힐드온이 재빨리 뛰어가기 시작했다.
‘하여튼 케트펠들은, 입단만 하면 동기들을 괴롭게 만드네.’
“르페브르 사령관님.”
턱에 잔뜩 힘이 들어간 케트펠 공이 이쪽으로 다가왔다. 눈에는 핏발까지 서 있었다.
“가문의 치부라 참 말씀드리기 민망하기 짝이 없으나….”
“…….”
“사령관님 같은 대귀족께서 힐드온 녀석을 챙겨 주실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제 손자지만 아주 심성이 음침하고 고약해 옆에 두면 안 되는 놈이지요.”
‘고약한 놈인 건 맞지. 얼마나 사고를 많이 치는지 셀 수도 없잖아.’
<미친 미인의 최후>에서 읽었던 힐드온의 과거가 생각이 났다.
힐드온은 아주 어릴 때부터 지속적인 학대를 받았고, 그 탓에 먹는 것이나 입는 것도 아주 곤궁했다.
제대로 돌봐 주는 이도 없었던 터라 아주 외로웠다고 회상되곤 했다.
어린 힐드온은 어쩌다가 줍게 된 다친 새 한 마리를 치료해 주며 몰래 키웠다.
‘하지만 다음 날 새 구이 요리가 힐드온의 눈앞에 놓였다고 했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새고기 구이 옆에는 개나리색의 깃털이 장식되어 있었다.
힐드온이 키웠던 새의 깃털 역시 밝은 개나리색.
‘아주 남자 주인공다운 과거야.’
불우하지, 불우해.
나는 케트펠 공에게서 시선을 거두지 않고 입을 열었다.
“본 사령관의 명령에 불복종하는 거야?”
“……!”
“당장 뛰어!”
조부와 나를 불안한 눈으로 번갈아 보고 있던 리안 케트펠이 허겁지겁 달리기 시작했다.
나는 시선을 옮기며 말했다.
“오늘 리안 케트펠 생도가 제대로 징계를 소화하길 바랍니다. 힐드온 케트펠 생도는 똑바로 소화해 낸 징계니까요.”
“…….”
“이렇게 공이 직접 인사까지 시킨 생도가 만약 턱없이 실력이 부족한 인재라면….”
씨알도 먹히지 않을 청탁을 받았다는 사실에 아주 기분이 좋지 않을 테니까.
일부러 흐린 말끝을 충분히 읽어 냈는지 케트펠 공이 주춤거렸다.
“물론, 7대 가문도 하지 않은 일을 케트펠이 감히 할 리가 없을 테지만요.”
케트펠 공이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결국 토해 내는 말은 없었다. 마땅한 답을 찾지 못한 것 같았다.
나는 산뜻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럼 살펴 돌아가시길 바랍니다. 케트펠 공.”
“자, 잠시만…! 르페브르 사령관님! 사령관님!”
***
“르페브르 영애라더니 품위라곤 하나도 찾아볼 수 없어!”
케트펠 공이 쾅 하고 책상을 내리쳤다.
“진정하십시오. 가주님.”
“하지만 군부는 사교계와 철저히 분리되어 있지 않습니까.”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구역입니다. 그렇게 군기를 잡지 않으면 오히려 생도들이 위험할뿐더러….”
케트펠 공은 결국 씨근덕대며 의자에 등을 기댔다.
듣자 하니 가신들이란 놈이 전부 은근히 르페브르 영애의 역성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르페브르 영애의 기품 없는 언행을 왕도 사교계에 퍼뜨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금세 사그라졌다.
사교계의 귀족들이 믿든 안 믿든 르페브르 영애에겐 조금의 타격도 없을 게 자명한 탓이다.
오히려 사교계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발휘하는 르페브르 부인이 노한다면 케트펠에만 역효과가 일어날 것이리라.
“뭐 그래도 설마 리안 공자님을 그리 굴리겠습니까.”
“맞습니다. 영애가 척 보기에도 가녀린 분이라는 건 들어서 알고 있는데….”
가신들의 말에 천천히 노기가 가라앉던 그때.
“가, 가주님! 큰일 났습니다!”
“왜 그러냐? 무슨 일이냐!”
설마, 르페브르 영애!
딱 봐도 보통 성격이 아닐 것 같던 그 시건방진 어린 것이 리안을 불구로 만들었다든지….
하지만 케트펠 공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왕실에서 사람이 왔습니다! 케트펠 공과, 공과, 그….”
우물거리는 목소리가 답답해 케트펠 공이 목소리를 높였다.
“뜸 들이지 말고 어서 얘기하거라!”
“와, 왕비님이 사람을 보내셨는데….”
이어지는 보고를 들은 케트펠 공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는가 싶더니 이내 털썩 쓰러졌다.
“가, 가주님!”
“가주님!”
“의사를 불러라! 어서!”
***
풍요제.
가을을 맞이하며 여는 라자크 왕실의 축제. 신년제, 건국제만큼은 아니었지만 제법 중요한 연회일이었다.
“오, 르페브르 영애.”
나는 상념을 깨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에스핀 왕비가 미소로 나를 환대하고 있었다.
“이렇게 와 주어 반가워요.”
“영광입니다. 왕비님.”
“군부에서의 일정이 몹시 분주하다고 들었어요. 내가 너무 욕심을 부린 게 아닐까 했는데….”
풍요제에 왕비가 직접 나를 초청한 건 의외이긴 했다.
“아닙니다. 왕비님. 손수 초청해 주셨는데 마땅히 참석해야지요.”
“이토록 정중하고 섬세한 데다가 아름답기까지 한 영애가 부디 좋은 신랑감을 맞이해야 할 텐데.”
의미심장한 말을 한 에스핀 왕비가 묘한 미소를 짓던 그때.
우렁찬 트럼펫 소리가 연회장을 가득 메웠다. 국왕이 입장한다는 뜻이었다.
인사의 의무가 없는 왕비를 제외한 모든 귀족이 국왕이 등장할 단상 쪽으로 몸을 돌렸다.
“풍요제를 맞아 여러분에게 새로 알려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소.”
의례적인 인사말로 끝나지 않자, 귀족들의 눈에 의아함이 들이찼다.
“케트펠 가문의 후계자를 왕명으로 승인하였기에 알리오.”
“…저게 무슨 말이에요?”
“멀쩡히 가주가 살아 있는 가문의 후계자를 왜 국왕 전하께서 결정하시죠?”
드문 일이었다.
가문의 어른이 모두 죽었거나, 혹은 가문에 빚이 너무 많은 경우가 아니라면 국왕이 직접 후계자를 임명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귀족들의 깊어진 의문은 이어지는 광경에 경악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힐드온 케트펠.
대부분의 귀족들은 이름까지는 모르고 있던 케트펠 가주의 손자였다.
다만 오늘 초청받은 케트펠 공이 오직 저 손자만을 대동해 왔다는 사실은 알음알음 알려져 있었다.
국왕, 파에톤 2세의 부름을 받고 단상 위로 올라간 힐드온 케트펠은 왕비 앞에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묘한 미소만 짓고 있는 에스핀 왕비는 힐드온 케트펠의 머리와 양어깨를 장갑을 낀 손으로 한 번씩 짚었다.
일련의 의식을 모르는 귀족은 없었다.
힐드온 케트펠이 국왕의 사생아라는 뜻이었으니까.
공식 석상에서 국왕의 사생아가 왕비의 인정을 받은 적은 여태껏 한 번도 없었다.
“그럼 케트펠의 후계자 자리도….”
“국왕 전하께서 사생아니까 직접….”
“하지만 케트펠 가문에는 멀쩡한 후계자가 둘이나 있지 않았나요?”
“이미 국왕 전하께서 마땅히 보상을 약속하셨겠죠.”
“아무리 그래도 본인의 가문을 이어받는 것만 하겠어요?”
“케트펠이 아주 쑥대밭이 되었겠는걸요?”
“하지만 생판 모르는 남더러 가주 자리를 넘기라는 것도 아니고, 케트펠 공의 손주는 맞답디다. 뭐가 문제겠습니까?”
나는 이마를 찡그리고 이 상황을 지켜보았다.
‘왜?’
작중에서 힐드온 케트펠은 끝까지 국왕과 닿지를 못하는데.
이젠 케트펠 차기 가주?
당연히 말이 안 되는 얘기다.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어긋나서, 갑자기 힐드온이 공식 석상에서 에스핀 왕비에게 정식으로 인정을 받나….
‘아니, 잠시만. 혹시….’
왕비에게 힐드온이 필요한 어떤 이유가 생겼나?
오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왕비는 참석한 공주들 대신 나를 힐드온 케트펠의 춤 상대로 어떠냐고 국왕에게 웃으며 물었고, 왕비의 측근들이 좋은 생각이라고 떠밀었기 때문이었다.
나와 힐드온에게 왕실의 귀한 샴페인을 맛보게 해 주었으며, 사람들에게 인사를 시켰다.
‘…왕비가 나를 힐드온과 혼인시키고 싶으신 모양인데?’
내가 르페브르라는 대가문에 속해 있으니, 왕비의 마음대로 혼사를 밀어붙이진 못하겠지만 한 나라의 왕비로서 의견은 충분히 피력한 셈이었다.
멀리서 보니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귓속말을 나누고 계신 게 보였다.
에스핀 왕비가 이렇게 대놓고, 왕비의 입지와 의미가 가장 중요한 풍요제에서 힐드온과 나를 붙여 놓을 줄은 상상도 못 하셨겠지.
두 분은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의논을 하고 계신 것 같았다.
힐드온은 그답지 않게 내내 당황한 기색이었다. 아까 춤을 출 때는 아예 돌처럼 굳어 내 허리를 잡았고, 나와 같은 샴페인을 마실 때는 잔을 들고 있는 손이 조금쯤 떨리기까지 했다.
‘얘도 눈치를 슬슬 챈 것 같은데?’
그때였다.
문가가 어수선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많은 귀족이 참여했으니, 웬만한 소동으로는 어림도 없는데 말이다.
시선을 그쪽으로 옮긴 나는 이윽고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건 어머니와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세상에, 프로키온 공 아닌가요?”
“오늘 공이 참석한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요?”
“이게 무슨 행운이에요!”
쩔쩔매며 슐로이츠를 따라 들어온 시종이 그를 곧장 가장 상석, 즉 에스핀 왕비가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프로키온 공.”
뜻밖의 손님에 에스핀 왕비의 미소가 조금씩 흔들렸다.
“오늘 초청 명단에 프로키온 공이 있는 줄 몰랐는데요.”
“초청장은 받지 못했습니다.”
슐로이츠가 왕비에게 공대를 써서 나는 내심 당황했다.
저 대단히 근사한 남자가, 국왕을 제외한 모든 사람에게 하대를 하는 건 그의 거의 유일한 단점으로 사교계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곤 했는데….
저러니 정말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신랑감으로 비추어지질 않겠는가.
“초청장이 없는데, 왕실 연회에 마음대로 참석하는 행위는 이 나에 대한 모독….”
차분히 말을 이어 가던 왕비의 입이 서서히 다물어졌다. 그녀의 시선이 꽂힌 곳에 모두의 이목이 쏠렸다.
슐로이츠의 정복 위에 달려 있는 라자크의 훈장 때문이었다.
“라자크의 훈장이 저거군요. 역사서에서만 봤는데.”
“저 훈장의 수백 가지 특전 중 하나가 그거라잖아요. 왕실 연회에 마음대로 출입할 수 있는 권한.”
수군대는 귀족들의 목소리들이 귓가에 박혔다.
에스핀 왕비의 미소에 실금이 갔다.
“잘 됐어요.”
가까스로 표정을 수복한 왕비가 분위기를 환기하며 말했다.
“오늘은 아름다운 젊은이들이 많이 참석했네요, 프로키온 공. 공이 없는 동안 르페브르 영애와 힐드온 공자가 두 번이나 춤을 췄는데 무척 잘 어울렸어요.”
주변을 둘러보며 가볍게 호응을 유도한 에스핀 왕비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춤을 세 번 춰야 인연이라는 말이 있죠. 이 아름다운 한 쌍이 남은 춤곡을 추는 동안 프로키온 공은 어디 보자…. 총사령관의 격에 맞게 공주와 함께 춤을 추는 게 어떨까요?”
‘힐드온과 세 번이나 춤을 추라고?’
어느새 놀라움도 잊고, 황당한 기분으로 왕비를 응시하던 나는, 이 연극의 주인공이자 귀족들의 시선을 죄 빨아들이고 있는 남자.
그러니까 슐로이츠 프로키온이 내 앞에 다가와 서는 걸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응시했다.
그가 힐드온의 팔에 올라가 있는 내 손을 빼냈을 때는 품위도 잊고 움찔 놀랄 뻔했다.
슐로이츠가 느긋하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블란데아 영애와 저는 두 달 후 결혼할 예정이니 그건 어렵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