슐로이츠는 턱을 가볍게 기울였다.
왜 또.
로시에의 누군가가 블란데아의 다리를 붙잡고 매달렸나?
“군부에서는 항로 복원을 1년 후로 날짜를 잡고자 합니다.”
“……?!”
왕도에서부터 내려온 귀족들의 얼굴에 경악이 스쳐 갔다. 너무 늦는 거 아니냐는 항의가 빗발치는 가운데.
그들의 말은 두 귀로 흘리고 있던 라파엘이 문득 어깨를 바로 세웠다.
조용히 착석해 있던 블란데아가 자리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예. 블란데아 사령관님. 이견이 있다면 말씀하십시오.”
“르페브르 경! 부디 탈환 날짜를 당겨 주십시오!”
“대회의의 실질적인 주관자는 다른 누구도 아닌 르페브르 공이십니다! 경의 부친이시란 말입니다!”
“더군다나 이건 라자크 왕국을 위한, 국익을 위한 일이지 않습니까! 지원이 더 필요하신 거라면 당장 제대로 된 협상가를 보낼 테니 부디 날짜를 재고…!”
“좋습니다.”
“…예?”
순간 자리에 있는 거의 모든 이들이 귀를 의심했다.
블란데아는 평소보다 훨씬 차갑고 냉정한 얼굴이었다. 얇은 얼음으로 가면을 만들어 덧씌우고 있는 듯한…. 그녀를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이들에겐 묘한 위화감까지 느껴지는 서늘한 분위기였다.
냉기 어린 차분함. 블란데아가 말을 이었다.
“저는 대회의원의 의견을 존중하여 토벌 날짜를 일주일 후로 결정하겠습니다.”
일주일?
갑자기 일주일이라고?
왜?
파격적으로 당겨진 날짜였다.
대회의원에서도 그렇게 빨리 복구를 진행해 줄 거라고는 기대도 않고 있었기에 더욱 그랬다.
여러모로 놀라 있던 귀족들은 한 박자 늦게 블란데아의 말에 맹점을 찾아냈다.
그녀는 방금 전 ‘군부’가 아닌 ‘저’라고 말했다.
주체가 아예 달랐다. 블란데아가 개인적으로 항로를 복구하겠다는 뜻인가?
르페브르 기사단이 유명한 건 알지만.
하지만 한 가문에서 단독으로 진행할 일은 아니었다. 결코, 절대.
“블란데아 경.”
순식간에 혼란에 가득 찬 회의실에 뚝 떨어지는 낮은 목소리.
넋을 놓고 블란데아를 바라보고 있던 이들이 하나같이 머리를 얻어맞은 듯 정신을 차렸다. 회의 테이블의 최상석으로 이목이 홱 쏠렸다.
팔짱을 낀 슐로이츠가 블란데아를 말없이 노려보고 있었다. 묘한 안광을 띤 싸늘한 삼백안이 자신이 아닌 블란데아 르페브르에게 향해 있다는 것에 남몰래 안도감을 느끼는 귀족들마저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자리하고 있던 지휘관들은 달랐다.
그들에게 슐로이츠의 무자비한 성정이란 이를테면 가혹한 날씨처럼 충분히 예측이 가능한 것이었다.
두렵기는 하나 낯설지는 않은.
하지만 블란데아의 눈동자가 평소와 다르다는 점은 그저 섬뜩하기만 했다.
그녀는 이상할 정도로 무표정이었고, 라파엘을 비롯한 지휘관들은 점점 기이함을 감지하고 있었다.
생전 처음 섬광 폭풍을 맞닥뜨린 유목민이나 느낄 법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새빨간 눈동자에 온기가 죄 빠져나가면 날것의 생피처럼 보인다는 사실을 자리한 이들이 절감하던 와중.
“죄송합니다. 각하. 일주일 후는 제 개인적인 의견이었습니다.”
블란데아는 마치 누군가가 뺨을 때려 정신을 차린 이처럼 보였다.
따지자면 그녀를 정신 차리게 한 이는 슐로이츠 프로키온이었고.
“죄송합니다. 각하.”
재차 사과한 블란데아가 자리에 앉았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렀다. 귀족들은 열정적으로 항변하는 것도 잊었다. 괜히 몸을 움츠리고 상황만 살피게 되었다.
블란데아의 핏빛 눈동자는 이제 제대로 살펴볼 수 없었다. 그녀가 탁자 위의 서류에 의미 없이 시선을 고정했기 때문이다.
내리깐 황금빛 속눈썹.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앞에 얼굴을 들이대지 않고는 제대로 눈빛을 살펴볼 수도 없는 자세. 우윳빛 뺨으로 흘러내린 금빛 머리카락 몇 가닥만이 불빛 아래 요정처럼 반짝였다.
슐로이츠 프로키온은 여전히 블란데아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대회의원에 전해라.”
“…….”
“군부에선 일주일 후 쉴론 항로를 탈환하러 출병하겠다.”
단 한 명의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죄 긴장시킨 회의가 끝나자마자, 블란데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굳어 있는 사람들을 지나쳐 그대로 회의실을 빠져나갔다.
금빛 머리카락 끝이 사라질 때까지 누구도 제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슐로이츠는 도망쳐 나가는 블란데아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았다.
***
문을 닫고 침실로 들어온 블란데아는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였다.
품 안 주머니 가장 깊은 곳에 넣어 둔 편지를 꺼낸다. 분실을 막기 위해 가느다란 가죽끈에 작은 보석까지 달아 매달아 둔 편지였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
이 세상엔 아름다운 것들도 많고, 신과 자연의 섭리를 거스른, 소위 미쳐 버린 것들도 많지요.
편지의 문장을 천천히 읽어 내려가던 블란데아의 눈동자가 한 문장에서 정신없이 흔들렸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경.
미친 미인들의 최후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미친 미인들의 최후.
미친 미인의 최후.
<미친 미인의 최후>….
가슴을 쇠심으로 동여맨 것 같았다. 얼굴을 알 수 없는 누군가가 있는 힘껏 매듭을 잡아당기는 것처럼 가슴이 답답하고 숨이 막히기 시작했다.
그러니 여주인공이 찾아야 할 곳을 당신이 찾아 주지 않으시겠습니까?
블란데아 르페브르.
당신도 그녀의 모습이 되고 싶진 않으실 거잖습니까?
설마 아직도, 본인이 이 거대한 세계와 상관없는 소품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고 있으십니까?
호흡이 가팔라졌다.
쇠로 만든 끌과 정이 정신의 표면을 두드려 부숴 내는 것 같았다. 한 조각 한 조각 힘없이 부스러져 흘러내리는 파편들.
말 그대로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와중에도 블란데아는 애써 침착함을 그러모았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야 했다.
블란데아는 벌벌 떨리는 손으로 편지를 작게 접어 품속 가장 깊은 곳에 밀어 넣었다.
일부러 편지를 없애지 않았다.
차마 없앨 수가 없었다.
그랬다간 정말로 망상증 환자가 되어 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편지를 혹여 분실해 누가 본다고 한들, 무슨 뜻인지 결코 이해할 수도 해독할 수도 없을 테니까.
아니지, 사실.
나 말고 모두가 <미친 미인의 최후>에 대해 알고 있는 게 아닐까?
모두가 사실 나처럼 잘못 태어난 게 아닐까?
조금도 즐겁지 않은데 웃음이 터져 나왔다.
웃음소리인지 비명 소리인지 구분도 되지 않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파묻는다. 울음을 터뜨린 기억이 없는데 눈가와 손바닥은 물기로 축축했다.
손바닥. 오목하게 팬 곳으로 금세 눈물이 가득 고인다. 기어이 흘러넘친 눈물이 손목을 따라 뚝뚝 흘러내렸다.
“…….”
문득 그녀의 두 손목이 붙잡힌다. 빠르지 않은 속도로 벌어진다. 어둡고 축축했던 시야가 환해진다. 바로 앞에서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는 푸른 눈동자는 어쩐지 거짓말처럼 느껴진다.
“또 누가 너를 겁먹게 만들었나?”
“…….”
슐로이츠가 희미하게 웃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네가 원하는 대로 흘러갈 테지. 블란데아.”
“…….”
“나를 보면 알지 않나.”
평생 누구를 위로해 본 적 없었을 것 같은 남자가 옅은 미소를 머금고 괜찮을 거라고 이야기한다.
사정을 캐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어리고 혹독했던 계절.
눈이 보이지 않던 소년은 소녀를 따라가겠다고 했다.
운명이 틀어질까 겁을 먹은 소녀는 도망쳤고, 버려진 소년은 비틀린 분노를 품고 무럭무럭 자라났다.
소년과 소녀는 서로의 가슴에 수십 번이나 서툰 비수를 꽂았으나 종내에는, 결혼을 약속하고 서로를 응시하고 있다.
그러니 그의 말이 맞다.
겁을 먹고 두려워서 몸을 움츠렸으나 결국 그는 그녀가 내내 꿈꿔 왔던 것처럼 건강한 몸으로 역사에 다시없을 전설적인 기사가 되었다.
블란데아는 슐로이츠의 목을 끌어안고 어깨에 젖은 눈을 묻었다.
품속 깊은 곳에 넣어 둔 작은 보석이 얇은 옷감 위로 깊숙이 눌렸다.
***
쾅!
우아하고 평화롭기 그지없는 르페브르의 성에 무뢰배 같은 소리가 퍼진 건 얼마 후였다.
신관들을 돌보고 있던 의사들이 화들짝 놀라 경계했다.
“…씨, 아가….”
어디서부터 들려오는 당황해하는 소리. 그런데 이 목소리는 분명….
“…비너스 경?”
“비너스 경 목소리 아닙니까?”
얼떨떨해진 의사들이 눈길을 교환하던 사이.
닫혀 있던 문이 쾅 소리를 내며 열렸다.
“블란데아 아가씨?”
문을 박차고 들어온 건 다름 아닌 이 가문의 존귀한 아가씨인 블란데아였다.
그녀는 군복을 입은 채로 들어와 주변을 휙휙 둘러보았다. 눈썹이 하늘까지 솟아 있었다.
블란데아가 성난 표정을 짓는 건 몹시 드문 일이라 뒤따라온 식솔들은 전부 어리둥절한 기색이었다. 그녀는 가문의 막내였던지라 아무리 자라도 아기가 화를 내는 것 같기만 했는데.
심지어 이를 부득부득 갈기까지!
부집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가씨, 당최 무슨 일이신지….”
“여기 신관들 언제 깨?”
의사가 서둘러 대답했다.
“신관분들이 이상할 정도로 잠이 많으셔서 도통 깨어나질 않으십니다.”
“예. 게다가 기력이 많이 쇠해 있어서 섣부르게 깨우기도 조심스럽고요.”
“조심스러워?”
블란데아가 죽은 듯 잠들어 있는 신관들 쪽으로 걸음을 박차며 말했다.
“그딴 편지를 보내 놓고 조심스러워?”
“……?”
신관들이 저번에 잠시 정신이 들었을 때를 말하는 것 같았다. 목숨을 구해 준 블란데아 아가씨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면서 편지를 써서 보냈는데….
“당장 가서 물 열 동이 퍼 와.”
도대체 무슨 편지를 썼길래 아가씨가 이렇게 화가 났지?
잠시 후.
후다닥 뛰어간 사용인들이 차례로 채운 양동이를 공수해 왔고, 블란데아는 그대로 가장 가까이에 있는 신관에게 찬물을 쏟아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