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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군부령의 방식-(42) (153/190)

내가 조금만 더 순진한 성격이었다면, 화들짝 놀라 저절로 시선을 피했을 만한 모습이었다.

‘아니, 이 침실 내 거라고 그래 놓고…?’

왜 저렇게 본인 침실처럼 당당히 들어와?

다소 졸렬하지만 반사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물론, 차마 입 밖으로 낼 수는 없는.

그저 무릎에 펼쳐 둔 책으로 시선을 내렸을 뿐이다.

차분한 신색과는 달리, 햇볕 냄새가 나는 이불 아래 묻어 둔 발가락은 괜히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방도 많던데 여기서 같이 자려고 그러나?’

“…….”

저런 모습으로?

“…….”

혹시 이러려고 데려왔나?

수건으로 무심하게 머리를 닦아 내는 슐로이츠는 기이한 상상력을 증폭시킬 만큼 관능적으로 느껴졌다.

유독 허리 부근이 느슨하게 묶인 가운이 머리에 장막처럼 드리워져 자꾸만 눈에 밟혔다.

슐로이츠는 프로키온 성에서도 나를 껴안고 자곤 했다. 내가 어디로 도망칠까 봐 생긴 버릇 같았다. 급하게 생긴 버릇치고는 어찌나 성실히도 수행하는지 군부에서는 잘도 내 침실을 찾아오지 않는다 싶을 정도였고.

나를 껴안고 자다가 저 설렁설렁한 가운이 벌어지면 좀 상황이 민망해지지 않을까?

머리로는 온갖 복잡한 생각을 하면서도, 손은 착실히 책장을 넘기고 있었다. 당연히 글자는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는 상태였다.

저런 상태면 본인이 더 괴롭지 않나?

슐로이츠는 매시 갈증이 나 미치겠다는 눈으로 나를 천천히 훑어보곤 했다. 선을 넘는 접촉은 하지 않으면서 눈빛은 또 왜 그렇게 묘하게 이글거리는지 모를 노릇이었다.

프로키온 성에서 머물렀던 한 달이 봄날의 백일몽처럼 느껴질 때가 종종 있다.

그땐 어떻게 잘도 한 침대에서 자고 매번 슐로이츠에게 키스를 받고….

‘사실 따라가기 벅차기 했지만.’

당시에는 몸이 좋지 않기도 해, 슐로이츠의 난폭한 입맞춤을 감당하는 게 쉽지가 않았다.

“……?”

매트리스를 타고 묵직한 무게감이 전해진 건 그때였다.

거의 동시에 턱이 붙잡혀 들려졌다. 순식간이었다. 습기 가득한 혀가 입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

붙잡혀 벌어지는 두 손목이며 열기가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바짝 달라붙는 딱딱한 몸.

나는 천천히, 그러나 가파르게 헐떡이기 시작했다. 침대 헤드에 편하게 기대고 있던 몸이 묵직하게 내리눌렸다.

“흐으….”

팔다리가 똬리를 튼 뱀처럼 슐로이츠에게 얽혔다.

뱀은 슐로이츠라는 생각으로 기어간다. 그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사지를 빈틈없이 옥죄여 옴짝달싹도 못 하게 나를 구속하고 마니까.

슐로이츠의 두 손이 내 양 팔목을 세게 잡았다.

고개를 들어 올린 그는 내 어깨에 이마를 묻고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운 숨이 맨살에 닿자 어쩐지 아랫배가 저릿거렸다.

“블란데아.”

이윽고 상체를 들어 올린 그는 내 품 안에서 책을 끄집어 들어올렸다. 순간 급류에 휩쓸린 듯 정신이 없었는데 용케도 책은 구겨지지 않고 무사했다.

“읽지도 않는 책을 꼭 껴안고 있으면 뭐가 달라지나?”

“…….”

정확히 내 의도를 알아 챈 질문이었다.

뺨이 천천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슐로이츠에게서 책을 가져가기 위해 손을 뻗었다.

순순히 책을 내어 준 슐로이츠가 턱을 가볍게 기울였다.

“왜, 계속 갖고 있지 그러나.”

“…….”

“네가 다 읽을 때까지 기다려 줄 수도 있어.”

유치한 방법이 고스란히 파악 당했다는 기분은 상상 이상으로 부끄러웠다.

굳이 거울에 비추어보지 않아도 얼굴이 달아올랐다는 사실은 충분히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슐로이츠가 나를 보더니 눈길이 서서히 굳었다. 멈췄다는 말이 맞았다. 입가에 감돌던 빈정거리는 미소 역시 천천히 사그라졌다.

그는 미혹된 소년 기사처럼 정신없이 나를 보았다. 열기마저 느껴지는 열정적인 시선에 속눈썹이 바르르 떨리자, 슐로이츠가 꼭 끌어안고 목덜미에 입을 맞췄다. 맞닿은 품에서 거세게 고동치는 슐로이츠의 맥박이 느껴졌다.

멀찍이 떨어져 있는 몸도 어쩐지 귓가를 달아오르게 만들어서, 나는 잠시 호흡을 가다듬었다.

“슐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 무렵.

“결혼을… 그렇게 멋대로 빨리 잡으면 어떡해?”

“빠르나? 나는 느려터진 것 같은데.”

“나한테 허락도 받지 않았잖아.”

“허락?”

사실 귀족 간의 결혼이란 본인의 허락보단 가문 간의 합의가 더 큰 문제라서, 내 말은 심술궂은 생떼에 가까웠다.

“허락 안 해 줄 건가?”

“안 할 수도 있지.”

“아.”

슐로이츠가 가볍게 웃음을 터뜨렸다. 내 말이 농담처럼 들려 즐거운 모양이다, 하던 생각은 금세 사그라졌다.

“나 말고 네 마음에 들었던 새끼가 있었나?”

물그림자 빛깔의 눈동자에 조금의 웃음기도 없다는 사실을 한 박자 늦게 안 까닭이다.

“어떤 새낀데. 말해 봐, 블란데아.”

“아니….”

***

“가주님은. 아가씨와 왜. 밤을 안 보내시지?”

페니의 뜬금없는 질문에 라파엘이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말이야? 성에선 맨날 침실로 찾아와 주무시던데.”

“그게 다잖아.”

“……?”

“아무것도. 안 하시데.”

프로키온 성에서 블란데아의 시중을 들던 게 페니 자신이어서 모를 수가 없었다.

블란데아의 다리 사이는 언제나 멀쩡하기만 했다. 그녀의 잠옷도 수위 이상으로 흐트러진 적이 없었고. 속옷은 손도 대지 않아 멀쩡했다.

라파엘만이 멍청해 보일 정도로 순진하게 고개를 기울였다. 페니가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오라버니는. 죽을 때까지. 결혼을 못할 것 같다.”

“……!”

그제야 페니가 묻고자 하는 질문의 함의를 알아들은 라파엘이 화들짝 놀랐다. 얼굴이 순식간에 사과처럼 새빨갛게 변했다.

“가, 가, 갑자기 그게 왜 궁금한데…!”

“호기심이. 들잖아. 가주님은 눈만은. 금방이라도 아가씨를 벗겨먹고 싶다는. 색욕으로 드글드글….”

“야…!”

라파엘은 황급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행이라면 다행스럽게, 이곳은 군부가 아닌 프로키온 성이었다.

휴가를 받은 김에 라파엘은 잠시 페니와 프로키온 영지로 왔는데, 레이디 레슬리나가 있을 때와는 달리 성은 전체적으로 몹시 조용했다.

‘출입 허락을 내려 줄 사람이 없으니 당연한 수순이지만.’

생존 본능 때문에 듣는 귀가 없는 걸 두 번 세 번 확인한 라파엘은 가슴을 쓸어 넘겼다.

페니는 쯧쯧 혀를 찼다.

“오라버니는. 가주 부부의. 사생활이 사용인들에게. 얼마나 즐거운 가십거리인 줄도 모르는구나.”

“…그래, 페니.”

“응.”

“내 여동생이 이렇게 잘난 인재라 오라버니는 행복해….”

라파엘이 얼굴을 쓸어 넘겼다. 페니는 그러든지 말든지 알아서 답을 구한 모양이었다.

“알겠다. 역시 아가씨가 못 걷게 될까 봐. 인내하고 있는 게 틀림….”

“페니! 제발 그만 말해!”

라파엘이 아아아 비명을 질렀다.

***

새벽, 이른 시간.

나는 창틀에 몸을 기대고 나른한 눈을 깜빡였다.

이렇게 지대가 높은 곳에선 처음 자 보는 것이라, 새벽같이 떠오를 여명이 궁금해 일부러 일찍 일어났다.

연분홍색과 보랏빛으로 물들기 시작하는 아름다운 하늘을 보자 잘 일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슐로이츠와 함께 있으면 내가 마약을 탄 독주가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실수록 목이 타 괴로울 텐데도 손을 놓지 못했다.

‘…힘든 건 본인이니까. 알아서 하겠지.’

나는 그의 눈에 가득했던 열기를 일부러 흘려보내며 창가에 축 늘어졌다.

사람은 따뜻한 봄에 혹한을 떠올리고 절벽 위에 핀 한 송이의 꽃을 보고 삶과 죽음을 반추하는 법이다.

이 한적한 평화를 향유하고 있자 자연히 내가 철썩 같이 믿고 있었던, 이 세계의 정해진 운명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커튼을 치고 다시 슐로이츠의 곁에 엎드려 누웠다. 턱을 괴고, 잠들어 있는 그의 얼굴을 하나씩 눈으로 훑었다.

내가 아는 가장 강한 남자.

그래서 꼭 구해야겠다고 맹세했던 슐로이츠 프로키온.

잠들어 있는 그의 모습은 그렇게 차가워 보이진 않았다.

하긴 무슨 상관일까. 슐로이츠가 아무리 냉담한 눈을 하고, 얼음장 같은 태도를 고수해도 그를 짝사랑하는 레이디들의 숫자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는데.

나는 슬며시 웃으며 슐로이츠의 뺨에 가볍게 입을 맞췄다.

‘그 신관은 설마 아직도 자고 있진 않겠지?’

***

“파놉테스 신관이 일주일 안에 안 깨어나면 아가씨가 그냥 손목을 잘라 버리라고 했습니다만.”

비너스의 말에 엔리코르가 혀를 내둘렀다.

“걘 누구 동생인지 정말 과격해. 르페브르의 보호 하에 있는 신관을 르페브르의 직계가 고문을 하겠다니….”

왕국의 역사서를 새로 쓸 얘기였다. 엔리코르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신관을 확인한 후 연구를 하는 별채로 왔다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헥토르 녀석은 어디로 갔대?”

***

“아가씨, 오셨습니까?”

“좋은 아침이야. 아실. 루리 로시에 영애는 어때?”

“영애께서는 아주 좋으십니다. 나날이 회복이 되고 있어요.”

아실은 살짝 불안해하는 기색으로 말했다.

“그런데 아가씨.”

“응?”

“르페브르의 주치의에 불과한 제가 감히 총사령관의 별저에 묵어도 되는 겁니까?”

“…몰라. 슐로이츠 경이 데려온 거잖아.”

나는 반쯤 납치되느라 뒤늦게 안 사실인데, 슐로이츠는 이 관저에 루리도 데려왔다.

‘하기야 아니었으면 내가 로시에 공과의 약속을 지켜야 하니 군부로 돌아가겠다고 했겠지.’

와중에 본래 루리를 돌보던 로시에 가문의 의사가 아닌, 굳이 르페브르 가문의 의사를 초청해 데려온 것도….

너무 의도가 뻔했다.

“총사령관님이 아가씨한테 아주 푹 빠져 계신 모양입니다.”

아실이 실실 웃으며 말했다. 나는 헛기침을 하며 루리 쪽으로 걸어갔다.

“간밤에 루리 로시에 영애가 잠꼬대지만 한두 마디를 하셨습니다.”

“정말로?”

“예. 아가씨.”

로시에 가주가 들으면 기뻐할 소식이었다. 시체 같던 여주인공은 천천히 혈색을 회복하고 있었지만, 뭐라고 할까.

내가 읽었던 원작의 묘사대로처럼 생동감 있고 아름다운 모습은 되찾기 힘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빈사 직전의 환자가 아무리 요양해도 특유의 생기를 완전히 회복할 수는 없는 것처럼.

루리의 손을 막 잡는데, 그녀의 입술이 천천히 달싹였다.

“돌아,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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