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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군부령의 방식-(38) (149/190)

그런데도 슐로이츠를 밀어낼 생각은 조금도 들지 않는 내 스스로가 웃기고 신기했다.

내 손등에 입술을 붙이면서도, 나를 샅샅이 더듬고 있는 슐로이츠의 눈동자 때문에 더 기분이 묘했는지도 모른다.

왠지 목 아래가 술렁거렸다.

“…슐츠.”

홀린 듯 그 근사한 얼굴을 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오늘 쉴론 항로 탈환 작전이 많이 위험한가요?”

슐로이츠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물끄러미 내 눈을 직시했다. 붉은 불꽃보다 푸른 불꽃의 온도가 훨씬 더 높다고 했던가.

가끔이지만 꾸준히 느끼곤 하는 사실. 슐로이츠의 눈동자는 감히 오래 들여다 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 일견 보기엔 그저 무심하고 냉정해 보이는 눈이지만, 실상 그 안에 품은 열기는 겁이 날 정도로 열렬해서.

슐로이츠가 되물었다.

“위험해 보이나?”

“꼭 사달이 나기 직전에 마지막으로 하는 입….”

입맞춤 같다고 말하려니 이상하게 뺨이 뜨거웠다. 혀끝이 간지럽기도 하고. 하지만 작별이나 고별, 혹은 약속이나 맹세의 입맞춤처럼 보인다고 말할 게 아니라면, 지금 이 상황을 뭐라고 표현해야 적절할까?

“위험했으면 너를 여기 부르지 않았겠지.”

“…….”

“무엇보다 그랬다면, 손등 따위가 아니라 네 입에….”

특유의 무심한 목소리로 말을 잇던 슐로이츠는 점점 빨개지는 내 얼굴을 보더니 헛웃음을 지었다.

“르페브르의 귀한 핏줄을 죽이려 했다는 오명을 쓰겠어.”

“오명 써서 파혼당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놔요.”

“알았어.”

당장이라도 놔줄 것처럼 순순히 대답해 놓고, 그는 굽히고 있던 고개만 들어 올렸을 뿐이다.

여전히 내 손을 쥔 채로 슐로이츠가 걸음을 옮겼다.

“슐츠.”

나는 그에게만 들릴 목소리로 아주 작게 속삭였다.

“사람 많은 데서 꼭 이래야겠어?”

목소리를 한껏 낮추느라 이를 꽉 깨문 듯한 음성이 흘러나오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슐로이츠는 아랑곳하지도 않았지만. 그는 내가 설령 욕을 퍼부어도 개의치 않아 할 것 같다는 이상한 직감이 들었다.

“너와 내가 결혼하는 걸 모르는 놈들이 여기 어디에 있다고.”

“모든 약혼자가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열정적으로 굴지는 않거든?”

“미안한데 블란데아. 난 네게 불성실한 약혼자로 낙인찍힐 생각이 전혀 없어서.”

“…불성실?”

순간 나는 의아해져 물었다.

“언제부터 그렇게 남들 평가를 따졌는데?”

“조금이라도 희망이 보인다 싶으면 네게 다가와 집적댈 머리 빈 놈들이 득시글거리잖아.”

“……?”

그의 말에 주변을 둘러보았다.

아까만 해도 내가 둘러보려고 할라치면 한 박자 늦게 시선을 돌리는 기사들이 적지 않았다.

덕분에 내가 나를 훔쳐보고 있는 시선들이 많다고 인지하기도 했고.

그런데 이번에는 이상할 정도로 우리 쪽에 닿아 있는 시선이 없었다.

이상했다.

다들 겁을 먹은 것처럼 눈길을 피하는 것 같은데, 순전히 나의 착각일까?

추측이 꼬리를 물고 확실하게 부풀어 오르기 직전, 슐로이츠가 입을 열어 내 주의를 잡아끌었다.

“네가 여기서 치정극을 보고 싶다고 하면 기꺼이 그래 주고.”

“됐어. 하지 마.”

“싫나?”

“싫고 좋고가 문제가 아니라…. 여기에는 르페브르에서 온 기사단들도 있어.”

나도 직계 아가씨로서 보여야 할 위엄이라는 게 있다고 소곤대자 슐로이츠가 웃음을 낮게 터뜨렸다.

“왜. 네 가문의 기사들은 이런 걸 좋아하는 것 같던데.”

“르페브르 기사들이? 아니야.”

슐로이츠의 말을 듣고 시선을 옮겼지만, 르페브르 기사단은 여전히 완벽한 자세로 흐트러짐 없이 대기 중이었다.

“저쪽도 내숭 한 번 기가 막히게 떠는군.”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린 슐로이츠가 픽 웃었다.

***

“모두 지탱하십시오!”

이번에도 마법 확성기라도 갖다 쓴 것처럼 쩌렁쩌렁한 라파엘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나팔 소리로 신호를 보낼 때까지 자리를 이탈하지 마십시오! 절대 이탈하시면 안 됩니다!”

디오스를 비롯한 휘하의 1월대 소속 간부급 기사들이 가장 앞자리에 섰다.

그들은 평소 챙기고 다니던 성검이 아니라 평범한 검을 들고 있었다.

물론 날은 예기가 서려 날카로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척 보아도 대단한 장인의 작품인 보검이었다.

특별히 이번 토벌을 위해 왕실에서 하사했다던 이 검은 검날에 특별한 마법이 새겨져 있기에 마검이라고도 불리는데, 사실 규모가 큰 마법은 이 세계에서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다.

고대 마법사들의 실패한 흑마법의 잔재라고 생각하며 불편해하고 꺼림칙해하는 사람들이 많으니까.

하지만 쉴론 항로를 복원하기 위해서는 왕실의 마검이 반드시 필요했다.

쉴론 항로를 빙 두르듯이 차단해 놓은 성물을 파괴하기 위해서였다.

‘저게 닻이구나.’

닻.

폐수는 깨끗한 물을 쉽게 더럽히듯이, 괴수로 인해 오염된 영토는 끊임없이 청결한 땅을 손상시킨다.

오염을 막기 위해 라자크 왕실에서는 ‘닻’이라는 성물을 설치해 놓는데, 함선을 덮을 만한 거대한 천과 특수한 끈으로 오염된 곳을 봉인해 놓는 것이다.

그렇게 봉인을 해 두어도 근방으로는 땅이 조금씩 죽어 가지만 말이다.

이제 저 성물의 봉인을 풀면 아버지가 오염된 땅을 정화하기 시작할 것이고, 그동안 안에 가득 배회하고 있을 괴수들을 해치워야 했다.

다들 긴장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방치해 놓았던 썩은 관을 열기 직전처럼 숨을 참는 이들도 있었다.

무섭긴 하겠지. 안에 얼마나 많은 괴수들이 도사리고 있는지 쉽게 추측이 되지 않아 이 어마어마한 병력이 모집된 거니까.

‘그 긴장이 금방 허무해질 테지만 말이야.’

놀랍게도, 닻 안에 있는 괴수들은 규모가 예상보다 훨씬 작았다고 했다. 이젠 오파츠까지 있으니 아예 인명 피해는 하나도 없이 쉴론 항로를 복구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누구에게도 하지 못한 말이었다.

네가 봉인된 쉴론 항로의 사정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냐고 하면 딱히 둘러댈 말이 떠오르지 않았으니까.

슐로이츠라면 아마….

별다른 질문도 없이 내 말을 받아들이고 토벌 규모를 짜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심통이 났다.

이쪽만 사력을 다하면 불공평하지.

다들 쉴론 항로의 무역로를 어떻게 해야 한 줌이라도 더 빨리 챙길지 눈에 불을 켜고 있는데.

‘그냥 슐로이츠한테 말하고 쟤네 다 못 오게 하는 게 나았나?’

그랬다면 슐로이츠는 늘 효율을 중시하는 총사령관이니, 괴수 토벌 경험이 많은 군부의 인원들로만 정벌조를 짰을 텐데.

나는 흘긋 슐로이츠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거대한 일을 파훼해야 할 때면 자꾸 슐로이츠의 등을 쳐다보게 되었다. 습관이었다.

나뿐만이 아니라, 군부에 속해 있는 기사들은 전부 그럴 것이다.

슐로이츠 특유의 무료하고 무심해 보이는 눈동자를 보고서야 안심하는 기사들도 많았다.

‘슐로이츠는…. 작중에서도 그냥 무덤덤하게 군부의 일을 수행하잖아.’

세기의 천재라고 해도 때로는 목숨을 걸어야 할 만큼 위험한 정벌의 총책임자면서.

슐로이츠는 끊임없이 자신을 증명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다고, 언젠가 읽었던 지문이 머리를 간혹 맴돌았다.

‘…사실 그래서 슐로이츠도 현존하는 훈장을 다 수여받고 난 다음엔 종종 권태로워 보인다고도 했고.’

하지만 지금의 그는 태산처럼 거연해 보일지언정 숨이 멈춘 고목나무처럼 권태로워 보이진 않는다.

슐로이츠는 아직도 증명을 하기 위해 저렇게 분투하는 걸까? 누구에게 증명을 하기 위해 저렇게 성검을 쥐고 있는 걸까.

“거도!”

라파엘의 목소리가 떨어지자 닻을 묶고 있던 두꺼운 끈 위로 검이 떨어졌다.

동시에 안쪽에서부터 불어오는 거센 바람. 잘려 나간 닻이 크게 펄럭였다. 마치 태풍에 나부끼는 돛처럼 쉴 새 없이 펄럭인다.

‘절대 이탈하지 말고 지탱하라’는 라파엘의 말이 새삼 실감이 갔다. 제대로 눈을 뜨기도 힘들었다.

심지어 기이할 정도로 시꺼멓게 보이는 습도 높은 차가운 안개가 순식간에 시야를 방해했다.

이 토벌에서 최우선으로 보호해야 할 인물은 다름 아닌 르페브르 공.

아버지였다.

두 번째는….

‘나였고.’

아무래도 정화의 이능을 사용할 수 있는 르페브르라 보호 순위가 높아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디오스의 1월대를 비롯해 왕실 기사단의 부단장, 여타 주력 가문의 단장들은 최전선으로 움직이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비교적 후방에 배치될 예정이었으나 어쨌든 오염된 땅 안으로 들어는 가야 했다. 어차피 괴수는 허무할 정도로 몇 없는 곳인 데다가, 이젠 오파츠며 오파츠가 박힌 성검도 있다.

수신호에 따라 안개가 가득한 오염된 땅에 걸음을 옮기는 순간.

“악!”

“아악!”

기사들이 앞으로 나동그라지며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졌다.

동시에 나 역시 한 손으로 입을 막고 정신없이 기침을 내뱉었다.

목 위로 피가 올라오는 듯한 이 불쾌하며 간지럽고, 한편으로는 낯익은 기분….

바로 오파츠의 보호막이 생성되었다가 깨졌을 때의 감각이었다.

‘왜?’

내 앞엔 괴수가 없는데 보호막은 왜 생겼던 거고, 또 아무런 충격도 받지 않았는데 왜 멋대로 생성된 보호막이 깨지는 거지?

머리를 스치는 복잡한 혼란이 제대로 정립되기 전에 또 한 번 오파츠의 보호막이 제멋대로 떠올랐다.

쩌적. 순식간에 금이 가는 보호막. 한동안 보호막이 깨질 일이 없었다 보니 고통이 더 극심했다.

쇠망치로 얼음을 깨뜨리는 것 같았다.

세 번이나 멋대로 만들어진 보호막은 눈 깜짝할 새 깨졌다. 어마어마한 충격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오파츠를 당장 바닥에 버려야겠다고 생각은 하는데, 손이 지나치게 바들바들 떨려 제대로 말을 듣지도 않았다.

이를 악문 그때.

품속으로 들어온 타인의 손이 오파츠를 난폭하게 뜯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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