재치 않으며 그저 빼곡하기만 한 성검들….

섬뜩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멍하니 굳어 있는 시야각 안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는 슐로이츠의 뒷모습이 들어온다.

한 박자 늦게 걸음을 옮겼다. 디오스를 위시한 다른 기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진짜 성검이군.”

슐로이츠가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세 자루만 챙겨라.”

“존명.”

거의 동시에 슐로이츠의 검이 디오스의 뺨 옆으로 날아갔다. 나와 기사들이 굳는 것과 거의 동시에, 챙강!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가 귓가를 쨍하니 울렸다.

얼어붙은 그대로 눈만 굴린 나는 바닥에 떨어지는 작은 단검을 보았다.

‘지금… 누가 디오스를 향해 단검을 날린 건가?’

슐로이츠가 그걸 쳐 낸 거고?

“기습입니다!”

“전원 대응해라!”

후두둑 잘린 디오스의 머리카락 몇 가닥이 흘러내렸다.

성검의 무덤들을 사이에 두고 쉰 명은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서 있었다. 두껍게 입고 있는 로브 탓에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누구냐! 우리는 라자크 왕실 산하 군부 소속의 기사들이다!”

“공격과 반항을 멈춰라!”

기사들의 투항 요구에도 미지의 인물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일촉즉발의 순간이었다.

캉!

슐로이츠의 검날이 날카로운 소리를 냈다. 싸늘한 눈빛으로 반대편의 인물들을 노려보고 있던 슐로이츠가 입을 열었다.

“마법을 쓰는군.”

“…예?”

순간 모두가 귀를 의심했다. 반사적으로 슐로이츠가 무언가를 ‘쳐 낸’ 부분을 보았으나 놀랍게도 그곳엔 아무것도 없었다.

단검도, 화살촉도. 하다못해 다른 어떤 종류의 무기도.

“…흑마법사입니까?”

살상용 마법은 그 어떤 것도 허락되지 않았다. 애초에, 살상을 위한 마법이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사람을 먹은 놈들이군요.”

“역겨운 새끼들….”

흑마법은 결코 양지로 나와서는 안 됐다. 모든 왕국에서 지탄받는 것도, 흑마법의 매개가 바로 사람의 생명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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