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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군부령의 방식-(31) (142/190)

루리의 전담 하녀가 이렇게 기쁜 듯 설명해 준 것은, 루리의 눈동자 색깔이 선명한 분홍색이었기 때문이다.

“프로키온 공. 르페브르 영애. 대단히 송구하오나, 지금 가주님께서 잠시 자리를 비우셔서….”

‘자리를 비워?’

집사의 말이 의아하게만 들렸다.

죽은 줄 알았던 친딸이 저택에 돌아왔는데, 로시에 공이 자리를 지키지 않고 저택을 비웠다니?

상관없긴 했다.

“루리 로시에 양을 만나고 싶어.”

“…예?”

집사는 당황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가 머릿속으로 빠르게 상황 파악을 하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내가 티타니아 로시에의 직속 상관이 되었다는 건 당연히 알고 있겠지.

솔직히 죽은 줄 알았던 친딸이 갑자기 나타났다면 가장 신경 쓰이는 게 데리고 있는 양딸 아니겠는가?

‘그래도 생각보다 티타니아가 얌전했나 봐?’

지금 로시에 가문의 집사는 뜻밖의 요청에 잠시 당황했을 뿐, 특별히 긴장하거나 경계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작중에선 집사가 티타니아와 관련된 모든 이들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는 묘사가 나왔다는 걸 반추해 보자면 장족의 발전이나 다름없었다.

어릴 적 내가 보내 준 오파츠 덕분에, 끔찍하고 불우한 과거를 겪지 않은 티타니아가 제법 얌전히 지냈던 모양이다.

하긴 걔도 찌르면 찌를수록 튀어 오르는 성향이었지.

“르페브르 영애.”

집사가 정중한 어조로 말했다.

“언젠가 가주님께서 이르시길, 르페브르 영애가 오시면 언제든 최고의 환대를 하라고 분부하셨습니다.”

코끝을 간지럽히는 차향은 최고급이었고 접시는 하나같이 금테를 두른 장인의 작품이었다.

어릴 적, 티타니아 로시에를 구해 준 이후 로시에 가주는 줄곧 내게 우호적이긴 했다.

그래서 한 시간 안에 저택에 방문하겠다는 슐로이츠의 전언도 무리 없이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뭐, 내가 아니었어도 감히 슐로이츠의 방문 요청을 거절할 수 있는 가문이 있겠냐마는.’

왕가도 그러지 못할 텐데.

하인이 루리를 부르러 재빨리 움직였고, 나는 앞에 놓인 찻잔을 만지작거렸다.

대체 왜 이렇게 루리가 일찍, 그것도 내가 아는 방법과 다르게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작중에서의 여주인공답게 그녀는 사교 활동도 열심히 했다.

오랫동안 평민으로 살던 루리가 레이디로 성공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르페브르와 척질 수는 없겠지.

‘가주의 분부와 환대’라는 말로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든 집사였지만 이런 계산도 분명히 하고 있을 것이다.

어차피 내게 도움을 바라고 있을 테니 나도 조금 더 루리에 대해 뻔뻔히 캐물어 보기로 했다.

막 입을 떼려던 찰나.

“아가씨가 오셨습니다.”

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루리가 도착했다.

긴장이 되기 시작했다.

루리 로시에.

<미친 미인의 최후>를 아우르는 유일한 여자 주인공.

그녀를 묘사하는 수식어는 여러 가지였다.

분홍색 눈동자는 꽃잎처럼 사랑스러웠으며, 백금빛 머리카락은 비록 평민으로 지낸 시간이 길어 짧고 푸석했으나 특유의 분위기만은 발군이었다.

무엇보다 그녀는 수많은 성검을 휘두를 수 있는 대단한 천재였다.

사슴처럼 항상 활기차게 뛰어다니고, 생도의 신분으로도 군부에 적잖은 공로를 세운….

“……?”

그대로 시선이 멎었다.

마치 시체 같은 여자가 휠체어에 실려 들어오고 있었다.

‘송장이군.’

슐로이츠가 루리 로시에라는 여자를 보면서 무심하게 떠올린 생각이었다.

여자는 담요로 몸을 둘둘 말고 있었고, 휠체어에 올라가 있는 석상이나 마찬가지였다.

담요 사이로 얼핏 드러난 손가락도 비쩍 마른 채였다. 라자크 왕국은 부유한 나라였다. 웬만큼 가난한 평민들 중에서도 저렇게 비쩍 곯은 모습은 보기 힘들었다.

무엇보다 큰 병을 앓고 있는 듯 해쓱하게 푹 팬 뺨이며 시체처럼 뜨지 못하는 눈….

슐로이츠는 인생의 거의 대부분을 군인으로 보낸 이답게 쉬이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이틀을 넘기지 못하고 죽겠군.

최소한의 관심을 던져 줬으니 블란데아의 약혼자로서 도리는 했다. 슐로이츠는 그의 거의 모든 관심사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블란데아가 벌벌 떨고 있지만 않았어도 그러려니 했을 것이다.

“블란데아.”

“…….”

“블란데아!”

그제야 깜짝 놀란 블란데아가 슐로이츠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팔은 어느새 슐로이츠에게 잡혀 있었다.

“…아. 죄송해요. 너무 상태가 좋지 않아 놀랐네요.”

상태가 좋지 않아서?

블란데아는 입단한 지 이미 반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온 세상의 빛을 다 빨아들이며 태어난 것 같은 블란데아 르페브르가, 군부에서는 유독 불운했다.

일단 자신을 만났으며.

두 번째로 유독 빈번하게 괴수들을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그런 점을 반추했을 때, 블란데아의 실전 경력은 몇 년을 구른 지휘관들보다 더할 것이다.

괴수 때문에 다친 이들도 적잖게 보았던 그녀가 저렇게 동요를 보인다고?

로시에 공이 허겁지겁 뛰어 들어온 건 직후였다.

“집사!”

“가주님!”

로시에 공은 평소의 냉철한 모습은 어디에 갖다 버렸는지, 머리도 재킷도 흐트러져 있었다.

“루리는? 괜찮으냐?!”

“아가씨는 여전하십니다.”

집사만이 외부인들에게 이런 꼴을 보이게 되어 민망하다는 기색이었다.

로시에 가주는 루리의 앞에 무릎을 굽히고 앉아, 여전히 시체나 다름없는 딸을 숨을 몰아쉬며 살폈다.

“어서! 어서 내 딸을 봐 주시오!”

응접실로 후다닥 뛰어 들어온 의사를 본 블란데아의 두 눈이 커졌다.

“아실? 라샌?”

“아가씨?!”

“블란데아 아가씨?”

그들은 르페브르 가문에 속한 의사들이었다.

‘르페브르에 의사를 부탁하러 가느라 로시에 공이 자리를 비운 거구나.’

작중에서는 고위 귀족이 크게 다치거나 아프면 궁으로 달려가 궁의를 요청한다.

블란데아는 왕가의 의술과 르페브르의 의술이 힘겨루기를 하고 있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으나, 오늘 이 상황을 맞닥뜨리고 알았다.

푸른 피만큼 목숨을 중히 여기는 이들도 없지 않던가.

총력을 다해 시한부인 딸의 약을 개발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르페브르의 의술은 왕가를 한참이나 앞서갔다.

블란데아에게 꾸벅 고개를 숙인 아실과 라샌은 서둘러 루리 로시에부터 진찰하기 시작했다.

로시에 공은 안절부절못하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린 듯했다.

“죄송합니다. 손님들이 계시는데 결례가 있었군요.”

왜 저 송장이 응접실까지 나와 있는지에 대해선 묻지도 않았다.

대강 감이 온 건지, 아니면 캐물을 상대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으니 굳이 심력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심산인지.

냉소적인 슐로이츠의 생각은 이 정도였으나, 블란데아의 눈엔 좀 달랐다.

친딸이 이런 꼴로 나타났으니 이성적인 판단이 어렵겠지.

“앉으실까요.”

“네.”

기묘한 광경이었다.

응접실에 펼쳐 둔 간이침대에 루리를 올리고, 르페브르의 의사들이 열심히 진료를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슐로이츠와 블란데아가 당장 물릴 수 있는 손님들도 아니었고, 루리가 제 눈에서 멀어지는 것도 불안한 로시에 공은 기꺼이 이런 우스운 연출을 택했다.

집사가 식은 찻물을 따라 버리고, 새롭게 찻잔을 채웠다.

블란데아는 말없이 찻잔을 쥐었지만 열기는 힘이 없었다. 그저 차갑기만 한 손.

“루리 양을 어쩌다가… 찾게 되신 건가요?”

“…….”

“답하기 어려운 질문인가요?”

“…아닙니다. 르페브르에는 언제나 많은 신세를 진 로시에가 아닙니까.”

로시에 공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넘겼다. 주름이 도드라지게 보였다.

“일전에, 대신전의 흔적에 기억의 수반이 온전한 상태로 있다는 군부의 연락을 받았습니다.”

“……?”

“기억의 수반은 본래 로시에 가문에서 개발한 성물이니, 폐기물이 아니라 멀쩡한 것이라면 로시에에서 회수하는 것이 맞지요. 그래서 제 아들들과 기사들을 파견했는데….”

로시에 공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거기에서 루리를 발견했습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블란데아의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그럴 리가 없다.

이십 년 전, 괴수들 때문에 멸망한 곳은 서부였다.

루리 로시에가 실종된 곳도 서부였고. 로시에 영지와 붙어 있는 곳.

작중에서 루리는 멸망한 서부 인근 마을에서 평민으로 지내다가 군부로 흘러 들어간다.

로시에 영지도, 멸망한 서부도, 군부도, 폐허의 유적도 전부 붙어 있다.

루리는 로시에 공에게 발견되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그 부근을 벗어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저런 몰골로, 대신전의 흔적에서 발견이 돼?

그게 말이 된다고?

저게 루리 로시에가 맞다고?

이 세계의 여주인공이 정말로 맞다고?

“영애?”

블란데아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거의 뛰듯이 걸어 루리가 누워 있는 간이침대 앞에 도착했다.

“아, 아가씨. 왜 그러시는….”

누구의 목소리도 블란데아의 귀에 파고들지 않는다.

그녀는 길을 잃은 아이처럼 루리 로시에를 멀거니 바라보았다.

창백하고 초췌한 안색의 여주인공.

천재적인 성검 실력은커녕, 나이프 하나 제대로 들지 못할 것 같은 빈사 상태의 로시에 영애.

그런데도 그녀의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은 분명한 백금색이다.

의사인 아실이 루리의 동공을 한 번 뒤집자 분홍색 눈동자가 희멀겋게 언뜻 보였다.

“루리 로시에 양.”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루리 로시에 양.”

블란데아 르페브르의 돌발 행동에 로시에 공조차 입을 다물고 마른침만 삼켰다.

그때였다. 의사들의 표정이 무섭도록 굳었다.

루리 로시에가 발작하듯 몸을 떨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다량의 피를 왈칵 토하자 몇몇은 비명마저 질렀다.

“매, 맥박이 느려집니다!”

“박하 잎을 태워서 가져와!”

“제기랄, 안 됩니다! 위험합니다!”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집사와 사용인들은 비명을 삼키며 두 손을 맞잡았으며, 로시에 공은 참담한 얼굴로 얼굴을 감쌌다. 손가락 사이를 타고 채 숨기지 못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십여 년 만에 되돌아온 딸이 죽는 모습을 봐야 하는 심정이 얼마나 괴로울지 누구도 쉬이 짐작할 수 없었다.

블란데아는 그저 가만히 서서 루리를 응시했다.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몰골을 하고서, 이토록 불러도 아무런 대답도 되돌려 주지 않는….

멸망한 신전에서 발견된 여주인공.

곧 죽을 게 분명한 이 세상의 주인공.

일생을 믿고 걸어왔던 이정표가 실은 가짜라고.

세계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 같다는 기분이 몰아친다. 끔찍했다. 발밑이 꺼지는 듯한 두려움에 블란데아가 가볍게 휘청거렸다.

문득 눈앞으로 흔들리는 짙은 금색 머리카락.

신관은 이 머리카락을 잘라 괴수를 막아 냈다.

헥토르는 이 머리카락으로 괴수에게 대항할 수 있는 신의 물건을 만들어 냈다.

청색 가호는 오직 여주인공과 연관된 이들에게만 나타난다….

깊은 혼란. 뇌가 엉망으로 일그러지는 기분이었다.

완연히, 그러나 확연히 죽어 가는 루리에게 블란데아의 체온이 잠시 닿을 듯하다가 떨어졌다.

“……?”

르페브르 의사들의 표정이 변한 것은 직후였다.

루리 로시에의 호흡이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안정을 되찾았기 때문이다.

‘방금….’

그들이 평범한 의술의 소유자였으면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놓쳤을 변화였다.

그리고 르페브르의 이능에 매료되어 있는 의학자가 아니었다면 바로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고.

“브, 블란데아 아가씨?”

“잠시, 잠시만 됩니다.”

블란데아에게 급하게 양해를 구한 의사가 그녀의 손을 잡아 루리 로시에의 이마 위에 갖다 댔다.

이윽고 두 의사의 눈이 동시에 커졌다.

“이게 대체 무슨….”

“무슨… 무슨 일이오?!”

로시에 공이 젖은 얼굴로 서둘러 달려와 물었다.

아실과 라샌은 어안이 벙벙한 기색이었으나, 입을 꾹 다물었다.

“로시에 공. 이건 저희 가주님과 자세히 이야기를 좀 더 나누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내 당장 채비하리다!”

실리와 계산에 빠른 로시에 공은 아무것도 캐묻지 않고 서둘러 라샌과 함께 응접실을 나갔다.

아실이 블란데아를 보며 말했다.

“아가씨. 방금… 로시에 양의 맥박이 정상으로 팔딱였습니다. 아셨지요?”

“…….”

“아무래도 르페브르 특유의 이능이 이 영애에게 영향을 끼친 것 같은데, 곧 죽어 가는 환자를 낫게 했다는 경우는 생전 처음 보는 것이라….”

블란데아는 아무 말 없이 루리에게 닿았던 손을 내려다보았다.

죽어 가는 환자를 낫게 해?

그런 것보다는.

‘아주 거대한 오염 물질을 정화한 것 같은 기분이었는데….’

멍하니 내려다보는 손바닥 위로 단단한 손이 겹쳐졌다.

“아실이라고 했나?”

“예, 총사령관님.”

“내 약혼녀가 언제까지 필요하지?”

“예?”

이게 또 무슨 말이지?

두 분이 결혼을 하시나?

처음 듣는 얘기인 건 둘째 치고, 아가씨는 우리 아가씨인데 왜 벌써부터 소유권을 주장한담?

하지만 의사의 안목으로 보아도, 저 총사령관은 키가 크고 몸이 아주 탄탄한 근육질인 것이, 창백해 보이는 블란데아에게 쓸모 있는 기둥이 될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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