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현듯 뺨을 얻어맞은 듯 정신이 든다.
조금쯤, 아니.
실은 반쯤 넋까지 놓고서 로시에 공의 말을 듣고 있던 나는 미소를 입에 물었다.
로시에 공은 이미 나를 묘한 표정으로 보고 있었지만, 그는 충분히 예의를 갖춘 고위급 귀족이었다.
“르페브르 경.”
자연스레 화제를 돌려 버렸으니까.
“저는 티타니아에게 상처를 많이 줬습니다. 같은 실수는 다시 반복할 생각이 없으니 걱정 마십시오. 하지만 충고는 감사히 받겠습니다.”
“네.”
“그러고 보면 르페브르 경 덕분에 어릴 적 티타니아가 목숨을 구명 받기도 했죠. 이번엔 루리의 목숨을 빚지게 생겼으니….”
로시에 공이 나간 후, 나는 미간을 가볍게 일그러뜨렸다. 기묘하게 짜증이 났다.
‘내가 로시에 공을 너무 단순하게 봤나?’
“당연히 르페브르 가주와 부인께서도 마찬가지이실 겁니다.”
왜 하필 거기서 부모님 얘기를 해서….
‘나도 양딸이라고 의심할 수도 있겠네.’
뭐, 로시에 공이 의문을 가져도 별 상관은 없었다. 그가 아무리 탈탈 털어 봤자 아무것도 나오진 않을 테니까.
의사가 루리를 살피는 동안, 나는 침실로 잠시 돌아갔다.
세로로 길게 세워진 거울 앞에 서서 얼굴을 살폈다.
짙게 빛나는 붉은 눈동자와 한 갈래로 묶어 넘긴 금빛 머리카락. 몇 가닥 빠져나온 머리카락이 어깨 위로 흘러내린다.
“자식을 키운다는 건 핏줄을 키우는 게 아닙니다.”
“아이의 미소와 아이의 평화를 키워 내는 것이지요.”
“아이의 시간을 키운다는 말이 맞는 표현이겠군요.”
로시에 공의 말을 떠올려 보던 나는 이마를 살며시 찡그렸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이 무너진다는 건, 나의 생각이 무너진다는 것과도 같은 말일 텐데.
“블란데아 르페브르.”
거울 속에 비치는 여자는 그 말을 똑같이 따라 했다.
나는 이제 전생의 얼굴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블란데아에게서 눈을 떼고 주변을 한번 둘러봤다.
이 건물은 오래지 않아 허물어질 것이고, 로시에 가문은 아름답고 정교한 새 별관을 선물할 것이다.
르페브르에게 보답하기 위해서.
르페브르가 내게 보답하기를 원해서.
세 살에 죽었어야 하는 그 애는 멀쩡히 살아남아 가족들의 사랑을 넘치게 누리고 있다.
이럴 때면 홀로 걸어온 눈밭을 되돌아보는 기분이 들곤 했다.
두 번째 발자국부터는 내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나, 첫 번째 발자국은 온전히 나만의 것이라고 할 수 없질 않나.
<미친 미인의 최후>에서, 세 살까지 가족들의 눈물을 매일같이 자아냈다던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어떤 성격이었을까?
스스로 잡아먹힐 만큼 깊은 생각은 결코 아니었다.
다만 이건, 이를테면 해묵은 쓸쓸함 같은 것이었다. 낡을 대로 낡아, 스러지기 시작한 다락방을 들춰 본 아이가 느낄 법한.
그저 그 정도의 삭연함.
***
그날, 야심한 시각.
나는 라파엘의 안내에 따라 감옥으로 향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슐로이츠 경.”
특유의 습기가 눅눅하게 맴도는 감옥에는 이미 슐로이츠를 비롯한 몇몇 주요 지휘관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쇠창살이 두껍게 쳐진 감옥 안에는….
쿵!
괴수가 쇠창살에 끊임없이 머리를 박고 있었다. 창살에 짓눌려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을 바로 앞에서 보니 괴기하다 못해 끔찍했다.
‘세상에. 진짜 살아 있는 괴수잖아.’
꿈인가? 원작에서도 괴수를 생포한 적은 없지 않았나?
마치 어둠이나 겨울을 붙잡아 왔다는 것처럼 들렸다. 잘 믿기지가 않는 말.
“좀 떨어지지, 블란데아 경.”
슐로이츠가 내 팔목을 잡아 가볍게 당겼다. 나는 그제야 몇 걸음 떨어졌다.
라파엘이 턱짓하자 아그네스와 부관들이 쇠창살 위로 검은 천을 덮어씌웠다.
“어우. 진짜 꿈에 나올까 무섭습니다.”
나는 라파엘의 말에 십분 동감하며 슐로이츠에게 물었다.
“경, 르페브르에 괴수를 넘기시겠다고요?”
“그래. 블란데아 경.”
슐로이츠는 조금 피곤해 보였다.
하기야 괴수를 ‘생포’를 했다고는 하지만, 이 감옥까지 끌고 와 처넣은 것도 대단히 힘든 일이겠지.
전례 없는 일이니 당연히 슐로이츠가 도맡아 했을 것이다.
“일전에 헥토르 아이센 공이 괴수를 생포해 줄 순 없겠냐고 내게 물어본 적이 있었어.”
“네?”
나는 귀를 의심했다.
“헥토르 공이 언제 그런 걸 물었나요?”
“일전에.”
습관처럼 짧게 대답한 슐로이츠가, 의문이 가득한 내 눈을 보더니 이마를 나지막이 일그러뜨렸다.
“엔리코르 공자와 군부에 방문했을 때 그러더군.”
“…….”
“경과 합의된 내용 아니었나?”
“…아닙니다.”
슐로이츠가 혀를 찼다.
“그쪽도 딱히 제정신은 아닌 모양이지.”지금
“죄송합니다.”
‘헥토르 미쳤나?’
아니, 나더러 효율적인 가호를 위해 슐로이츠의 입에 키스하라고 할 때부터 제정신이 아닌 건 알고 있었지만….
괴수를 생포해 달라는 부탁을 해?
그것도 군부 최고 결정권자한테?
혼자 멋대로?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헥토르는 어떻게 매번 이렇게 감히 상상도 못 할 예측 불허의 경지를 갱신할 수 있는 걸까?
“…설마 헥토르 공을 위해서 괴수를 잡아 온 건가요?”
“그건 아니고.”
슐로이츠가 픽 웃었다.
“1월대가 우연히 생포에 성공했지.”
‘디오스가….’
나는 슬쩍 디오스를 보았다. 그는 희한하게도 구석에 앉아 있었는데 잠이 든 것인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평소 슐로이츠에 대한 예의와 충성이 넘쳐 나는 놈답지 않았다.
“오파츠 덕분에 생포한 것이나 다름없고, 현재 군부에서는 르페브르와 가장 깊이 협력하고 있잖나.”
“르페브르를 대신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경은 군부에 속해 있으니 그럴 필욘 없고.”
“아…. 네. 그럼 그 얘기를 하기 위해 저를 부르신 건가요?”
“그것도 있고, 겸사겸사. 디오스.”
“…예. 각하.”
디오스가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눈동자가 왜 저래?’
디오스의 흰자가 묘하게 검붉었다. 나는 퍼뜩 괴수가 쉬지 않고 쿵쿵거리고 있는 쇠창살로 고개를 돌렸다.
두껍고 새까만 벨벳 천이 내려가 있어서 여전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순간 묘한 직감이 몰아쳤다.
곧장 디오스의 앞으로 걸어간 나는 그의 양 뺨을 잡았다. 디오스가 순간 흠칫하는 것이 느껴졌다.
시원한 산들바람이 맴도는 곳에 손을 담근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윽고 디오스의 흰자가 눈에 띌 정도로 말끔하게 돌아왔다.
주변이 시끄러워졌지만 들리지도 않았다.
‘세상에….’
나는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그건 굳은 채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디오스도 마찬가지였다.
툭.
슐로이츠가 내 팔을 잡아 떼지 않았으면 아마 몇 시간은 더 멍하니 디오스만 보고 있었을 것이다.
“다 끝난 건가?”
묘하게 불쾌한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슐로이츠의 감정을 찬찬히 되짚을 여유는 없어서 곧장 대답부터 했다.
“네. 그런데 디오스 경이 왜….”
“괴수.”
슐로이츠가 마뜩잖은 얼굴로 이어 말했다.
“내내 괴수를 지켰지. 여기서.”
“……?”
“그러더니 눈이 저 모양이 되더군.”
“그럼….”
“오염인가?”
내가 이마를 찌푸리는 것과 동시에 라파엘이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그, 각하.”
“말해.”
“수많은 괴수들이 오래 머물면 땅이 오염되는 건 맞습니다. 그걸 정화할 수 있는 게 르페브르의 이능이고요.”
얼토당토않다는 듯 라파엘의 이맛살은 잔뜩 찌푸려져 있었다.
“하지만 괴수가 살아 있는 생명체를, 더군다나 인간을 오염시킨다는 말은 들어 본 적이 없습니다.”
“당연한 말을 장광설로 길게도 하는군.”
“그….”
“이런 상황이 흔한가? 드물다 못해 처음인 걸로 알고 있는데.”
“그으….”
“인간만 보면 물어뜯으려는 괴수를 생포에 성공했다는 것 자체가 전례가 없는 일이잖아.”
“…음, 그렇긴 하네요.”
‘라파엘 쟤는 보면 슐로이츠한테 항상 두 마디 이상 반박을 못 하더라.’
뭐, 슐로이츠가 무서울 건 이해는 하지만.
하나같이 맞는 말이기도 했고.
괴수는 인간을 보면 무조건적으로 공격을 한다. 가끔은 인간을 뜯어 먹기 위해 태어난 존재 같기도 했다.
괴수와 인간은 공존할 수가 없다. 무조건 한 쪽은 죽는 게 당연했다. 그런데 이렇게 두 존재가 모두 살아 있는 상태로, 하물며 같은 공간 아래서.
이토록 오래 공존하고 있는 상황 자체가….
‘사실상 건국 이래 처음이 아닐까.’
그때였다.
슐로이츠가 갑자기 내 팔을 홱 잡아 그의 등 뒤로 당겨 보내는 것과 거의 동시에.
쾅!
쇠창살이 우그러지는 것 같은 굉음이 감옥을 쨍하니 울렸다.
***
“……?!”
책상에 엎어져 있던 헥토르가 벌떡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군부에서 헥토르에게 보내는 편지가 들려 있었다.
원래라면 엔리코르가 뜯어 봐야 옳았지만, 현재 엔리코르가 잠시 영지 관리 때문에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오랜만에 군부에서 짧지 않은 편지가 와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개봉했더니….
“괴수를 생포했어? 르페브르에게 보내 주려고 했다고? 근데 혼자 발광을 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처치했다고?!”
한 줄 한 줄 그저 비명을 지를 만한 소식뿐. 하지만 헥토르의 눈엔 마지막 줄이 특히나 타격이 컸다.
하지만 헥토르는 포기가 빨랐다. 그는 금세 단념하고 블란데아에게 사적인 편지나 썼다.
물론 엄격한 협약에 의해, 이 편지도 공문서로 보내질 게 뻔했지만.
그래서 그냥 안 보냈다.
‘공문서라니까 왕실도 볼 거 아니야. 곤란하지.’
편지에는 블란데아 아가씨(의 머리카락이)가 몹시 보고 싶다느니, 르페브르는 자신에게 너무도 소중(한 재원)하다는 말 따위가 자주 적혀 있었기 때문이었다.
누가 봐도 연서였다.
헥토르는 머리를 긁적였다. 편지가 너무 많이 쌓이니 솔직히 아가씨한테 갖다 줘도 하나도 안 읽고 다 난롯불에 던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쌓일 바에는….
“이참에 그냥 가문을 바칠까?”
번거롭게 편지를 쌓아 둘 필요도 없이, 르페브르에 아이센 가문을 바치고 주종 관계를 맹세하는 게 낫겠다. 합리적이기 그지없는 판단이었다.
아가씨와 가신.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것 아닌가.
그저 순수하게 볼 것 아닌가?
블란데아가 알았으면 개소리하지 말라고 정강이를 걷어찼을 생각이었다.
헥토르는 가방 안에서 굴러다니는 아이센 가주의 반지를 룰루랄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