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군부령의 방식-(27) (138/190)

“…….”

결국 나는 조금 더 부드럽게 거절했다.

“본 사령관은 바쁘니 뛸 거면 혼자 뛰어.”

“지금 한가하시잖습니까.”

“동기들을 불러서 같이 뛰든지.”

“다들 사령관님의 절반의 절반의 절반도 뛰지 못하고 쓰러집니다. 저한텐 모자랍니다.”

“그건 생도 사정이고.”

“…….”

“사령관이 시간이 남아도는 줄 알아?”

“지금 한가하시잖습니까!”

“이 건방진 놈! 머리 박아!”

몇 시간 후.

빗속에서 구를 대로 굴러 흙투성이가 된 힐드온이 들것에 실려 의무실로 왔다.

군의관은 나를 보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르페브르 사령관님. 이 녀석이 또 말을 듣지 않았습니까?”

“그러게 말이야. 그냥 기를 죽인 채로 뒀어야 했는데, 좀 후회되네.”

군의관이 힐드온 케트펠의 눈꺼풀을 뒤집어 보면서 말했다.

“사령관님은 군부에 꼭 필요한 좋은 상관이십니다.”

“그래? 이렇게 생도들을 굴리는데도?”

“예.”

“흠….”

하기야 이 미친 소설에서 적지 않은 미인들을 구하기는 했지.

나는 턱을 조금 기울였다.

“그런 것 같기도 해.”

***

티타니아 로시에는 아름답게 달랑이는 오파츠를 품속에 잘 매달았다.

그녀는 몇 안 되는 청색 가호 판별자.

가호 수련을 거듭한 덕에 이젠 전처럼 픽 쓰러지진 않았다. 부족한 체력은 여전했지만, 그건 차차 나아질 일.

“힐드온 케트펠 생도.”

“어. 티타니아 로시에 생도.”

블란데아 르페브르라는 공통된 상관을 모시게 된 둘 사이엔 약간의 유대감도 없었다.

그저 둘은 오늘 가호 수련 스케줄이 겹쳤을 뿐이었다.

티타니아와 힐드온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어쩌다 보니 정해진 일정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블란데아의 집무실에 도착해 버린 그들은 선객이 있음을 알고 멈춰 섰다.

“…….”

얇은 모슬린 커튼이 여름 바람에 휘날리는 창가, 자신들의 상관인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누군가와 함께 서 있었다. 그러니까, 잘못 본 게 아니라면 그는 슐로이츠 프로키온 총사령관임이 분명했고, 잠시 후….

티타니아와 힐드온의 얼굴은 나란히 새빨개졌다.

블란데아 르페브르가 그 총사령관에게 입을 맞추었기 때문이다.

눈을 돌려야 한다고 생각은 하는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생각지도 못한 광경을 목격한 탓에 두 다리가 돌처럼 굳어 버린 것이다.

두 생도가 나란히 숨을 참는 와중.

블란데아는 오래지 않아 입술을 떼어 냈다. 하지만 두 남녀 사이에는 입맞춤 직후에 느껴지는 열기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다.

공무 집행 중.

그런 딱딱한 표현이 더 정확할 분위기였다.

블란데아는 한쪽 손에 들고 있는 작은 소책자를 유심히 읽고 있었으며, 슐로이츠는 무심한 얼굴로 군복 소매 단추를 직접 채우며 일 얘기나 했기 때문이다.

“가호 일정을 그대로 이행해도 되겠나?”

“괜찮아.”

책자를 한 장 넘긴 블란데아가 말을 이었다.

“아까 군의관한테 보고를 들었는데 전처럼 요양이 필요한 판별자는 없다고 했거든. 다들 체력이 좋아서 다행이래.”

블란데아는 그 사실이 퍽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새삼 그녀가 청색 가호 판별자들의 직속 상관임이 되새겨지는 목소리였다.

웃음을 흘린 블란데아는 슐로이츠에게 한 번 더 입을 맞췄다.

이번엔 그의 뺨이라는 점이 달랐다.

슐로이츠가 블란데아의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제야 숨까지 참고 있던 티타니아와 힐드온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가호였구나.’

가호.

‘그런 소문이 돌기는 했지.’

최연소 총사령관인 슐로이츠 프로키온은, 받는 가호까지 남들과는 다르다는 이야기가 생도들 사이에서 떠돌아다니긴 했었다.

“슐츠.”

불현듯 티타니아는 깨달았다.

“가호를 몇 번이나 받았는데도 불편하지 않아?”

“글쎄. 난 유의미하게 느껴지는 변화가 없는데. 블란데아.”

블란데아는 가호와 소책자에 정신이 팔려 있는 것에 반해, 저 총사령관은 처음 본 그때부터 지금까지 줄곧 블란데아만 빤히 보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작은 디테일들이 눈에 들어왔다.

총사령관은 블란데아에게 키를 맞춰 주기 위해 허리까지 굽히고 있었으며, 한 팔은 그녀를 잡아 끌어당기고 싶은 듯했다. 조금의 간격을 두고 블란데아의 허리 위에 둘러져 있었으니까.

그 탄탄한 팔은 막상 그녀의 몸에는 미묘하게 닿지는 않았다. 덕택에 블란데아는 모르는 눈치였고.

“……?”

블란데아는 이번에는 아예 소책자를 호주머니에 넣고 슐로이츠의 뺨을 감싸 잡았다.

가호 얘기를 짧게 하더니 그녀가 그대로 그에게 입을 맞췄다.

하지만 이번은 가호가 아니었다.

블란데아에게 가호를 받는 내내, 손등에 입을 맞추는 행위를 제외하면 그녀의 몸에 손끝 하나 대지 않던 슐로이츠 프로키온이 그녀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내 블란데아에게 고정되어 있던 슐로이츠의 눈동자가 움직였다.

정확히 티타니아와 힐드온이 있는 쪽으로.

눈동자가 미세하게, 하지만 확실한 뜻을 담고 움직였다.

문 닫고 꺼져.

티타니아와 힐드온은 맹수에게 귀가 물어뜯긴 토끼처럼 그대로 홱 등을 돌렸다.

블란데아는 모르고 있는 게 맞다.

지금도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하지만 슐로이츠 프로키온은 이미 자신들의 시선을 알고 있었다.

어쩌면 처음 가호를 받을 그때부터….

두 명 모두, 이상할 정도로 가슴이 쿵쿵 뛰었다.

***

지겹게 이어진 비가 그치자마자, 군부에는 슐로이츠에게 보내는 선물들이 끝도 없이 도착했다.

다들 체면 하나는 무섭게 챙기는 귀족들이라, 무겁고 값비싼 ‘진짜’ 선물들은 전부 프로키온 성으로 보내고, 군부로는 우아하게 꽃이나 고서 따위의 선물들을 보내왔다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덕분에 총사령관 관저가 온통 꽃밭이 되어, 슐로이츠가 넌더리를 치기는 했지만.

‘그럴 만도 하지.’

보기 좋게 꾸며 놓은 것도 아니고, 평생 성검이나 잡는 준사관들은 그다지 미적 감각이 없는 탓에 발 디딜 틈도 없이 들여놓는 게 전부였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웃고 있는데 슐로이츠가 내게 꽃을 한 아름 떡하니 안겨 주었다.

“르페브르 저택은 온통 꽃으로 장식해 뒀던데.”

“어머니가 꽃을 좋아하시거든.”

“너도 좋아하잖아.”

품 안 가득 꽃을 안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와중에 슐로이츠에게 결혼을 넌지시 제안하러 온 귀족은 없는 것 같아서 의아했다.

꽃향기를 맡으며 집무실로 돌아왔을 땐 라파엘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블란데아 사령관님. 내일이면 신입 생도들이 도착할 겁니다.”

“알았어. 가호 판별 일정은 다 잡아 놨고…. 페니가 다른 말은 안 해?”

“변경된 일정은 없다고 하더군요. 가호 판별 일정도 예정대로 생도 입단식 다음 날부터 세 개 조로 나누어 두었습니다.”

슐로이츠가 대대적으로 군부 계급도 개편을 하면서, 몇 가지 일정이 추가되었다.

그중 하나가 신규 생도 추가 입단이었다.

‘원작에선 없던 장면이지.’

소설에선 슐로이츠가 계급을 개편하지도 않았으니까.

‘여기서 설마 갑자기 여주가 나타나진 않겠지?’

원작대로라면 내년 정기 신입 생도 입단 때 루리 로시에가 등장하는 걸로 나오니까.

자잘한 것들은 당겨지든 밀리든 별로 상관없지만, 모름지기 여주인공이란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법이다.

웬만해선 그녀가 내일 등장해 나를 당황시키는 일은 없기를 바랐는데….

다음 날.

내심 긴장되어 생도 입단식에 참석하였으나, 다행히 그 어디에도 루리 로시에로 추정되는 인물은 없었다.

신규 생도들의 명단은 이미 확인해 ‘루리’라는 이름이 없다는 걸 알았지만, 혹시나 몰랐기 때문이었다.

힐드온도 그렇고, 루리도 그렇고.

주인공이란 점 덕에 눈 색과 머리색이 특이해 곧바로 파악할 수 있다는 것이 새삼 다행으로 느껴졌다.

만약 둘이 평범한 갈색 눈에 갈색 머리였다면 바로 알기 어려웠을걸.

그 외의 특징점이라면 뭐.

엄청난 미인이란 것도 있고….

아주 순수하고 활발하다는 점도 있다.

입단하자마자 군부를 뒤집어 놓을 강력한 검파자라는 특징도 있고.

오파츠에서 눈을 못 떼는 생도들을 뒤로하고 집무실로 돌아간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건 뜻밖의 사람들이었다.

“케트펠 공?”

“아! 르페브르 사령관님.”

나는 눈을 깜빡였다. 케트펠 공이 환하게 웃으면서 다가왔다.

“이번에 제 손자 리안 케트펠이 특별 전형으로 입단하였지요. 잘 부탁드린다고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케트펠 공을 내가 있는 곳까지 안내한 준사관은 난처한 기색이다 못해, 어쩔 줄 몰라 하는 낯이었다.

“…르페브르 사령관님.”

‘딱 봐도 알겠네.’

힐드온 케트펠이 내 직속 휘하 생도인 걸 이미 안 케트펠 공이 어지간히 우긴 모양이었다.

유력 가문의 가주가 우겨 대니 결국 어쩔 수 없이 데려왔겠지.

입단식 당일에 이런 개인적인 인사는 암묵적으로 금지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때였다.

“르페브르 사령….”

힐드온 케트펠의 말이 중간에 뚝 끊겼다.

옆을 돌아보자, 평소와는 달리 눈이 조금 커진 힐드온 케트펠을 볼 수 있었다.

입단식에 기존 생도들까지 전부 참여하는 건 아니니, 케트펠 공이 여기까지 온 건 전혀 몰랐나 보다.

‘그렇다고 편지 같은 걸로 다정히 알려 줄 사이도 절대 아니니까.’

“허흠.”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힐드온 녀석이 제1 사령관님의 직속 생도가 되었다더니 정말인 모양입니다.”

케트펠 공이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 리안도 모쪼록 르페브르 사령관님의 휘하에 들어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습니다. 차차기 케트펠 공이 될 아이이니만큼 사령관님께 여러모로 분명히 도움이 될 놈이지요.”

은근한 어조로 말한 케트펠 공이 힐드온을 힐난했다.

“얼빠진 채 거기에 서서 무얼 하느냐? 쯧쯧.”

“…….”

힐드온은 걸음을 움직여, 내 앞에 서려다가 포기하고 뒤로 물러났다.

이미 내 앞에서 부끄러워하며 웃고 있던 리안이라는 놈이 뻗대며 자리를 내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와중에도 케트펠 공은 은근히 리안의 어깨를 두드려 주고 있었다. 그러니까, 내게 이쪽 편을 들면 된다고 은근히 신호를 주는 모양인데….

“건방진 새끼.”

순간 싱글벙글 웃고 있던 두 조손이 귀를 의심하는 표정을 지었다.

“생도는 기수도 모르나? 오늘 입단한 신입이 감히 서열도 모르고 본 사령관 앞에 서?”

“…….”

“아주 빠져 가지고.”

그들의 낯이 서서히 경악으로 물들었다.

“준사관!”

버럭 소리를 치자 뒤에 서 있던 준사관이 바로 긴장한 채 각을 잡고 섰다.

“예, 제1 사령관님!”

“리안 케트펠을 교육한 부사관 전부 연무장으로 집합시켜. 5분 준다.”

“존명!”

준사관이 바람처럼 사라지고, 케트펠 공은 노회한 귀족답게 무언가 잘못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금세 알아챈 느낌이었다.

서둘러 리안을 힐드온의 뒤로 내쫓듯 보냈으니까.

“리, 리안! 어서 사과드려라. 어서!”

“죄, 죄송합니다…!”

“힐드온 케트펠! 너도 빨리 사과드리지 않고 무엇 하느냐!”

하지만 힐드온이 굴하지 않고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있자, 케트펠 공이 들고 있던 지팡이로 힐드온의 발등을 쿡 내리찍었다.

언뜻 본 내가 더 아파서 미간을 슬며시 찌푸릴 정도였다.

“뭘 멍청히 서 있느냐?! 당장 사과를 드리라니까!”

“리안 케트펠 생도.”

“예, 예?”

“대답 불량.”

“예?”

“태도 불량. 복장 불량.”

나는 손에 들고 있던 지휘봉으로 리안 케트펠의 턱 아래를 쿡 눌렀다.

“큭!”

눈길을 옮겨 케트펠 공의 얼굴을 바라본다. 특유의 오만한 낯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예의까지 부족해.”

“……!”

그제야 케트펠 공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기 시작했다.

방금 내 말이 누구에게 향한 것인지 깨달은 눈치였다.

‘여기가 아직 케트펠 성인 줄 아나?’

군부는 철저히 슐로이츠가 지배하는 영역이다.

그리고 케트펠이면 뭐.

나는 르페브르인데?

하지만 당장 케트펠 공에게 ‘군부의 일에 참견하지 말라’고 얘기를 하는 건 다소 과한 대응 방식이었다.

케트펠 공은 눈치가 빠른 노귀족이니, 내가 힐드온에 대해 제법 알고 있다는 사실도 눈치를 채겠지.

정작 나는 <미친 미인의 최후>를 읽고 알게 된 것들이지만, 남들이 그런 사실을 알 리가 없다.

그저 힐드온 케트펠이 나라는 권력자를 잡아 약삭빠르게 미주알고주알 털어놨을 거라고 편하게 오해를 하고 격분하겠지.

“힐드온 케트펠 생도.”

“…예. 제1 사령관님.”

“오늘 입단한 신규 생도들 전부 연무장 뛸 준비 해서 집합시켜.”

순간 리안 케트펠의 두 눈이 커졌다.

“연대 책임이다. 시간은….”

아무래도 오늘 처음 입단했으니까. 허공을 한 번 본 나는 시간을 넉넉하게 주기로 했다.

“15분 준다. 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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