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군부령의 방식-(36) (147/190)

후드득.

신관의 권위가 바닥으로 떨어진 시대지만, 그래도 돌을 깎아 만든 신상에는 절을 올리고 수령이 몇백 년이 되었다는 나무는 쉽게 베어 내지 않는 법이다.

딱 그만큼의 찝찝함이 고용인들의 가슴 위에 돌처럼 얹혔다.

아무리 그래도 신을 모시는 사자들에게 이렇게 막무가내로 찬물을 부어도 되나?

불편함은 서서히 기이함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왜 안 일어나지?’

‘수면제라도 먹었나?’

‘죽은 거 아냐?’

무식한 찬물 세례를 받았는데도 신관들이 쉽게 깨어나지 않았던 까닭이다.

아니, 일어나기는 일어났다.

신관들은 아주 천천히 눈을 떴다. 투명하고 부드러운 햇볕을 받고 천천히 잠에서 깨는 고양이처럼.

아이러니한 광경이질 않은가.

그들의 얼굴과 머리를 온통 적신 축축한 흔적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물벼락을 맞으리라 미리 예상한 연기자도 저런 식으로 평온하게 깨어나지 못할 것이리라.

신관들은 하나같이 놀라지도 않고, 그저 블란데아를 보고 상황 파악이 끝난 듯한 얼굴이었다.

조용히 일어나 의복을 정제하고 블란데아에게 깊이 고개를 숙였으니까.

르페브르 저택의 고용인과 의사들은 귀신에 홀린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

“저, 블란데아 아가씨. 한 분이 도통 일어나질 않습니다만….”

그때 부집사가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고했다.

“안 일어난다고? 누가?”

부집사가 신중한 손길로 가장 안쪽 침대에 누워 있는 신관을 가리켰다.

르페브르 성으로 온 신관들의 숫자가 적지 않았다. 물론 거대한 성은 이들을 충분히 수용할 수 있었으나, 신관들은 한곳에 같이 머물기를 강력히 희망했다.

듣자 하니 따로 자는 동안은 습격이 많아 신관들을 적잖게 잃은 충격이 있다고 했다.

엔리코르는 작은 연회를 열 때 쓰는 홀을 개방해 주었고, 부집사는 소연회홀에 신관들의 숫자에 맞춰 침대들을 들여놓았다.

블란데아는 얼굴도 제대로 보이지 않는 신관의 면면을 확인하기 위해 직접 걸음을 옮겼다.

이미 물벼락을 맞고 깨어난 신관들은 말리지도 않았으며 난색을 표하지도 않았다.

그저 빛을 따라 움직이는 해바라기처럼 얌전히 블란데아의 용태만 눈으로 좇았을 뿐이었다.

블란데아는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신관의 낯을 확인한 후 고개를 젖혀 웃음을 짧게 터뜨렸다.

하필 그 신관이다.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내 괴수 앞에 던졌던 바로 그 신관.

우스운 일이다. 찬물은 신관들의 얼굴에 부었는데, 불쾌하게도 자신의 등을 따라 얼음을 섞은 냉수가 흘러내려 가는 기분이었으니까.

등골이 싸해지는 직감.

여기서 물벼락을 맞고 허덕이는 다른 신관들은 상관없다.

오직 이 신관만이 유효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경.

미친 미인들의 최후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자신에게 판도라의 상자 같던 편지를 보낸 인물은 분명 이 신관일 게 틀림없었다.

이미 사용인들이 물을 뿌려 베개며 시트가 흥건하게 젖었지만, 여전히 고고하게 잠들어 있는….

덕분에 신관은 얼핏 신비로운 요정처럼도 보였다. 신의 사랑을 받아 영원히 잠들어 생명을 보존하는 신화 속의 존재.

하지만 블란데아는 그저 씩씩 화만 나 있었을 뿐이었다.

“미친놈 아냐?”

일어나지 않는 신관이 가증스럽게만 보였다.

“이런 상황에도 안 일어나겠다고?”

“아, 아가씨?”

블란데아는 직접 부집사의 손에서 양동이를 잡아채 잠든 신관의 얼굴 위에 가차 없이 들이부었다.

“헉!”

여차하면 양동이로 신관의 대가리를 가격할 듯한 난폭함이었다.

덕분에 사용인들만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병아리 같은 블란데아의 모습만 보아 왔던 그들은 그녀의 이런 거친 모습이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혹시 아가씨가….”

하인 중 한 명이 인형극을 하는 장인처럼 허공에다 두 손을 움직였다. 얇은 끈으로 누군가의 목을 가차 없이 조르는 듯한 행동을 해 보이며 하인이 심각한 얼굴로 추측했다.

“이렇게 군부에서 고문관을 역임하시는 건가?”

“블란데아 아가씨가?”

“음….”

창문으로 투과되는 햇빛이 블란데아의 금빛 머리카락을 아름답고도 나른하게 출렁이게 한다.

“아니겠지.”

“아닐 거야.”

“아가씨가 어릴 적부터 얼마나 연약하셨는데…. 군부에서도 그냥 조용히 지내시겠지.”

“그렇지? 나도 그냥 해 본 거야.”

그녀가 군대에서 어떻게 후임들을 굴리고 건방진 기사들의 기를 꺾는지는 르페브르의 그 누구도 감히 짐작을 하지 못했다.

뜻밖의 상황에 쑥덕대던 사용인들은 오래지 않아 점차 조용해지기 시작했다.

왜냐하면 블란데아가 아무리 찬물을 들이부어도 ‘그’ 신관만은 조금도 미동이 없었기 때문이다.

부자연스럽다.

마치 죽은 것 같았다.

블란데아가 마침내 신관의 멱살을 틀어쥐었을 때, 다른 신관들을 살피고 있던 비너스가 성큼성큼 걸어왔다.

“아가씨.”

비너스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집에 손을 올렸다.

“이렇게 된 이상, 이 신관의 손을 잘라 깨워 보면 될 것 같습….”

“……!”

고용인들이 눈을 동그랗게 뜨는 사이.

“블란데아 아가씨.”

귀에 설게 감도는 낮게 흐르는 목소리.

이미 일어나 물을 뚝뚝 흘리고 있던 신관 중 한 명이 다가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설사 손을 잘라도 파놉테스 신관은 깨어나지 않을 겁니다.”

그 모습마저 블란데아에겐 여전히 가증스러워 보였다.

왕실 위로연에서와는 너무 다르질 않은가. 자신들을 데려가 보호해 달라고 소리칠 때는 절박한 피난민이나 다름없더니, 지금은 정말로 신관들에게 어울릴 법한 고고하고 신비로운 분위기다.

사람은 목숨이 안전해질 때에야 비로소 본모습이 나온다고는 하지만, 지금의 블란데아에게는 신관들의 모든 것이 그저 가증스러울 따름이었다.

그녀는 챙강 소리가 나게 양동이를 바닥에 내려놓고 팔짱을 꼈다.

“파놉테스?”

“이 신관의 신명(神名)입니다.”

“신명…. 그래.”

신전에 관한 정보가 거의 없는 것은 블란데아도 마찬가지였다.

“왜 안 일어난다는 거지?”

“아주 예전부터 그랬으니까요.”

“아주 예전부터 그랬다는 게 무슨 말인지 짐작이 안 가네. 기면증이란 소리야?”

블란데아는 의사를 바라보며 물었다. 하지만 의사는 바로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아가씨.”

“파놉테스 신관은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그딴 식으로 두루뭉술 뭔가 있을 것처럼 얘기만 하면….

블란데아가 이를 갈았다.

“당신들은 왜 그렇게 자는데?”

“파놉테스 신관이 입을 열지 않으니까요.”

블란데아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웃었다.

절로 하하, 하고 기가 막힌 웃음이 흘러나왔다.

수수께끼의 답을 풀러 왔더니 더한 수수께끼가 머리 위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주변을 둘러봐도, 심지어 비너스조차 신관들과 블란데아의 대화가 무슨 말인지 조금도 짐작을 못 하는 낯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블란데아가 아무리 눈에 힘을 주고 그들을 노려보아도, 신관들의 온화한 낯엔 아무런 변화가 없다.

다만….

그들의 맞잡은 손이 벌벌 떨리고 있다는 사실만은 눈치챌 수 있었다.

사람이 아니라, 오래된 유물처럼 묘한 분위기를 내뿜고 있는 신관들이지만….

‘그래도 일단은 사람이지.’

신관들은 대신전의 흔적에 분명 ‘갇혀’ 있었던 사람들이다.

그 거대한 대신전이 당장 무너질지도 모르는 급박한 상황 속에서, 그렇게 갇혀 있다는 것은….

사실상 누군가 그들을 산 채로 죽이고 매장하기 위해 밀폐된 공간에 몰아넣었다는 뜻이었다.

생각 정리를 끝낸 블란데아는 잠든 파놉테스 신관을 돌아보았다.

“이자가 내게 편지를 보냈지?”

“그렇습니다.”

“그럼 이렇게 온종일 자고 있는 이유도….”

‘내 질문에 답을 피하려고?’

블란데아는 비너스를 비롯한 모든 사용인들을 내보냈다.

“위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저런 신관들이?”

신관들은 봄볕에 살랑이는 아지랑이처럼 무해했다.

“…괜찮겠군요.”

블란데아는 여전히 자신만을 빤히 보는 신관들에게 눈길을 한 번 주었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데 당신들이 르페브르 저택에서 전처럼 편히 잠들 수 있을까?”

아무리 블란데아가 저택에선 위력을 행사하지 않는 평화주의자라지만 엄연히 둘째 직계였다.

블란데아가 이렇게 화가 난 모습을 보인 데다가, 신관들은 꺼림칙할 정도로 기이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었다.

르페브르의 고용인들은 알게 모르게 신관들을 사소하게 괴롭히거나 소소하게 박대할 게 뻔했다.

“괜찮습니다. 아가씨.”

“파놉테스 신관의 신변은 내가 온전히 맡을 거야. 설령 당신들이 르페브르 말고 다른 쪽에 의탁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말이야.”

이 말인즉슨, 이제까지의 돌봄이 감금으로 변할 것이라는 협박이나 마찬가지였으나 신관들은 그저 고분고분했다.

눈에 힘을 주고 있던 블란데아가 김이 팍 샐 지경이었다.

“파놉테스 신관이 잠들기 전 그리 당부했습니다. 아가씨가 하는 말에 일절 순종하길 바란다고요.”

“…정말 가지가지 하네.”

도무지 이해가 안 가고, 당장이라도 일어나서 자신에게 보낸 편지를 소상히 해명하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블란데아는 파놉테스 신관의 이마를 한 대 툭 쳤을 뿐 더 이상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그녀가 그대로 밖으로 나가려고 하자, 이때까지 땅에 붙박인 나무처럼 가만히 서 있던 신관들이 조르르 따라왔다.

르페브르에서 쫓겨나는 게 무섭기는 한 모양이었다.

떠날 것 같은 블란데아를 배웅하는 신관들의 모습은 신을 경외하는 신도의 그것과 다름없었으니까. 어찌나 공손한지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따라오지 마.”

“예. 아가씨.”

와중에도 부드럽게 웃는 모습이 참…. 블란데아는 휙 밖으로 나가 버렸다.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대기하고 있던 비너스가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아가씨.”

“헥토르는 어디 있어? 엔리도 안 보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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