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고개를 끄덕인 후 슐로이츠의 뒤를 따라갔다.
그가 나를 옆에 두고 대기한 건 훌륭한 선택이었다.
“각하!”
“긴급 보고입니다!”
약간의 시간도 흐르지 않았는데 곧장 수색조로부터 기이한 보고들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슐로이츠가 턱을 기울였다.
“괴수들이 나타났다고?”
문제는 이다음에 있었다.
“금사 기둥에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는데 괴수들이 수도 없이 나타났습니다!”
“전례 없는 일입니다!”
금사 기둥은 창조 이래 언제나 흔들리지 않는 지표였다. 군부의 기사들에게는 해가 떠 있는데 폭풍우가 몰아친다는 것만큼이나 믿을 수 없는 일일 터다.
‘꼭 신관들한테 미친 미인의 최후가 궁금하지 않느냐고 들었을 때의 내 기분 같겠어.’
“각하. 왕실에 당장 보고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나는 아무런 동요 없이 듣고만 있었다.
‘이건 작중이랑 똑같아.’
금사 기둥에 표시되지 않는 괴수들.
<미친 미인의 최후>에서도 이 문제의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군부에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말도 못 할 정도였다.
“사상자는?”
“현재까지는 없습니다. 각하.”
“잘됐군. 최소한의 가닥은 잡고 귀환해야겠으니.”
슐로이츠가 턱을 기울이며 지도를 훑어보았다.
오늘 수색조는 지휘관들을 비롯한 군부에서도 특히나 수준 높은 이들로만 구성되어 있었다.
이만한 전력을 끌고 이곳까지 왔으니 반드시 미지의 문제를 해결하고 가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나로선 이게 낫긴 한데.’
“이쪽을 내가 훑지.”
“존명!”
슐로이츠는 우직한 면이 있어서, 가장 암흑 지대인 쪽으로부터 직접 나서서 수색을 할 모양이었다.
수색의 범위가 닿지 않는 곳. 확인해야 할 곳도 많은 곳. 유독 빛이 들지 않아 수많은 괴수들이 출몰할 것만 같은 위험 지대.
가끔은 슐로이츠가 부패한 수많은 권력자들처럼 안전한 곳에서 지켜나 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세상이 멸망한다고 해도 일어날 리가 없는 일이지만.
“블란데아.”
슐로이츠는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다가 입을 열었다.
“지금 갑자기 날 껴안고 싶은 게 아니라면 이것 좀 놓지 그래.”
“네? 아.”
나는 그제야 나도 모르게 슐로이츠의 팔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그렇게 위험해 보이나?”
“지금 가시려는 북쪽 방위는 너무 어둡잖아요. 수색 범위도 아닌데 꼭 그쪽으로 가셔야 하나요?”
“글쎄. 아까까지만 해도 굳이 가지 않을 생각이었는데.”
슐로이츠가 허공을 둘러보며 말했다.
“묘하게 수상한 냄새가 나.”
“…….”
“근방을 직접 확인을 해 봐야겠어.”
‘…그래도 저쪽은 좀.’
내가 기억하는 대로라면 저쪽 방위는 정말로 몹시 위험했다. 굳이 건드리지 않는 게 나을 정도로 괴수들이 많았다.
무엇보다 실만 크고 수확이 없을 텐데.
뭐라고 회유해야 좋을까? 고민하던 그때였다.
“어때, 블란데아.”
슐로이츠가 떨어져 나가던 내 손을 깍지까지 껴 붙잡았다. 이젠 기사들이 보든 말든 별로 신경도 안 쓰는 것 같은 그가 뜻밖의 질문을 했다.
“내가 이쪽으로 걸어가도 되겠나?”
“제가 말하는 대로 들으실 건가요?”
“경이 원한다면 그래야지.”
“으음….”
“내키지 않으면 경이 알고 있는 쪽으로 길을 안내해.”
뜻밖의 말이었다. 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입을 열었다.
“제가 알고 있는 게 틀린 길이면 어떡하죠?”
“그건 총사령관으로서 내가 감수할 일이고.”
슐로이츠가 나와 시선을 맞추며 말했다.
“나는 네가 아는 길을 알려 달라고 했지, 맞는 길을 알려 달라고 한 적이 없잖아.”
말은 왜 저렇게 잘하는 거지?
나는 그가 어쩌면 무력만으로 최연소 총사령관의 자리에 오른 건 아닐 것이라는 합리적 의심마저 들기 시작했다.
슐로이츠는 나를 따라오면서, 어디로 가느냐 한 번도 묻지도 않았다. 다만 지나가는 짐승을 죄 얽을 듯 덫처럼 빼곡한 나무줄기들을 무자비하게 발로 꺾어 버리며 말했다.
“돌아가면 어떻게 이런 걸 알고 있는지 다 말해 줘야 할 거야.”
“…….”
“왜. 그것도 아직은 싫어?”
슐로이츠가 빈정거렸다.
“싫어도 어쩔 수 없어. 난 충분히 기다렸거든.”
“…….”
사실 그래, 어느 정도 각오는 하고 있었던 말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슐로이츠가 그렇게 내게 강압적으로 캐묻기를 바라고 있었다.
슐로이츠는 내게 있어 유일에 가까운, 일종의 징표였다.
블란데아의 인생 절반 이상을 바쳐 비극적 운명을 바꿔 내어 그 자체로도 너무나 소중한 사람.
혼자서 오래된 비밀을 곱씹는 건 힘들지 않았다. 다만, 내가 알던 진실이 진실이 아니라는 사실을 맞닥뜨리는 건 내게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슐로이츠라면 내 이 흔들리는 정신도 붙잡아 주지 않을까.
그러니 나는 알고 있는 진실들을 슐로이츠의 앞에 조금씩 흘려 냈다.
내가 태어나는 순간부터 품어 온 이 비밀들이 결코 정신 이상자의 헛소리가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증언하는 것에 가까웠다.
술래에게 붙잡히기를 바라고 몸을 숨긴 아이나 다름이 없다고.
***
‘블란데아 경의 표정이 영 어두우시네.’
무슨 일 있으신가?
라파엘은 어리둥절해하며 블란데아 쪽으로 걸어갔다.
“블란데아 사령관님!”
일부러 밝게 웃으며 목소리를 낸 그때였다. 순간 라파엘의 미간이 움찔거렸다.
딛고 서 있는 땅이 이상했다.
“오지 마십…!”
***
라파엘의 다급한 목소리가 뚝 끊겼다. 거의 동시였다.
“……!”
거짓말처럼 지반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쇠처럼 단단한 손과 팔이 나를 홱 끌어안는 게 느껴졌다. 혀를 깨물지 말라는 짓씹은 속삭임이 귓가를 파고든다. 나는 입술을 세게 물었다.
“…하.”
다행히 추락은 길지 않았다. 나는 헐떡이며 눈을 떴다. 팔다리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은 들었지만 다행히 어디가 부러지진 않은 것 같았다.
“…슐츠?”
그 충격은 모조리 슐로이츠가 흡수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괜찮아?”
목소리가 벌벌 떨렸다. 나를 단단히 껴안고 추락한 슐로이츠를 서둘러 살펴보았다.
절벽으로 미끄러지며 온통 긁혔을 게 분명한데….
“괜찮으니까 그만 좀 벗기지 그래.”
괜찮다는 몇백 마디의 말보다 오히려 나를 안심시키는 대답이었다.
“상처를 확인해 보려고 그런 거야.”
“너는 긴장하면 그렇게 멋대로 구는 버릇이 있어.”
“단추 몇 개 끄른 것 가지고….”
나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서서히 정신이 들었다. 슐로이츠의 단추를 하나씩 채워 주는데 그의 손이 문득 나를 붙잡았다.
“왜? 아파?”
나를 묘한 표정으로 응시하던 슐로이츠가 시선을 피했다.
“…아니. 됐어. 내가 채울 테니까 그만해.”
“……?”
슐로이츠는 나를 밀어낸 걸로도 모자라 한 걸음 물러서기까지 했다. 내가 입을 막 열려고 하던 그때.
“블란데아 사령관니이이임! 각하아아아! 괜찮으십니까아아아!”
위에서부터 라파엘의 시끄러운 목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렸다.
“괜찮아!”
추락하는 와중에도 다른 기사들은 절벽에 솟은 나뭇가지 따위를 붙잡아 추락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간부진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구나.’
슐로이츠만이 나를 감싸느라 아무것도 잡지 못한 모양이고.
“곧 내려가겠습니다아아아아!”
군부에서는 지도를 그리는 참모들이 따로 있을 정도로 새로운 지형과 지리에 민감했다.
총사령관이 제1 사령관과 추락하는 이런 사고 속에서도 참모들은 부지런히 연필을 놀리고 있겠지.
아마 빙 둘러서 돌아온다는 소리 같았다.
손목 발목 어디에도 확실히 삔 부분이 없는 걸 확인한 나는 걸음을 옮겼다.
최소 삼십 분은 걸릴 것 같으니, 제1 사령관답지 않게 당황하지 않고 주변을 둘러보는 시늉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저 위에선 기사 몇몇이 눈에 불을 켜고 나와 슐로이츠를 보고 있으니….
‘절벽 밑으로 추락했는데 또 절벽이 앞에 있네.’
평야만이 한없이 뻗어 있는 유적에서는 오히려 이런 능선들이 희귀했다.
‘게다가 이런 곳에까지 금사 기둥들이 있고.’
도대체 누가 이런 곳에까지 수많은 기둥들을 박아 놓은 걸까?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던 나는 순간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왜 여기까지 걸어왔지?’
슐로이츠와 거리가 멀어진 건 아니었다. 그랬으면 진작 그가 내 손을 붙잡았을 테니까.
다만 내 행동의 흐름이 부자연스러웠다. 침을 삼키거나 숨을 쉬는 건 의식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는 행동인 것처럼, 나는 아무런 고민도 없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뭔가에 홀린 것 같다는 생각에 곧바로 고개를 들어 올린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
나뭇잎과 가지로 우거진 절벽에 거대한 철문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걸 내가 지금 발견한 거야? 왜?’
머리를 얻어맞은 듯 얼떨떨할 수밖에 없었다.
이 유적의 문, 후일 ‘폐허의 문’이라고 불리는 이 문은 현시점에선 이 대륙의 그 누구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미친 미인의 최후>에서는 루리가 힐드온과 함께 발견하는 것이기도 했고.
나는 흘긋 뒤를 돌아보았다. 나와 함께 이것을 발견한 이는 슐로이츠 프로키온. 루리도 힐드온도 아니었다.
‘이것까지 오늘 발견할 생각은 없었는데?’
그냥 이쪽으로 수색 방향의 가닥을 잡아 주기만 하려고 했는데?
“블란데아.”
그사이 의복을 바로 한 슐로이츠가 걸어오면서 목소리를 낮췄다.
“이게 뭐지?”
그가 평소와는 달리 목 끝까지 단추를 빡빡하게 채웠다는 사실이 머리를 잠시 스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