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황이 조금… 이상해 보이는데.’
국왕이 고립되었다는 ‘대신전의 흔적’에 도착하자마자 라파엘이 한 생각이었다.
대신전을 둘러싸고 있는 성곽들은 이미 반쯤 허물어져 있었다.
신과 신전이 번창하던 몇백 년 전에는 아름다웠겠지.
외벽마다, 혹은 천장마다.
신의 자비와 구원을 찬양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었을 테며, 어린 신관들이 밤낮으로 손수 닦았을 것이리라.
하지만 그도 짐작하는 과거일 뿐. 스러져 허물어진 건물의 흔적은 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모래알 같은 허무감을 느끼게 했다.
하지만 라파엘이 이질감을 느낀 것은 ‘방금 전’ 무너진 것 같은 성곽들이었다.
그 주변으로 우글거리는, 척 봐도 열 마리는 되어 보이는 수많은 괴수들….
괴수의 숫자 자체는 많은 게 아니었다. 적어도, 슐로이츠가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지만 고작 열 마리의 괴수가 저 둔탁한 성곽을 저렇게까지 무너뜨릴 수가 있단 말인가?
보고 체계에, 분명 무언가 문제가….
“컥!”
순간 들려오는 목이 졸리는 비명 소리에 라파엘의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는 바로 뒤를 돌아보았고, 바로 허리를 곧추세웠다.
슐로이츠가 이 사태를 보고한 근위 기사의 멱살을 잡아 올린 것이다. 라파엘은 빠르게 근위 기사에 대한 파악을 끝냈다.
‘현 근위대 소속. 상위 가문 출신. 후일 유력한 국왕의 자문관이 될 것으로 손꼽히고 있는 인재.’
고작 한 손으로 기사를 허공으로 잡아 들어 올리는 압도적인 힘도 힘이었지만, 무엇보다 슐로이츠의 두 눈에 어린 흉흉함이 가장 난폭했다.
숨이 막힌 근위 기사가 발버둥을 쳤다.
“큭….”.
쿵!
바닥으로 무자비하게 내팽개쳐진 근위 기사가 비명과 함께 몸을 웅크렸다.
“초, 총사령관님! 갑자기….”
군부에 속하지 않은 이들은 슐로이츠를 ‘각하’라고 부르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무지에 의한 것이니 그건 문제 될 일이 아니었다.
“정신 나간 새끼.”
슐로이츠는 군홧발로 바닥에 자빠진 근위 기사의 턱을 들어 올렸다.
배워 먹지 못한 용병이나 뒷골목의 건달이 연상되는 무례하고 천박한 행동에 왕실 기사단이 발끈했다.
“총사령관님!”
“근위대를 향한 예의를 부탁드립니다!”
“예의는 얼어 뒈질 예의야.”
순간 얼음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흘렀다. 차갑게 읊조린 슐로이츠는 발끝으로 턱 하고 귀족의 가슴을 거세게 걷어찼다.
“컥!”
“너희들 두 눈은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쓸데없이 굴리지 말고 이참에 뽑아 버리지 그래.”
왕실 기사단 중 몇몇은 이 자리에 또 있는 다른 권력자를 생각해 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르페브르 가문이 정결과 평화를 사랑하는 것은 유명했으니, 그녀에게 눈치를 주면 못 이기는 척 이 폭력적인 상황을 중재해 줄 것이라고 여겼지만….
어깨에 제1 사령관의 견장을 달고 있는 순금 같은 금발의 여자는 무표정하고, 조금은 지루한 기색으로 이 광경을 지켜만 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거대한 군부의 제1 사령관다운 각이 잡힌 자세. 흠잡을 곳 없는 냉랭한 태도.
말문이 턱 막혔다.
새빨간 눈동자 색깔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마음을 읽을 수 없는 피곤한 표정 때문인지.
오히려 저 총사령관보다도 냉정할 것 같다는 생각이 몇몇 기사들의 머리를 스쳤다.
“눈알이 박혀 있으면 똑바로 보고, 네 입으로 다시 지껄여 봐. 이곳을 침범한 괴수의 규모가 어떻다고?”
“……!”
바닥에 자빠져 있던 근위 기사가 허겁지겁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렇게 많은 괴수가 생겨난 줄 몰랐습니다…! 분명 제가 갔을 때만 해도 이렇게까진…!”
“라파엘 클로비스.”
“예, 각하.”
“이 새끼한테 군부에서 하루에 몇 번이나 유적지로 토벌을 나가는지 똑똑히 가르쳐 놔라.”
라파엘이 이를 갈며 웃었다.
“존명.”
모른 척 속아 넘어가 주기엔 이 자식의 수가 너무 얕았고, 현 비상사태를 지휘하는 이는 다름 아닌 군부의 총사령관이었다.
이 새끼는 더럽게 운이 없었으며, 다음으로 문제인 건 누가 봐도 본 병력이 감당할 수 있는 규모의 네 배가 넘어 보이는 어마어마한 숫자의 괴수들이었다.
‘아…. 어쩌면 오늘 저기서 죽을 수도 있겠는데….’
괴수에 대한 공포는 군부 기사들보다 왕실 기사단이 더 극심했다. 서서히 사태 파악을 하는 왕실 기사단들의 얼굴도 시시각각 굳어 가기 시작했다.
“증원 요청은?”
“도착하는 데 아무리 빨리 잡아도 사흘, 아니 나흘은 걸립니다.”
“그 안에 국왕 전하께서 무사하실 수가….”
엄중한 국법, 기사의 도리, 귀족의 의무에 의거해 그 누구도 저 무너져 가는 대신전의 흔적에서 뒷걸음칠 수 없다.
그제야 슐로이츠가 왜 아까 기사의 멱살을 잡아 내팽개쳤는지 모두가 이해하기 시작했고, 모두가 옆에 선 동료의 죽음을, 본인의 죽음을 걱정하기 시작했을 때.
“각하! 증원입니다!”
모두가 귀를 의심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사령관님의 명령으로 증원된 병력입니다!”
순간 짧은 환호가 나온 것도 잠시. 긴급한 상황임을 고려해 모두가 재빠르게 움직였다.
와중에 슐로이츠의 눈이 블란데아를 습관처럼 가볍게 훑었다.
이상한 일이다.
내내 무표정이었던 블란데아가 찰나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기 때문이다.
***
“제1 사령관님! 1월대를 비롯한 총 세 개의 대대가 증원 후 배치됐습니다!”
기사의 우렁찬 외침에 나는 이마를 찡그리며 고개를 돌렸다.
“디오스 이젤 경이 왔다고?”
“예, 맞습니다! 1월대는 유적 토벌 임무를 종료하는 즉시 합류했습니다!”
“피곤할 텐데…. 뭐, 알았어.”
어쨌든 군부에서도 1월대는 가장 강한 사단이었다. 1월대까지는 내가 마음대로 호출할 수가 없었는데 사단장인 디오스가 자의로 합류를 결정했다니.
‘좋은 선택이지. 이번 구출 임무가 끝나면 무조건 훈장을 받게 될 테니까.’
어쩌면 디오스가 출세에 대한 천부적인 감각이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던 찰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기사를 뒤로하고 서둘러 걸어가, 멀지 않은 곳에서 두리번거리고 있는 남자의 손목을 홱 잡아당겼다.
“…생도가 왜 여기 있어?”
당혹감이 어린 두 눈. 힐드온 케트펠이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나를 보았다. 날 따라온 기사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제1 사령관님! 증원 명단에 힐드온 케트펠 생도 역시 포함되어 있습니다!”
“내가 언제 이런 햇병아리까지 보내라고 했냐고! 경은 출출하다고 파종할 씨앗까지 삶아 먹을 거야?”
“아닙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주변을 재빠르게 둘러본 나는 이를 꽉 깨물었다.
“지금 내보낼 수도 없잖아!”
“시정하겠습니다아아악!”
당연했다. 여기는 이미 을씨년스러운 대신전 내부였으니까.
긴급 사태이니만큼 슐로이츠의 명령을 기다릴 시간도 부족했다.
대신전 안에서 국왕이 말 그대로 ‘죽어 가고’ 있기 때문에 한시라도 빠른 구조가 필요했다.
나 역시 이곳까지 오면서 말에서 제대로 내리지도 못하고 구출 작전을 머리에 인지해야 했으며, 아까 전 슐로이츠가 그 정신 나간 귀족 놈의 가슴을 발로 짓누른 이후 거의 곧장 움직여야 했다.
따라서 지금 나는 먼지가 풀풀 날리는 고요한 대신전 안이었다.
‘원작에선 여기서 군부령 기사며 왕실 기사며 어마어마하게 죽는데.’
무엇보다 남주고 여주고 여기선 나오지도 않는다고. 왜 여기까지 기어 들어와서….
“생도는 알아서 빠졌어야지! 몸 상태도 똑바르지 못한 게! 생도가 그렇게 쓸모 있는 줄 알아?”
“제가… 오고 싶다고 했습니다…!”
“뭐?”
힐드온 케트펠이 열중쉬어 자세로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흡.”
나는 힐드온 케트펠의 얼굴을 찐빵처럼 한 손으로 쥐어 눌러 입을 틀어막았다.
‘국왕이 죽게 생겼다는 말을 어디서 듣고 눈이 돌아갔나 보네.’
작중에서 이놈은, 여주가 오기 전엔 한 달의 절반 이상을 감옥에서 근신형이나 받던 놈이다. 그래서 그땐 듣지 못했을 거고….
‘요즘은 근신형 안 받은 지도 좀 됐으니까 어쩌다 들은 모양이지.’
그러니까 나오고 싶다고 난리를 친 게 틀림없다.
“힐드온 케트펠 생도. 생도는 내 곁에 붙어 있어. 혼자 개인 행동한다고 조금이라도 나대면 죽어.”
나는 눈에 힘을 주고 슐로이츠처럼 협박했다.
“돌아가는 즉시 팔다리를 전부 다 잘라 버릴 줄 알아.”
“…….”
“산 채로 썰어 버리겠다고. 알겠어?”
“…알겠습니다.”
특히 국왕을 보고 눈 돌아가 뛰어가다가 죽어 버리기라도 하면….
‘난 이 세계의 결말도 모르는데 남주가 덜컥 죽어 버리면 무섭잖아.’
“국왕 전하는 현재 대신전의 가장 안쪽, 중앙 건물의 심장부에 계신 것으로 추측됩니다!”
“저희가 할당받은 곳은 23번째 구역입니다.”
‘3km쯤 되네.’
약 3km나 되는 긴 복도와 방을 전부 수색하고 지켜야 한다는 소리였다.
대신전은 지나치게 광활했고, 촘촘하게 구역을 나누느라 라파엘 역시 나와 멀지 않은 곳을 떨어져 맡게 되었다.
“전방 500m 앞에 괴수입니다!”
힐드온 케트펠은 생각보다 더 침착하게 성검을 썼다. 불같은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는 차분한 대처였다.
‘이런 걸 보면 확실히 남주는 남주인데….’
문제는 내가 작중 최강자이자 불세출의 천재인 슐로이츠와 다니다 보니 저 정도의 천재는 시시해 보인다는 소리였다.
“제1 사령관님. 이렇게 큰 대신전이 왜 몰락했을까요?”
“신의 보호를 받는다던 신관들이 괴수들에게 대부분 당했으니까 그러지. 더 이상 믿을 가치가 없잖아. 신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 수 없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
“그럼 왕족들의 대부분이 괴수에게 당하면 왕실도 몰락합니까?”
쿵, 털썩.
힐드온의 말이 끝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멀지 않은 곳에서 괴수가 쓰러졌다.
나는 피 냄새에 이미 마비된 것 같은 후각을 의식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힐드온 케트펠은 딱 봐도 그다지 제정신이 아닌 걸로 보였다.
‘쟤가 지금 오파츠를 몇 개를 깼더라.’
나는 힐드온 케트펠의 눈앞에 손등을 갖다 댔다. 가호가 끝나자마자 아까처럼 힐드온의 턱을 쥐었다.
“왕실의 몰락은 곧 라자크 왕국의 멸망이야. 힐드온 생도.”
“…….”
“본 사령관은 아직 죽고 싶은 마음이 없고, 그렇게 되면.”
“…….”
“그 전에 본 사령관의 말을 더럽게도 듣지 않은 생도 한 명을 반드시 작살 내어 놓을 거야.”
“…….”
“어디 가서 입 함부로 놀리지 말라고. 생도는 내 책임하에 있으니까. 알아듣겠어?”
힐드온 케트펠이 당황스러운 얼굴을 하다가 이윽고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왜 내 말을 알아먹는 것 같지?’
얘를 그나마 진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슐로이츠와 여주인 루리뿐이었는데….
‘자기가 납득할 것 같은 말을 해 주면 알아먹는 건가? 거기에 내가 가호도 내려 줄 수 있으니까 존중해 주는 것도 있고?’
아니면….
‘혹시 본인 잘못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말 때문에 그러나?’
이 녀석도 어릴 적부터 할아버지를 비롯한 가족들에게서 몹시 학대를 받은 전적이 있으니까.
생각은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건물이 흔들렸기 때문이었다. 이백 년 가까이 방치되긴 했지만 대신전은 골조가 튼튼한 건물이었다.
“제1 사령관님! 괴수가 예상보다 더 많이 출몰해 왕실 기사단 쪽에서 감당이 어려운 모양입니다. 괴수들을 기둥에 부딪는 걸로 처리하는 듯합니다.”
“사령관님!”
“자리를 지켜! 구출 작전은 유지한다!”
“존명!”
증원군까지 데려왔는데 멋대로 몸을 피할 수 없었다. 군부 명예에 먹칠을 하는 행동이었으니까.
마찬가지로 쓸데없이 자존심을 부리다가 실종될 수도 없었기에 나는 가장 적당한 자리에서 기다리다가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이렇게까지 흔들린다고?’
꼭 누가 작정하고 흔드는 것 같지 않나.
대신전이 무너지길 바라고….
그때였다.
나는 힐드온이 닫힌 문 쪽으로 걸어가는 걸 보았다.
“사령관님. 안쪽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미약하게 들립니다.”
“……?”
“누군가 갇힌 게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