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단한 손이 흐트러진 내 옆머리를 귓가로 넘겨 준다.
그의 손끝에서 흐트러지는 금빛 실타래를 보고서야 아버지가 떠올랐다.
디오스와 힐드온에 대한 얘기는 길게 이을 만한 게 아니었으니 나는 화제를 돌릴 겸 물었다.
“아버지는 어디 계셔?”
“르페브르 공이라면.”
슐로이츠는 내 의도를 읽은 게 분명했음에도 순순히 응해 주었다.
“더 이상 보호할 필요가 없어.”
“…뭐?”
순간 귀를 의심한 나는 슐로이츠의 멱살을 붙잡을 듯 앞으로 바짝 다가갔다. 그의 말이 불길하게 들렸다.
“무슨 말이야? 아버지가 죽, 죽….”
“르페브르 공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멀쩡하니 안심하지 그래.”
“하지만 괴수가….”
“괴수가 어디 있지?”
“어?”
오파츠가 쉬지 않고 깨지느라 아비규환인 이곳.
괴수들의 힘이 마치 심해의 압력처럼 사람을 엉망으로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지옥 같은 곳이었다.
“똑바로 둘러봐.”
나는 홀린 듯 슐로이츠가 가리키는 저 너머들로 시선을 돌렸다.
비명을 지르거나 뒹구는 사람들의 머리 위, 묘하게 검은색을 띠는 안개 너머….
그 어디에도 괴수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 거대하고 끔찍한 생명체가 어떤 곳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재개합니다!”
나와 떨어진 곳에서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르페브르 기사단과 1월대가 섞여 있는 곳이었다.
그 틈 사이로 보이는 아버지와 발록 경.
발록 경이 매서운 눈길로 아버지를 철통같이 보호하고 있었으며, 아버지는 땅에 앉아 두 손을 내릴 준비를 하고 계셨다.
길게 몰아쉬는 호흡과 동시에 아버지가 대지 위에 손을 올렸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흘렀다. 누군가가 커다란 부채로 일으키는 듯한 강풍이 불어왔다.
한 움큼의 폐수 위로 대해 같은 거대한 이능이 쏟아진다.
이 정도면 아버지가 쓰러지실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 것도 찰나.
세찬 돌풍이 불어와 나는 똑바로 서 있지 못하고 비틀거렸다. 슐로이츠의 단단한 팔이 내 어깨를 감싸 지탱해 주었다.
그의 팔을 붙잡은 후에야 절로 감았던 두 눈을 떴다.
쏟아지기 시작하는 햇볕. 동시에 선명해지는 시야.
그즈음 1월대를 비롯한 지휘관들의 활약으로 이미 칠 할이 넘는 타 가문의 귀족과 기사들도 오파츠를 떼어 놓은 상태였다.
몹시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정신을 차린 사람들이 그만큼이나 많다는 소리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을 지었다.
“괴수가 없는데…?”
“이게 말이 됩니까?”
“왜지? 왜 한 마리도….”
기록된 바로는 수천 마리의 괴수들에게 점령당해 버려진 항구에 그 어떤 괴수도 보이지 않았다.
“기록에 문제가 있었던 게 아닐까요?”
“맞아요. 오랫동안 폐쇄되어 있던 곳이잖습니까?”
“그러니까 분명히 무슨 변화가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 오파츠는 왜 이렇게 우릴 괴롭힌 거랍니까?”
“어쩌면 괴수들이 산화했을 수도 있고 농축된 힘이….”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하나하나 귀에 박혀 들어온다.
하나 나는 그 어떤 말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는데.’
- 우리는 이대로 등을 돌려 달아날 수 있을까?
성검을 꽉 쥔 루리의 두 손이 가련하게도 떨린다. 악랄한 공포. 두려움이라는 이름의 마귀가 목을 조른다.
무수하게 득시글거리는 괴수들로 인해 대지는 물론 공기마저 시커멓게 오염되어 있다.
이 지옥에서 누구도 감히 벗어날 수 없을 터.
버려진 항로의 진짜 모습은 이토록 날것이었으며 잔인했다.
루리 로시에, 그녀조차 무력감에 몸을 떨 수밖에 없을 정도로.
“…….”
기이한 무력감에 몸이 다 떨렸다.
내가 읽은 것들은 무엇일까?
왜 괴수가 한 마리도 없지?
괴수는 한 마리도 없는 주제에 또 엄청난 마기는 왜 이렇게 가득한 거지?
“떨지 마.”
지대에 박힌 강철 말뚝처럼 몹시도 단단한 손이 내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잡았다.
“네가 뭘 걱정을 하고 있는 건진 도무지 짐작이 안 가지만, 블란데아.”
“…….”
슐로이츠는 나를 내려다보지도 않았다.
다만 특유의 그 건조하고 무심한 표정. 수많은 군부의 기사들이 죽음을 앞두고 훔쳐보고서야 간신히 안심하곤 마는 총사령관의 무표정한 낯을 하고서 말했다.
“네가 꺼지라고 해도 꺼지지 않을 새끼가 옆에 있잖아.”
***
“그 새끼는 대체 왜 안 꺼지고 블란데아 경한테 달려갔을까? 감히? 지가 뭔데?”
“그….”
“미친 걸까? 그치? 미친 거지?”
“저….”
“참고로 같이 있던 그 힐드온 케트펠 생도 새끼는 아주 더 미친 새끼 같아. 그렇지?”
“라파….”
“아닌가? 디오스 그 새끼가 더 미친놈인 걸까?”
“라파엘 경….”
제발 제 말 좀 들어 주시겠어요?
라파엘의 정신 나간 중얼거림을 듣고 있던 아그네스는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뭔 말을 해도 들어 처먹지를 않는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하필 외부인들이 많을 때 뛰어가면 어쩌자는 거야.’
군부 내에서였다면 쉽사리 통제와 수습이 가능했을 텐데.
라파엘과 아그네스는 블란데아의 보호가 최우선이었기 때문에, 오파츠를 떨어뜨리자마자 곧장 움직였다.
덕분에 둘은 똑똑히 보고 말았다.
디오스의 이글거리는 눈빛, 꽉 깨물려 잇자국이 희미하게 드러나는 턱. 블란데아에게 망설임 없이 뻗던 손.
어쩌면 블란데아보다도 더 선명히.
반사적으로 아그네스는 슐로이츠가 있는 쪽을 보았고, 이내 등골이 서늘해졌다.
슐로이츠 프로키온은 처음 전략 회의에서 결정이 난 대로 르페브르 공을 보호하고 있었다.
다만 슐로이츠의 두 눈은 블란데아에게 붙박여 있었고, 여신을 갈망하는 신도처럼 뛰어가는 디오스도 모조리 보았던 것이다.
‘끽해야 숭배 정도인 줄 알았지.’
사실 생도 중에서도 블란데아를 연모하는 공자들이 차고 넘칠 것이다.
그녀는 아름답고 고귀한 외양에 반해 성격은 묘하게 슐로이츠를 닮은 점이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강이 해이해졌다며 냅다 걷어차는 모습에 심장이 두근거리는 놈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힐드온 케트펠은 그런 경우겠지? 여하튼 제정신인 놈들이 없어. 다 미쳤지, 아주.’
연정과 숭배의 아슬아슬한 경계선.
괴수들을 자주 겪게 될수록 후자로 쏠리겠지만. 가호라는 게 얼마나 파괴적인 힘을 지니는지 기사들은 하루하루 뼈저리게 깨닫곤 했다.
“아. 그래서 디오스 경이 맨날 유적에 나간 건가?”
뜻밖의 깨달음을 얻은 아그네스는 어깨를 으쓱했다.
“맞죠? 디오스 경.”
“…….”
침대에 앉아 묵묵히 있던 디오스는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넘겼다. 실은 붕대가 감긴 복부가 너무 아파서 신음을 참는 것도 고역이었다.
“각하께 몇 대 맞으시니 정신이 드십니까? 피멍이 든 뺨은 붕대를 감으실 수도 없고….”
아그네스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냥 그러고 돌아다니십시오. 군부에서 이런 자극적인 치정극이 생겼다고 모오두에게 자랑하는 것도 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
라파엘은 디오스의 침실 안을 빙글빙글 돌면서 말했다.
“어쩌지? 역시 디오스 이젤 그 새끼가 제일 미친 거 맞겠지? 내가 유적에 산 채로 파묻는다고 해도, 그 새끼가 양심이 있으면 감히 반항하지 않고 묵묵히 같이 땅을 파 주겠지?”
“…….”
***
쉴론 항로가 완전히 복구되었다.
이웃 대륙과 이어질 수 있는 유일한 해상로를 되찾았다는 소식에 라자크 왕국을 포함한 이웃 왕국들까지 크게 들썩였다.
“괴수는 나타나지 않았는데 마기로 가득 차 있었다는 점이 오히려 이점으로 작용하긴 했네요.”
미지의 불안에 떨면서도 이득을 잡고 싶은 수천 척의 배들이 항로를 이용하고 싶어 안달이 나 있었다.
“안전을 이유로 해로를 이용하는 선함들은 전부 군부의 보호를 받게 되었으니까요.”
“보호라지만 사실상 통제지.”
슐로이츠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틀간 잠을 자지 못해 움푹 팬 눈으로 라파엘은 서류를 팔랑팔랑 넘겼다.
1. 쉴론 항로를 취항하는 선박의 수수료 비율.
- 승인. 블란데아 르페브르.
2. 쉴론 항로를 취항 중인 선박의 군부 통제 및 수색 허용 범위.
- 승인. 블란데아 르페브르.
3. 쉴론 항로로 환선한 선박의 수수료 계산.
- 승인. 블란데아 르페브르.
(중략)
22. 쉴론 항구의 정박을 우선 거부할 수 있는 물품 목록.
- 승인. 블란데아 르페브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