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식간이었다.
“…경?”
나는 당황스러운 기분으로 눈앞의 남자를 보았다.
왜 네가 여기에 온 거냐고 물을 시간이 없었기에 일단 명령했다.
“대기해.”
대답을 들을 여유도 없어서 일단 몸부터 움직였다.
쟤가 왜 갑자기 나한테 달려왔는지 이해가 안 갔지만, 내겐 당장 확인해야 할 휘하 부하들이 있었다.
‘다들 기절했네. 차라리 다행인가.’
갑작스러운 내상을 입으면 충격을 강하게 받는 쪽도 있었다. 몸부림을 치다 보면 오히려 이차적인 상처가 생길 수도 있어서, 이렇게 얌전히 기절해 있는 게 오파츠들을 제거하기엔 편했다.
‘누가 이렇게 꽁꽁 묶어 놓으래? 가보야?’
르페브르의 직계라 오파츠가 길가에 굴러다니는 돌멩이처럼 보이는 나와는 달리, 다른 이들은 그러지 않았다.
특히 몇 번이나 새롭게 가호를 업그레이드한 청색 가호 판별자들은 오파츠를 지나치게 소중히 대했다.
티타니아를 마지막으로 거의 모든 청색 가호자들을 구한 나는 한숨을 삼켰다가 이마를 찡그렸다.
방금 전, 돌연 잡힌 손목이 쨍하니 아파 왔기 때문이다.
‘마지막’ 청색 가호자를 구하기 위해 품속의 오파츠를 빼내려다가 잡힌 손이었다.
광인처럼 내 두 손목을 아프게 틀어쥐고 있는 생도는 다름 아닌….
“힐드온 케트펠.”
“꺼져.”
‘이 새끼가?’
나는 심호흡을 했다.
지금 힐드온 케트펠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털이 잔뜩 곤두선 야생 짐승 같았다.
힐드온 케트펠은 어릴 적부터 엄청난 폭력에도 노출되어 있었는데, 걸핏하면 맞는 건 부지기수였으며 쳐다보는 게 재수가 없다는 이유로 책상 모서리에 그대로 던져진 적도 있었다.
그게 고작 다섯 살이었던가?
‘미친 미인인 이유가 있어.’
덕분에 힐드온 케트펠은 일정 수준 이상의 신체 폭력이 가해지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경우가 잦았다. 최대한 방어적으로 웅크리는 것이다.
‘어쩌면 일부러 정신을 망가뜨렸을 수도 있지…. 케트펠에서 힐드온을 엄청 학대했으니까.’
지금도 힐드온 케트펠은 나한테 꺼지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 손목을 붙잡고 있는 두 손은 엉망으로 덜덜 떨리고 있었다.
와중에도 또다시 오파츠가 깨지고 있었다. 청색 가호 판별자들이 소지하고 있는 오파츠는 총 세 개.
동시다발적으로 오파츠의 보호막이 이어 터진다면 힐드온은 죽을 게 분명했다.
“힐드온 케트펠.”
“꺼지라고!”
나는 최대한 차분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널 괴롭히려는 게 아니야.”
원작에서 루리 로시에가 힐드온 케트펠을 진정시키기 위해 썼던 방법을 복기하며 느리지 않게 말을 이었다.
“치료해 줄게.”
손목을 잡은 손에 힘이 조금 더 들어갔다.
“다쳤잖아.”
“…….”
이딴 방법이 효과가 있을까 했는데, 정말로 힐드온 케트펠은 천천히 내 손목을 놓기 시작했다.
루리만 효험이 있으면 어떡하나 몹시 걱정했는데 천만다행이었다.
여긴 그러잖아도 외부 시선들이 너무 많았다. 자칫 잘못하다가는 군부 재판이 아니라 귀족 재판에까지 올라갈 만한 하극상이었다.
나는 힐드온 케트펠의 가슴팍 쪽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힐드온 케트펠이 티가 날 정도로 크게 움찔거렸다. 또 발작하면 안 되지. 나는 힐드온을 진정시키기 위해 다시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아까부터 반쯤 정신이 나가 있던 힐드온의 눈이 어쩐지 떨리는 것 같은데, 제발 날 때리지 않아야 할 텐데….
‘이 새끼는 왜 이렇게 꽁꽁 묶어 놨어?’
군부로 귀환하는 즉시 이 자식한테 지급되는 모든 끈의 보급 중지령을 내릴 것이다.
열심히 손을 놀렸고, 마침내 마지막 오파츠까지 풀어내는 데 성공했다.
“됐…!”
반사적으로 환호성을 지르려는데, 문득 턱이 감싸 잡혔다.
나는 눈동자만 굴려 내 턱과 뺨을 감싸고 있는 손을 보았다.
힐드온 케트펠의 두 손이었다. 그가 내 얼굴을 감싸 잡은 것이다.
기류가 이상했다.
나는 다시 눈만 움직여 힐드온 케트펠을 똑바로 응시했다.
아까는 분명 나를 케트펠의 학대자와 동일시하고 있어서 눈이 떨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도 힐드온의 눈은 미묘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와중에도 내게 붙박여 있는 자색 눈동자.
“…….”
나는 그대로 힐드온의 허벅지를 발로 걷어찼다.
평소와 달리 반쯤 정신이 나가 있는 힐드온은 그대로 나동그라졌다.
“힐드온 케트펠 생도.”
나는 힐드온의 앞에 몸을 굽히고 앉아 일부러 소리를 키워 물었다.
“이제 마비가 된 게 좀 풀렸어?”
나와 힐드온 사이에 묘한 기류가 있었다고 소문이 나는 것보단 이 자식이 똑바로 서 있지도 못하는 멍청한 놈이라고 소문이 나는 게 나았다.
‘하필 사람이 많은 곳에서.’
그리고 굳이 사람이 많은 곳에서 내게 달려와 오파츠를 뜯어내 준 뜻밖의 기사는 한 명이 더 있었다.
나는 비교적 멀쩡해 보이는 기사들에게 청색 가호 판별자들을 옮길 것을 지시하고 뛰었다.
“디오스 경!”
“…블란데아 르페브르 사령관님.”
대기하라는 명령대로 디오스는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실핏줄이 터진 눈이며 날카롭게 선이 드러난 턱.
그리고 바닥에 떨어뜨린 내 오파츠. 디오스의 손이 내게서 뜯어 간 그 빛나는 보물엔 이미 금이 가 있었다.
“검 한 자루 더 있어?”
“있습니다.”
“여기 박아.”
디오스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곧장 차고 있던 성검을 자루째로 꺼냈다.
쾅! 디오스가 단단한 흙바닥 위에 성검을 꽂아 넣었다. 오파츠를 지금 주울 수가 없으니 가져갈 수가 없어서 생각해 낸 임시방편이었다.
‘위치를 표시해 두면 분명 나중에 쓸모가 있을 거야.’
“디오스 경.”
“…예. 블란데아 사령관님.”
“1월대는 슐로이츠 경에게 다른 지시를 받았어?”
“각하께는 아무런 지시도 받지 않았습니다. 유사시 할당된 구역이 겹치지 않습니다.”
“그럼 당장 1월대를 소집하고, 아직 오파츠를 버리지 못한 귀족들을….”
최대한 빠르게 구출하라고 명령을 내리자, 디오스가 그대로 부하들에게 명령을 하달했다.
디오스의 뒷모습을 조용히 응시하던 나는, 내게 정중하게 인사를 하는 그의 머리 위로 물었다.
“슐로이츠 경에게 아무 명령도 하달받지 않았다는 경이 왜 내게 왔지?”
“…….”
디오스가 고개를 숙인 그대로 우뚝 멎었다.
사실 말이 되지 않았다.
그의 행동이 지나치게 과했다.
나는 제1 사령관인 동시에 르페브르의 직계였다.
이 항로 탈환 작전에서는 중요도가 슐로이츠만큼 높았기 때문에 아그네스와 라파엘이 유사시엔 내 안전을 책임지게 이미 사전에 전달받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들보다 먼저 달려온 게 디오스였다.
내 품에서 오파츠를 꺼내 버리는 디오스를 보고 라파엘과 아그네스의 얼굴이 당황으로 굳은 것도 나는 분명히 보았다.
그대로 턱짓을 해 돌려보내긴 했지만.
‘지금은 위급 상황이잖아.’
군부 소속 기사들끼리 당황해하는 꼴을 보이는 건 아주 한심한 짓거리이질 않겠는가.
문득 디오스의 뺨이 전보다 핼쑥하게 파였다는 사실이 눈에 들어왔다.
급박한 와중에도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걱정이.”
“…….”
“걱정이… 되었습니다.”
“…왜?”
반사적으로 반문이 튀어나왔다.
디오스의 목소리가 그랬기 때문이다. 단순히 상관의 안위를 생각한 걱정이 아니었다. 적어도, 내 귀에는 그렇게 들렸다.
약하게 물어뜯기 시작하는 부르튼 입술은, 어떤 감정을 씹어 살라 먹는 것처럼 보였다.
디오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던 순간, 그가 몸을 황급히 돌리고 입으로 손을 막았다.
쿨럭.
돌아선 디오스의 어깨가 크게 떨렸다. 다리 사이로 후드득 쏟아져 떨어지는 피. 나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의무관!”
“이놈은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대체 언제 왔는지 라파엘이 바람처럼 나타났다.
그는 평소처럼 웃고 있는 듯했지만, 묘하게 눈가가 굳어 있었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디오스가 굳이 달려와 내 품속에서 오파츠를 뜯어 가는 걸 생생히 지켜본 모양이니.
의외였던 건 라파엘이라면 조금이라도 안절부절못할 줄 알았는데 화가 난 듯 굳어 있다는 점?
그나저나 도대체, 디오스는….
‘나를 좋아했나? 언제부터?’
생각은 뚝 끊겼다.
“군부에 귀환하는 즉시 생도들에게 오파츠를 소지한 채로 부수는 훈련을 추가해야겠어.”
“……?”
“경의 생각은 어떠하지?”
갑작스레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눈을 깜빡였다.
안개들로 혼잡하고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로 정신을 차리기도 어려운 이 끔찍한 공간에서….
슐로이츠가 팔짱을 낀 채 내 곁에 느슨하게 서 있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슐로이츠가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잠시간 아무런 대답도 돌려주지 않았다.
깊은 물가 같은 눈으로 물끄러미 나를 내려다보던 슐로이츠가 낮게 말했다.
“그 새끼들을 내가 어쩔까. 블란데아.”
“…….”
“네게 먼저 물어야지. 하나는 네 부하니까.”
“음….”
다 봤구나.
힐드온 케트펠도, 디오스 이젤도.
하지만….
“남의 감정을 어쩌려고?”
사실 슐로이츠에게 되돌려 줄 마땅한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를 마음에 두지 말라고 명령을 내리려고? 아니, 애초에….”
“…….”
“이런 걸로 징계라도 내리려는 건 아니지?”
묘한 눈으로 날 응시하던 슐로이츠가 입술을 가볍게 움직였다.
“응.”
“…미쳤어?”
나는 기가 막혀 슐로이츠를 올려다보았다가 멈칫했다. 들으면서도 어느 정도는 심술이 섞인 대답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 막연한 예상보다 슐로이츠의 기분이….
아주 더러워 보였다.
‘설마 지금 하는 말 진심인가?’
하지만 월권도 정도가 있는 법이다.
“부당해.”
“부당하다고?”
“징계 사유가 뭔데? 없잖아.”
“없다고? 내 눈엔 못해도 다섯 가지는 보이던데.”
“…….”
“전시 중 자리 이탈. 명령 불이행. 하극상. 기강 해이. 상관 모독…. 아.”
슐로이츠의 눈썹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총사령관 기만도 있군.”
“사심을 좀 빼면….”
“사심을 빼고 말할 순 없지, 블란데아.”
“…….”
“네게 안달이 나 있는 약혼자가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슐로이츠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러자 그가 좀 더 못되게 보였다.
“난 그렇게 관대한 새끼가 되질 못해.”
“…….”
날 응시하던 슐로이츠가 손을 움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