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군부령의 방식-(24) (135/190)

드러나는 진실들

대신전의 흔적에 간간이 남은 괴수들을 마무리할 화력과 병력들을 잔존시킨 후, 나와 슐로이츠는 왕도로 귀환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르페브르 저택으로 돌아가고 싶었지만, 훈장 수여가 명목이었기 때문에 나는 왕궁에서 며칠을 묵게 되었다.

전사자들에 대한 장례 예우는 왕실에서 전적으로 책임지기로 했다.

국왕인 파에톤 2세는 내 요청을 들어주었기에, 지금 내 옷깃에 달린 건 ‘페가이의 훈장’이었다.

붉은색 비단과 찬란한 황금으로 가득한 국왕의 공식 알현실.

기둥 사이마다 놓인 하늘색과 연노란색의 꽃들이 달콤한 향기를 내뿜었다.

나는 슐로이츠가 국왕에게서 라자크의 훈장을 직접 수여 받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이후 큰 규모는 아니지만 위로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춤을 추는 무도회까지는 아니어도 향기로운 술을 마시고 따뜻하고 영양가 높은 음식을 먹는.

에스핀 왕비가 준비해 놓은 것 같은 위로연은 확실히 적당한 규모였다. 넘치지도 않고 모자라지도 않으니 일국의 왕비는 아무나 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슐츠.”

“음?”

무료하고 조금은 나른해 보이는 표정으로 서 있던 슐로이츠가 허리를 조금 숙여 고갤 기울였다.

나는 턱을 조금 들어 올려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에스핀 왕비님이 공주들과의 혼인을 주선하시진 않던가요?”

“…대체 언제 적 얘기를 하고 있는 거야.”

“이스 공주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공주들과 만남을 가져 보라고 분명 말씀하셨을 텐데.”

“왕비는 그런 말 하지도 않았어.”

“안 했다고요?”

“그래.”

“그럴 리가 없는데….”

“너와 내가 결혼할 거라는 정보를 어디서 입수했나 보지.”

가능성 있는 이야기였다. 슐로이츠가 이마를 희미하게 일그러뜨리더니 말을 이었다.

“블란데아.”

“……?”

“왕비가 결혼을 주선하려고 한 게 언제 적 일인데 자꾸 언급하는 거야.”

빈정거리는 말투가 아니었다. 슐로이츠는 분명히 난감해하고 있었다.

나는 그가 왜 난처해하는지 순간 이해를 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나는 누구와도 결혼할 생각이 없었다고 했잖아.”

“알아요.”

“안다는 사람이 틈만 나면 공주들 얘기를 하지.”

“전 진짜 궁금해서 그런 건데요.”

“왜. 누가 ‘나와 공주들’을 같은 무리로 묶어 주던가?”

당연하지. 내가 읽은 책에서….

나는 미소를 지으며 다른 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아무래도 왕비는 르페브르를 몹시 신경 쓰니까, 책에서처럼 슐로이츠와의 혼사라는 거대한 야망은 포기하려는 모양이네.’

“블란데아.”

“네?”

“너는 아주 어릴 적부터 대체….”

내게 무언가를 물으려는 듯, 물끄러미 보던 슐로이츠가 내가 쥐고 있던 잔을 가져갔다.

“돌아가서 이야기하는 게 낫겠군.”

“…네?”

빼앗아간 잔 대신 새 잔을 쥐여 준 슐로이츠는 이윽고 원래 그가 있어야 하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나저제나 슐로이츠의 거취만을 주시하고 있던 귀족들이 서둘러 그에게 모였다.

평소였다면 내게도 귀족들이 적잖게 달라붙어야 했지만, 지금의 나는 표정이 터무니없이 좋지 않은 덕에 감히 다가오는 이들이 없었다.

슐로이츠가 바꿔 준 잔은 주스나 마찬가지인 아주 약한 백포도주였다. 기가 막힐 지경이었다.

‘누굴 아이로 아는 건지….’

픽 웃은 나는 이내 시선을 옮겨 힐드온 케트펠을 찾아냈다.

“아까 내가 한 말 기억나지?”

“…위로연에서 얌전히 있지 않으면 손가락 발가락을 다 분질러 버리시겠다던 말씀 말입니까.”

“잘 기억했네.”

“…….”

힐드온 역시 급은 낮지만 훈장을 가슴에 달고 있었기에, 임의로 위로연에서 빠뜨릴 수가 없었다.

와중에 나는 깨달은 것도 있었다.

‘이 녀석, 분명히 내 심기를 살피고 있어.’

내가 가라앉은 표정으로, 전사자들을 위해 묵념을 올리자 은근히 눈치를 보며 온종일 조용히 있었다.

심지어 힐드온은 위로연에서 술은 입에도 대지 않고 얌전히 주스만 마시고 있었다.

아까 오기 전, 왕궁에서 술을 한 잔이라도 마시면 가만두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덕분이었다.

‘좋아, 이대로 힐드온이 제발 얌전히 있기만 하면 돼.’

무사히 왕궁에서 빠져나가 군부로 되돌아가는 게 내 목적이었다.

‘내일 새벽이면 바로 돌아가니까.’

오늘만 조용히 넘기면….

“블란데아 르페브르 경.”

‘망했다.’

나는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동요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최대한 침착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국왕 전하.”

국왕, 파에톤 2세가 내게 다가온 것이다. 그가 묘한 표정으로 입을 열려던 찰나.

쨍그랑!

깨지는 소리가 대연회홀을 울렸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본 나는 낮게 신음을 흘렸다.

힐드온 케트펠이 들고 있던 주스 잔을 바닥에 떨어뜨린 것이다.

문제는 힐드온의 실수 따위가 아니라, 그놈의 눈빛이었다.

그는 국왕을 노골적으로 노려보며 이를 악물고 있었다. 힘이 가득 들어가 있는 턱.

“…….”

‘작중에선 끝까지 국왕과 힐드온이 제대로 마주치는 장면이 나오지 않는데….’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멱살을 쥘 것 같은 저 위험한 분위기. 만약 힐드온이 멋대로 군다면, 지금 이 위로연이 살풍경해질 게 분명했다.

나는 힐드온의 명치라도 칠 생각에 슬쩍슬쩍 걸음을 옮겼는데….

힐드온이 쥐고 있던 주먹을 서서히 풀었다. 여전히 이는 악문 채였다.

“……?”

내심 당황하는 것도 잠시.

국왕이 걸치고 있는 망토 자락이 비단 카펫을 스쳤다.

그는 뚜벅뚜벅 걸어와 힐드온의 손을 잡더니 툭툭 두드렸다.

“그래, 이렇게 얌전히 있어야지.”

“…….”

“아니면….”

국왕이 묘하게 웃었다.

“짐이 생도에게 실망하지 않겠느냐?”

“……!”

힐드온의 두 눈이 완전히 굳었다.

무언가를 암시하는 말.

오늘 처음 만나게 된 생도를,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이야기하는 기이한 어조.

‘알고 있구나. 힐드온이 자기 사생아라는 사실을.’

아까 전만 해도 열기와 분노로 파들거리던 힐드온의 눈가는 이제 완전히 얼어붙어 움직이지도 않았다.

왜?

어째서?

당신은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

그런 종류의 질문들이 힐드온의 낯빛 위로 수도 없이 스쳐 가는 것 같았다.

국왕은 조금 매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힐드온의 손을 툭 던지듯 내려놓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국왕 전하.”

“블란데아 르페브….”

그때였다.

“르페브르 경!”

국왕의 호명은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 같은 외침에 잘라 먹혔다.

“르페브르 경!”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국왕 전하께서 계시는 자립니다!”

“진정하십시오!”

만류하는 기사들을 몸으로 뚫고 들어온 이들은 다름 아닌 신관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허겁지겁 숨을 몰아쉬었다.

‘나를 왜 찾는 거지? 그것도 저렇게 다급하게?’

생각도 잠시.

“르페브르 경!”

신관들이 나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야말로 흥분한 황소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다만 그들에게 살의는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감지할 수 있었는데….

“……!”

눈 깜빡할 새였다.

팔이 홱 잡아당겨진 나는 당황해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국왕의 청록색 머리카락이 내 앞에 있었다.

‘지금 내 팔을 잡아당긴 건가?’

국왕 전하가?

내가 어리고 평범한 레이디여도 납득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나는 지금 군복을 입고 있는 사령관이었고, 국왕은 왕족의 정점인 군주였으니까.

방금 지켜야 하는 순위가 전복된 셈이었다.

‘왜? 신관들에게서 나를 지키려고? 무해해 보이는데 왜?’

얼떨떨해 있는 것도 잠시.

내가 당황해 있는 사이 국왕의 등 너머로 소동이 정리가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국왕에게 잡혀 있던 팔을 빼냈다.

국왕이 나를 뒤돌아보든 말든, 나는 아까 전 내가 서 있던 자리로 걸어가 똑바로 섰다.

“국왕….”

“전하.”

슐로이츠의 차가운 목소리가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제1 사령관이 현재는 영애가 아니라 지휘관이라는 사실을 직접 주지해 드려야 합니까?”

공손함이라곤 한 톨도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였다. 근처에 서 있던 귀족과 기사들이 다른 의미로 긴장하는 게 느껴질 정도로.

하지만 나는 안다. 아무 일도 없을 거라는 사실을.

작중에서 국왕은 슐로이츠가 얼마나 무례한 행태를 저지르든 너그러이 넘어가는 권력자였다.

지금도 그랬다. 국왕은 얼어붙은 분위기는 상관도 없다는 듯 웃고 있었다.

“르페브르 경이 어릴 적부터 원체 몸이 약했다 보니 짐이 저도 모르게 아이로 인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국왕이 슐로이츠에게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걸 묘사로 많이 읽긴 했는데 실제로 보니 더 의아하긴 했다.

정말로 철저한 실력주의자여서, 라는 평이 사교계에 지배적이긴 했지만.

그때였다.

“지금 뭘 하는 거지?”

슐로이츠의 목소리가 얼어붙은 연회장을 울렸다.

“지금 신관들을 끌고 가는 건가요?”

“왜 저러죠?”

이상한 광경을 목격한 귀족들이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근위대들이 신관들의 입을 막고 조용히 빠져나가고 있었으니까.

저건 반역자들을 조용히 처리할 때 근위대들이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며칠 전까지 갖은 고생을 하다가 함께 구출된 신관들에게는 결코 어울리지 않는 가학적인 방법이었고.

문득 대신전에서 전사한 참모의 목소리가 귓가에 너울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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