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군부령의 방식-(29) (140/190)

“각하께서 저쪽을 보고 눈이 돌아가신 거였구나.”

멀리서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라파엘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쪽’에 해당하는 녀석은 당연히 힐드온 케트펠이었다.

녀석은 이 뜻밖의 상황에 당황한 듯, 표정이 굳어 있었다. 긴장할 대로 긴장한 눈치였다.

특히 방금 전까지 블란데아의 손이 얹어져 있던 팔이 갈 곳 잃은 아이처럼 허망해 보였다.

라파엘은 저 녀석의 인적 사항을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다. 이런 대규모의 연회에 말쑥한 차림으로 참석한 건 이번이 처음일 거라는 사실도.

그런데 첫 연회부터 이런 어마어마한 일에 휘말렸으니….

기절하지 않은 게 용했다.

‘왕비가 오히려 기절을 하겠는데.’

에스핀 왕비는 계산을 잘못했다.

슐로이츠가 르페브르라는 가문 때문에 블란데아와의 혼인을 이어 가려는 줄 안 모양인데, 우스운 착각이 아니던가.

설령 블란데아가 거지 출신 고아였어도 슐로이츠는 상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떻게든 그녀를 프로키온 부인으로 만들었을 거였고.

르페브르가 중요한 게 아니라, 블란데아가 중요한 것이었으니까.

‘멋대로 파악한 게 실책이지.’

에스핀 왕비는 안 그래도 활활 불타는 산에 기름을 들이부은 모양새다.

평화로운 왕도에서 일생을 우아하고 안전하게 보내는 고귀한 왕족이라고 할지라도 제 꾀에 당할 때가 있는 거라고.

라파엘은 속으로 비난하며 하릴없이 웃었다.

옆에 있던 아그네스가 라파엘의 어깨를 마구 흔들었다.

“경, 경! 정신 차리십시오! 아니, 우십니까?”

“안 울어….”

라파엘은 어느새 젖어 있는 눈가를 힘없이 닦아 냈다.

“다음 달까진 블란데아 사령관님에게 말해 줄 생각이 없다고 하시더니만….”

슐로이츠가 블란데아를 프로키온 저택에 한 번도 초청하지 않은 이유가 저것 때문이다.

결혼 준비로 몹시 바빴기 때문이다.

슐로이츠의 부하인 동시에 프로키온 공의 실질적 보좌 가신인 라파엘 클로비스는 덕분에 아주 바빴다.

블란데아에게 들키지 않고 숨어서 결혼을 준비해야 했던 시간들을 회상하자 다시금 설움이 북받쳤다.

결혼식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블란데아에게 들킬까 봐, 책상 밑에 쪼그려서 닉이 보내온 편지를 읽던 지난 나날….

그나마 결혼 준비로 잠을 극도로 줄인 게 슐로이츠라는 사실이 라파엘로 하여금 투덜거릴 마음조차 사라지게 만들곤 했지만.

지금도 그랬다.

슐로이츠는 벌써 몇 번째, 블란데아를 내려다보았다. 시선을 떼지 못했다.

왕비의 얕은수 때문에 불쾌해 보이면서도, 블란데아를 내려다보는 눈빛은 정말로 살아 숨 쉬는 사람처럼 보이니 뭐….

어릴 적, 생도 숙소 침대에 처박혀 시든 꽃 한 송이나 하염없이 쥐고 있던 그 슐로이츠가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정신이 흐릿하게 나간 것 같은 모습을 보아하니, 저 녀석은 실력은 대단한데 얼마 못 가 스스로 말라 죽어 버리겠구나 싶던….

라파엘이 어깨를 으쓱했다.

‘그래. 내가 다 이해해야지, 어쩌겠어.’

***

“정말 서운해요.”

나는 이마를 일그러뜨리고 말했다.

“왜 두 분 다 저한테 말씀을 안 하셨어요?”

아버지는 헛기침을 했고 어머니는 찻잔을 기울이셨다.

“제 결혼인데 저만 모르고 있는 게 말이 돼요?”

두 분 표정에 공통점이 있다면 아기들의 소꿉놀이를 지켜보는 어른들처럼 뺨이 씰룩거린다는 점이었다.

찻잔을 내려놓은 어머니가 가슴에 한쪽 손을 올리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네 약혼자가 말을 하지 말라는데 어떡하니?”

“약혼자요? 전 약혼식을 한 적도 없어요.”

“그럼 역시, 프로키온 공에게 약혼식부터 하자고 할까?”

“당장 두 달 후 결혼인데 약혼식을 이제 하자고요?”

유난도 그런 유난이 없을 것이다.

게다가 약혼식도 준비가 제법 까다로웠다. 그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갑자기 눈앞이 아찔했다.

‘스케줄이 안 될 것 같은데?’

왁왁 떠들던 내가 입을 다물고 조용해지자 어머니가 살며시 웃었다.

“블란데아. 우리가 듣기로는 네가 군부에서 맡은 일이 너무 과하다고 하더구나.”

“음….”

“결혼식 준비를 해야 한다는 얘기까지 들었으면 네 성격에 손을 놓고 있겠니?”

“안 그래도 넉넉히 자지 못한다던데 그 수면 시간마저 반으로 줄였겠지.”

“네가 고생하면 우리가 걱정할 테니 자기가 알아서 다 준비하겠다는 총사령관의 말을 어찌 모른 척할 수 있겠어.”

“너를 고생시킬 수 없으니 잡다한 준비는 본인이 하겠다는 말이 어찌나 흡족한지….”

“걱정하시는 거 맞죠?”

나는 의심스러운 어조로 캐물었다.

“흐뭇해 보이시는데요. 아니, 즐거워 보이시는데요.”

두 분이 나란히 헛기침을 했다.

***

휴게실에서 나오자 슐로이츠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곁에는 에스핀 왕비가 붙여 준 게 분명할 시종이 둘이나 있었다.

개중 한 명은 입고 있는 재킷의 색깔이 다른 걸로 보았을 때, 최소 부시종장은 될 높은 직급 같았다.

그들은 척 보기에도 안절부절못하며 슐로이츠에게 무어라 말을 걸고 있었는데, 내가 문을 열고 걸어 나오자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꾹 다물었다.

나를 본 슐로이츠가 한쪽 손을 들어 그들을 물렸기 때문이다.

“블란데아.”

내 쪽으로 걸어온 슐로이츠가 손을 내밀었다.

어머니와 아버지가 바로 시선을 교환하며 웃으시는 걸 보니 확실해졌다.

두 분은 나와 슐로이츠가 함께 있는 게 꼬꼬마들의 연애 사업처럼 재미있으신 모양이었다.

슐로이츠가 객관적으로….

부모 마음에 들어차는 신랑감이긴 하지. 사실 왕국의 그 어떤 부모도 슐로이츠를 사윗감으로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그의 팔에 손을 올리고 함께 걸었다.

“화가 좀 풀렸나?”

“화가 난 게 아니라 기가 막혔던 거야. 도대체 어느 신부가, 팔려 가는 것도 아닌데 자기 결혼식 날짜도 모르고….”

“알면 이제부터 어쩌려고.”

“나도 준비해야 할 게 산더미잖아?”

“블란데아 르페브르.”

슐로이츠가 희미하게 이마를 일그러뜨렸다.

“확실하게 말해 두는데, 정 결혼식 준비를 함께하고 싶으면 복귀하는 대로 청색 가호 판별자들한테서 손 떼.”

권유가 아닌 명령이었다. 뜻밖의 얘기에 나는 당황해서 눈을 깜빡였다.

“가호 때문에 네게 배정된 업무량은 이미 아슬아슬하고, 나는 네 상관으로서 더 이상의 과로는 허락할 생각이 없어.”

“내가….”

이미 우리는 대연회홀에 가까이 들어섰던 터라, 귀족들이 많았다. 하나같이 귀가 쫑긋 세워져 있는 것도 보였고.

난 일단 총사령관을 향한 품위와 예의를 지키고자 어조를 바꿨다.

“제가 과로를 하고 있다면 경께서는요?”

나는 어머니가 결혼식 준비를 도맡아 해 주고 계시겠지만, 프로키온은 사정이 다르다.

닉이 아무리 솜씨 좋은 집사라도 그만큼 중요한 일을 혼자 결정할 수 없을 텐데.

이 남자는 잠을 자기는 하나?

“경이 더 과로를 하고 계시지 않나요?”

철저히 사실에 근거한 의문이었다.

문득 슐로이츠가 내 허리를 두 손으로 잡아 힘 있게 들어 올렸다.

깜짝 놀란 내가 슐로이츠의 가슴을 짚는 것과 거의 동시에, 우당탕 소리와 함께 유리가 깨지고 쏟아지는 소리가 들렸다.

“죄, 죄송합니다! 발을 헛디디는 바람에!”

빈 잔이 가득 담긴 쟁반을 들고 바쁘게 움직이던 시종이 얼굴이 시뻘게져 연신 허리를 숙였다.

“괜찮으십니까? 어, 어디 다치지는 않으셨….”

“됐으니 치우기나 해.”

“예, 예!”

서둘러 다른 왕궁 사용인들이 달려와 엉망이 된 복도를 수습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야 벌렁거리는 가슴으로 슐로이츠를 돌아보았고, 입을 다물었다.

슐로이츠의 시선은 여전히 내게 붙박여 있었다. 꼭 나를 뚫어 삼킬 것 같은 강렬한 눈빛에 어쩐지 목이 탔다.

민망하기도 했다.

“내려 주세요.”

슐로이츠는 순순히 나를 내려 주었다. 방금 시종이 쟁반을 엎지른 곳과는 정확히 반대가 되는 곳이었다.

“…감사합니다.”

“보다시피 우린 이렇게 몸이 달라, 블란데아 르페브르.”

“…….”

“알아들었으면 멋대로 결혼식 준비에 손댈 생각은 하지도 마.”

주변의 귀족들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로 서로 얘기를 속닥이고 있었다.

우리 대화까지 완벽히 엿들은 건 아니겠지만, 방금 슐로이츠가 날 홱 들어 올린 건 다 보았겠지.

귀족들이 하나같이 우리에게 한껏 귀를 기울이고 있었으니, 결혼 준비에 대한 얘기도 들은 이들이 있을 거고….

어쩐지 귀가 빨개지는 기분이었다.

몸이 다르다는 슐로이츠의 말을 나만 이상하게 들었을까?

내가 별다른 대답 없이 홱 고개를 돌려 버리자, 슐로이츠가 웃음을 터뜨리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귀가 조금 더 붉어졌다.

“블란데아 사령관님! 각하!”

홀에 들어서자, 우윳빛 대리석 기둥 뒤에 그림자처럼 붙어 숨어 있던 라파엘과 아그네스가 후다닥 튀어 나왔다.

말쑥하게 차려입은 그들이 왜 귀족들을 피해 대연회홀의 기둥 뒤에 숨어 있었는지는 뻔했다.

‘이것저것 캐묻고 싶어 하는 귀족들이 즐비하니까.’

슐로이츠가 폭탄 발언을 하긴 했다.

‘라파엘은 이미 알고 있는 눈치고, 아그네스는…. 아그네스도 얼떨떨해 보이네.’

그 역시 당장 두 달 후가 우리의 결혼식이란 사실은 일절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나만큼이나 놀란 것 같은데, 가여워라.

동병상련의 눈빛을 보내자 아그네스가 알아챈 듯 머쓱하게 웃었다.

시끄럽던 대연회홀이 잠시 정숙해졌다. 파티의 분위기를 잡는 부드러운 곡이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기 때문이다.

다음 춤곡이 나온다는 뜻이었기에 잘 차려입은 귀족들이 쌍쌍이 줄지어 플로어에 나오기 시작했다.

쨍그랑!

“로, 로시에 공!”

미혼 남녀들의 설렘으로 한껏 부풀어 있던 대연회홀에 비명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나 역시 시선을 움직였다. 멀지 않은 곳에서, 로시에 가주가 창백한 얼굴로 넘어져 있는 게 보였다.

그가 들고 있던 샴페인 잔을 깬 것 같았다. 평소 사람들의 시선을 많이 신경 쓰는 로시에 공이 했다곤 믿기 어려운 행동들.

로시에 공이 허겁지겁 대연회홀을 빠져나갔다.

“로시에 공께서 왜 저런대요?”

“아니, 아까 얼핏 들었는데 그 애가 살아서 나타났대요.”

“누구요?”

“왜 그, 어릴 때 죽었다던 로시에 공의 친딸 있잖아요! 루, 루… 아! 루리 로시에요!”

순간 등줄기가 곧추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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