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하.”
회의실 상석에 앉아 참모들의 보고를 듣던 슐로이츠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앉아서 얘기해.”
“감사합니다.”
기나긴 유적 수색을 마치고 군부로 귀환한 디오스는 여독을 풀 새도 없이 곧장 회의실로 향해야 했다.
짙은 노곤함이 얼굴에 어려 있었으나 눈빛은 서늘하게 곤두서 있었다.
“성검들을 껴안은 채 죽은 괴수를 발견했습니다.”
순간 회의실에 깊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잠시만. 그게 말이 됩니까?”
라파엘이 반문했다. 시비를 거는 게 아니라 정말로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댄 슐로이츠가 짧게 명령했다.
“가져와.”
“존명.”
즉시 네 명의 기사들이 들것에 천을 씌운 무언가를 가져왔다.
슐로이츠의 뒤에 서 있던 아그네스가 곧장 씌워져 있던 천을 걷었다.
허브 가루를 뿌려 둔 두꺼운 천이 걷어지자 좋지 않은 냄새가 났으나, 그보다 내용물이 더욱 끔찍했다.
누가 봐도 죽은 것이 분명한 괴수가 몇 자루의 성검을 껴안고 완전히 굳어 있었기 때문이다.
“…….”
보통의 귀족들이라면 침음성을 내거나 주춤 뒷걸음질을 했겠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전부 간부급 이상의 요직들이었다.
기사들은 눈도 하나 깜빡이지 않았다. 붉게 핏발이 선 눈으로 이 말도 안 되는 광경을 뜯어보고 있었다.
슐로이츠는 냉담하고 건조한 표정으로 장갑을 낀 손을 뻗어 괴수의 품에 단단히 안겨 있던 성검을 잡아 빼냈다. 이미 굳어 경직된 괴수의 육체는 쉬이 움직이지 않았으나 우악스러울 정도로 압도적인 악력에 결국 강제로 꺾였다.
망설임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그의 행위에 블란데아는 새삼 감탄하고 말았다.
전염병에 걸려 사망했다는 적군의 시체를 획득해, 망설이지도 않고 입을 찢듯이 벌려 점막의 증상부터 확인하는 대범한 냉정함….
사무적으로 보일 정도로 차가운 슐로이츠의 눈동자는 성검을 확인한 후 바로 곁에 대기 중이던 아그네스에게 넘겼다.
“성검이 맞군.”
“각하. 방금 전 성검 창고에 있는 성검을 전부 확인했습니다만 밀반출된 것도 없습니다.”
“아, 그 말은 그러니까.”
괴수를 만졌던 장갑을 벗어 쓰레기통으로 던지며 슐로이츠는 말을 이었다.
“군부에도 왕실에도 등록이 되어 있지 않은 성검 여러 자루를 껴안은 괴수의 시체가 유적 한가운데서 발견됐다고.”
슐로이츠가 피식 웃었다.
“아주 빌어 처먹을 일이잖아.”
“…1월대는 바로 수색을 재개하겠습니다.”
사실상 이 미지의 괴수를 발견한 디오스가 신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슐로이츠는 흘긋 디오스를 보았다.
쉴론 항로에서의 일로 디오스는 유적 수색이라는 징계를 받았다.
수색은 평소에도 1월대의 임무 중 하나였으나, 그 범위가 훨씬 깊고 넓어졌으니 디오스에게도 제법 버거운 일이었다.
그 처벌에 사심이 섞였는지 아닌지는 상관없었다. 어쨌든, 공문에 기록된 징계 사유는 전부 적법한 것이었으니.
덕분에 이딴 걸 발견했으니 공로라면 공로라고 할까.
“수색조 규모를 바꾼다.”
슐로이츠는 유적이 그려진 지도를 눈으로 훑으며 말했다.
“내가 직접 가지.”
“존명!”
***
“왜 저는 폐허의 유적이 아니라 루리 로시에 영애의 곁에 처박아 두시겠다는 겁니까?”
힐드온 케트펠이 불퉁한 목소리로 말했다. 빠르게 짐을 점검하고 있던 나는 기가 차서 힐드온에게로 시선을 옮겼으며, 그보다 먼저.
“……!”
페니가 힐드온 케트펠의 정강이를 걷어차는 게 빨랐다.
“건방진. 놈. 감히 사령관님에게. 그따위로 말을 해.”
“…….”
나는 페니에게 짐 점검을 마저 맡기고 입을 열었다.
“힐드온 케트펠 생도.”
“…예. 사령관님.”
“유적 수색은 하루가 꼬박 걸릴 예정이고, 생도가 좋은 건물에서 자게 된 건 생도의 상관이 협상의 천재인 덕분이야.”
“…….”
“한 번만 더 불평하면 마구간에서 재울 줄 알아.”
“…….”
결국 작게 시정하겠다는 말이 들려왔다.
나는 시선을 옮겼다.
잠들어 있는 루리 앞에는 다름 아닌 티타니아 로시에가 앉아 있었다.
불가피하게 하루 가까이 루리를 돌보지 못하게 되었으니, 르페브르의 상징 중 하나라는 오파츠를 주렁주렁 몸에 매단 티타니아 로시에라도 대신 붙여 놓은 것이다.
이건 나름대로 내 요구를 이행하느라 어마어마한 돈과 정성을 쏟은 로시에 가주를 위한 성의 표시였다.
나를 등지고 있어서 티타니아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러다가 루리를 독살하는 건 아니겠지?’
솔직히 말하면 불안했다. 그래서 일부러 힐드온 케트펠도 함께 루리 로시에를 지키게 했다.
힐드온은 왜 일면식도 없는 로시에 가문의 친딸 따위를 지켜야 하냐고 툴툴댔지만 내 알 바 아니었다.
‘날 보면 피하거나 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단 괜찮네.’
쉴론 항로에서의 일을 부끄러워할 거라는 예상과 달리, 의외로 힐드온 케트펠은 주눅 들어 보이지 않았다.
‘작중에선 루리한테 약점을 보였다고 아주 괴로워했는데. 계속 피해서 화가 난 루리가 붙잡는 장면도 나왔잖아.
나는 아직도 몸에 적지 않은 붕대를 감은 티타니아와 힐드온을 두고 걸어 나왔다.
“저 자식. 귀를 잡아 뜯을까요?”
“응?”
갑작스러운 페니의 말에 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말하는 게 건방져서 그런가?
“힐드온 케트펠 생도?”
“예. 사령관님.”
“갑자기 왜?”
“귀가 막. 빨개지잖습니까.”
“……?”
***
“23시간 안에 귀환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라파엘이 주먹을 입가에 대고 신중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대장정이네.’
한동안 들어올 일이 거의 없었던 유적은 여전히 울창하고 푸르렀다.
디오스의 1월대가 그 기이한 괴수 사체를 발견한 곳까지 가려면 아주 깊숙이 들어가야 했다.
나는 이번에도 슐로이츠의 등을 보고 조금 웃었다. 나뿐만 아니라 군부의 기사들이 다 그런 걸 보니 재밌었기 때문이었다.
‘다음엔 물어볼까?’
언제나 가장 앞에 있는 그는 뭘 보면서 안정감을 찾느냐고?
유적은 끝도 없이 넓었다. 무엇보다 금사 기둥을 계속 확인하며 움직여야 했다. 간혹 괴수가 나타나긴 했으나 그 정도는 어렵지 않게 처리되었다.
‘다들 기를 쓰고 서둘러 죽이는 기분이기도 하고.’
일전에 디오스가 괴수와 함께 있다가 오염되어 가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을 또 발견할지 모른다.
미지의 장소에 다다르기 전, 최대한 체력을 비축하기 위해 가급적 전투를 하지 않는 방향으로, 하지만 기동성이 있게 움직여야 하다 보니 말에서 내릴 시간도 거의 없었다.
엉덩이와 허벅지가 다 아파 왔다. 나는 고삐를 잡고 숨을 얕게 헐떡였다. 청색 가호 판별자들을 데리고 오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말의 지치지 않는 체력이 부러웠다가, 나랑은 같은 종인 슐로이츠는 왜 지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시야가 점점 황금빛으로 물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빛 사이로 걸어 들어가는 듯 환해지는 기분.
바닥으로 반쯤 처박고 있던 고개를 들어 올리는 것과 거의 동시에.
“여기부터 나뭇잎의 색이 바뀌기 시작한다지 뭡니까.”
때마침 다가온 라파엘이 속닥이는 목소리로 알려 주었다.
“그 성검을 든 괴수는 나뭇잎의 색이 황금색으로 바뀌기 시작한 이 구역에서 발견했다고 하고요.”
“…어?”
“꼭 가을날 은행나무 같지 않습니까? 유적의 나무가 변치도, 썩지도, 열매를 맺지도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데 말이지요.”
“…….”
“당연히 계절에 따라 변하지도 않는 곳이 유적인데 신기합니다. 어쩌면 아직 가 보지 못한 구역에도 다른 색깔의 나뭇잎들이 달려 있는 게 아닐까요? 빨간색이나, 푸른색이나….”
“라파엘.”
“예?”
입을 자그맣게 벌린 나는 천천히 물었다.
“…왜 난 이걸 몰랐지?”
“아. 블란데아 사령관님이 루리 로시에 영애를 치유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웠을 때 들어온 보고라서요.”
“…….”
“그때 디오스 녀석이 보고한 것입니다. 이쪽 부근에서부터 갑자기 나무들의 색깔이 황금빛으로 변한다고 했는데….”
말을 잇던 라파엘이 미간을 약하게 찌푸렸다. 그가 내게 상체를 약간 기울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
“블란데아 사령관님? 혹시 어디 불편하십니까?”
“아니야. 괜찮아.”
나는 고삐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라파엘의 말이 맞다.
기껏해야 나뭇잎 색이 변한 정도. 원래 대다수의 나무는 계절에 따라 색깔이 변한다. 고작 그뿐인 사실이니 모든 간부가 알아야 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나는 알았어야 했는데.’
햇볕을 받아 금빛 물결처럼도 보이는 키 큰 수많은 나무들을 올려다봤다.
난 이곳을 알고 있다.
<미친 미인의 최후>에서 왕국이 멸망으로 성큼성큼 들어서게 된 원인이 바로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걸 처음 발견한 것도 루리지.’
내가 읽었던 흐름대로 따지자면 일 년은 더 있어야 군부가 이쪽에 접근을 하는데….
루리는 일찍 나타나고, 또 신관들은 개소리나 지껄이고 자빠져 잠이나 자는 마당에, 이런저런 시간들이 훅 당겨졌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애초에 디오스로 인한 나비 효과….
‘…아닌데. 나 때문인가?’
“표식을 발견했습니다!”
앞쪽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오고 쉬지 않고 움직이던 행렬이 드디어 멈췄다.
말에서 내린 나는 곧장 앞쪽으로 걸어갔다.
하필 이 근처에서 성검들을 끌어안고 죽은 괴수의 사체가 발견되었다고 하니 기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불편해졌다.
“바로 여기서 발견되었습니다.”
붉은 표식을 확인한 슐로이츠가 수색 명령을 내렸고, 참모들을 제외한 기사들이 곧장 맡은 구역을 나눠 움직이기 시작했다.
“블란데아 경.”
슐로이츠의 목소리가 들려와 시선을 움직였다.
“경은 나를 따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