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군부령의 방식-(19) (130/190)

르페브르 저택의 정원은 아주 넓어서, 한 번에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는 건 무리였다.

미끈하게 뻗은 키 큰 나무들은 한여름의 햇볕을 부드럽게 쪼개 주었으며, 잔디밭 위에는 색깔을 맞춘 꽃들이 기하학적인 무늬를 그리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들풀의 생생한 냄새와 달콤한 꽃향기들이 섞여 꼭 꿈을 꾸고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새삼 어머니의 미적 감각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슐로이츠가 입을 열었다.

“넌 저 꽃을 좋아하는 모양이야.”

나는 시선을 옮겼다. 그가 턱짓으로 가리킨 곳에는 앨리스 꽃이 구획 가득 심겨 있었다.

그는 내 손을 잡은 채 그쪽으로 걸어가며 말을 이었다.

“군부의 네 집무실에도 이 꽃만 화병에 꽂아 놨잖아.”

“그야 좋아하긴 하는데….”

이 앨리스꽃이 아니었으면 3살 때 벌써 죽었을 테니까.

다만 나는 의구심이 들었다. 슐로이츠의 추측이 너무 정확했던 까닭이다.

“여긴 르페브르의 정원인데 어떻게 바로 짐작하는 거야?”

보통 모든 저택의 정원은 가문 안주인의 것이니까.

정원에 특정한 꽃이 바글바글하다고 해도 안주인의 취향이겠거니 짐작하는 게 통상적이고 일반적이다.

“넌 프로키온 성의 정원에도 장미만 한가득 심어 놨잖아.”

“…….”

“정원의 다른 부분들은, 그래. 르페브르 부인의 취향에 부합한다는 걸 알아보겠는데, 여기만 이질적이잖아.”

어머니는 정원을 꾸미는 걸 즐겨 하셨고, 또 대가문의 특성상 저택에는 언제나 각계각층의 손님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덕택에 르페브르의 정원은 늘 한 치 흐트러짐 없이 완벽했다. 지금도 꽃 한 송이 허투루 떨어져 있지 않는 것만 봐도 정원사들이 얼마나 신경을 쓰는지 알 수 있었다.

정원의 전체적인 조형도 왕궁의 정원 못지않게 대칭을 이루고 있었고.

‘내 얼굴만 계속 보는 것 같더니 용케 다 보긴 했나 봐.’

한 분야에서 극점을 찍으면 다른 쪽에도 이렇게 관찰력이 좋아지나?

조용히 신기해하는 사이, 슐로이츠가 턱짓으로 앨리스 꽃들을 가리켰다.

“넌 뭐든지 때려 붓는 걸 좋아하는 모양이야. 훈련도 그런 식으로 하더니.”

“…….”

“아슬아슬하게 가혹 행위를 하지 않는 것도 본래 성향이었군.”

“…….”

라자크 왕국의 귀족들은 우아하고 섬세한 취향을 최고로 친다. 칭찬으로 곁들일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지금 슐로이츠의 저 말인즉슨, 내 취향이 섬세하지 못하고 무식하다는 것처럼….

‘물론 슐로이츠가 나를 비난하려고 말하는 건 절대 아니겠지만.’

그래도 분명 놀리고자 하는 짓궂은 의도는 담긴 게 틀림없었다.

나는 슐로이츠를 노려보면서 말했다.

“프로키온 가주의 침실에도 장미꽃만 때려 부어 놓을 수 있어.”

“마음대로 해.”

슐로이츠는 순순히 수락해 나를 더 기가 막히게 했다.

“결혼하면 나는 네 침실에만 있을 거니까 상관없어.”

“…대낮부터 그런 품위 없는 말을 해도 되는 거야?”

“시간이 상관있나? 둘밖에 없잖아.”

슐로이츠가 아, 하면서 덧붙였다.

“아까부터 뒤에서 쳐다보고 있긴 해. 즐겁게 웃고 있던데.”

나는 홱 뒤를 돌아보았다. 슐로이츠의 말대로, 이번에도 창문 아래로 쏙 내려가는 머리들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결국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넘겼다.

***

그날. 늦은 밤.

르페브르 부인, 아네사는 뿌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택에 미혼 남성을 초청한 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몰라요.”

아네사는 아주 오래전부터 한 가지 꿈이 있었다.

정확히는 병약했던 블란데아가 서서히 건강을 되찾으면서 꿨던 꿈이다.

“블란데아의 구혼자들로 저택이 꽉꽉 찼다는 집사의 보고를 들을 때마다 곤란한 표정을 지어 보고 싶었는데 말이에요.”

블란데아는 빛나는 황금과 새빨간 루비로 만들어진 조각상처럼 대단히 아름다웠다.

무럭무럭 자라 성혼을 할 나이가 되면, 꽃다발을 들고 찾아올 구혼자들로 저택이 바글바글할 테니, 어머니로서 곤란하다는 한숨을 푹 내쉬어 보는 게 아네사의 로망이었다.

하지만 블란데아가 사교계에 얼굴을 제대로 비치기는커녕, 갑자기 군부로 입단해 버리겠다고 해서 흐지부지되었지만….

“토끼 수백 마리보단 제대로 된 포식 동물 한 마리가 낫지 않소.”

아네사가 웃음을 흘렸다.

하기야 정어리 떼는 수천 마리가 함께 있을지라도 한 마리의 상어 앞에서 도망치는 법이다.

“아까 총사령관을 열심히 괴롭히던데, 뜻대로 되었나요? 여보.”

“누가 품위 없게 손님을 괴롭혔다고 그러오?”

레너드가 시치미를 뗐지만 아네사는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요즘 누가 가문의 회랑을 구경시켜 줘요? 총사령관이 왕도 사교계에 잘 안 나온다고 너무 괴롭혔잖아요.”

“나는 총사령관이 왕도 사교계에 뻔질나게 나오는 성격이었어도 오늘 그를 데리고 회랑을 빙빙 돌았을 거요.”

“당신도 저번에 샤르트 공이 가문의 회랑을 보여 주는 바람에 지루해 죽을 뻔했다고 투덜거렸던 건 기억 안 나요?”

“나는 샤르트 공의 사위가 아니니까 엄연히 다른 이야기이지 않소?”

뻔뻔하기 그지없는 말이었다. 레너드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아네사. 아까 회랑을 돌 때 총사령관이 블란데아의 어릴 적 초상화를 갖고 싶어 하지 뭐요.”

“그래요?”

되묻던 아네사가 입술을 당겨 물으며 웃었다.

“총사령관이 블란데아의 언제 적 초상화를 갖고 싶어 하는지 짐작이 가네요.”

“바로 짐작이 간다고?”

“당연하죠. 레너드.”

어린 시절의 블란데아가 암흑 지구로 향했을 때였다. 그 당시의 소년 총사령관은 눈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했으니….

“그래서 화가를 불러 복제화를 제작해 프로키온 성으로 보내 주기로 했소.”

“결혼하면 관례대로 블란데아의 초상화를 어련히 하나 더 그려 보내 줄 텐데 급하기도 해라.”

타박하면서도 아네사는 그 얼음장 같다던 총사령관의 행동이며 태도가 너무 재미있어 견딜 수 없었다.

어디가 차갑고 어디가 무섭다는 건지.

가능하면 매주 총사령관을 저택으로 초청하고 싶었다.

“그렇게 즐겁소?”

“즐겁죠, 그럼. 왕국의 가장 대단한 신랑감이 첫사랑한테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데, 그 첫사랑이 내 딸이에요!”

성황리에 진행되고 있는 연극이나, 너무 잘 팔려서 구하기도 어려운 낭만 소설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과 무엇이 다르단 말인가.

사실 레너드도 별반 다르진 않았다. 그 역시 슐로이츠를 다른 용건으로 또 저택에 초청하려고 궁리하는 중이었다.

“역시 꿈은 오래 꾸다 보면 더 즐거운 형태로 반드시 이뤄지나 봐요.”

아네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말했다.

“이래서 꿈은 놓지 않는 게 중요하다니까요. 당신도 남매를 낳아 키우고 싶어 했잖아요.”

르페브르 가문은 아주 오랫동안 외아들만 태어나던 가문이었다.

오죽하면 라자크 왕국에선 오래된 속설까지 있었다.

신이 르페브르에 정화라는 강력한 이능을 준 대신, 둘째를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이었다.

아네사와 레너드는 차를 함께 마시며 뭘 핑계 삼아 다음 초대장을 보낼지 강구했다.

슐로이츠와 블란데아는 나흘을 더 머물렀다가 군부로 다시 향한다고 했으니, 저녁을 한 번 더 함께 먹자고 청할 만했기 때문이다.

***

“르페브르에서 프로키온에 초상화를 보냈다니?”

에스핀 왕비가 기가 막혀 되물었다.

“그냥 값비싼 그림이 아니고, 정말 초상화더냐?”

“예. 그림의 크기로 미루어 볼 때 누군가의 초상화인 게 분명하다고 합니다.”

초상화를 빠르고 완벽하게 복제하기로 유명한 화가가 르페브르 저택에 며칠 전 불려 가더니 나오지 않았다.

다른 가문에 초상화를 보낸다는 것은 그 자체로 이미 약혼 또는 그 이상의 관계를 약속했음을 뜻했다.

특히 두 가문에 결혼 적령기의 아름다운 남녀가 있다면, 더더욱.

에스핀 왕비는 깊은 허무감을 느꼈다.

“무릇 꽃들도 같은 색깔들끼리 한데 뭉쳐 피어나기 마련이라지만.”

에스핀 왕비는 지금 두 마리의 토끼를 나란히 놓쳤다.

그녀가 원했던 가장 완벽한 그림은 다음과 같았다.

이스 공주는 슐로이츠 프로키온과 혼인시키고, 로티스 1왕자는 블란데아 르페브르와 혼인시키는 것.

특히 몇백 년 만에 태어난 르페브르의 둘째가 어떤 가문의 공자와 결혼할 것인지, 사람들의 귀추가 쏠려 있었는데.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사람들의 기대와는 무색하게 왕도의 사교계엔 아예 얼굴도 비치지 않았다.

르페브르 부부가 그 어여쁜 둘째를 너무 귀하게 여겨,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게 틀림없는 거라고 쑥덕이는 입들도 많았다.

왕비인 에스핀도 같은 생각이었다. 르페브르는 하도 근본이 탄탄한 가문이라, 비록 왕비일지라도 마음대로 만남을 주선하는 것이 어려워 제법 골치를 썩였는데….

“이렇게 덜컥 총사령관하고 결혼을 하겠다고. 보아하니 이스도 총사령관에게 그리 관심이 없는 모양이고.”

이번 대 르페브르 부부는 자식들에게 정략혼 상대도 들이밀지 않았다. 덕택에 상류층 부모들 사이에서도 그들을 따라 하는 분위기가 생겼다.

바로 선대까지만 해도 어린 시절부터 약혼을 맺는 게 일반적이었는데 요즘은 그러지 않는 것만 봐도.

‘르페브르의 아이들도 원치 않는 상대와 약혼을 맺지 않는데, 내 자식들이 뭐가 부족하다고.’

다만 왕실과 르페브르의 관계를 좀 더 공고히 할 필요는 있었다. 총사령관과 덜컥 결혼을 해 버릴 것 같은 블란데아 르페브르가 제법 괘씸하기도 했고.

“로티스는 르페브르의 둘째에 대해 별 얘기를 하지도 않았지.”

로티스는 블란데아 르페브르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 사실이 묘하게 왕비의 자존심을 충족시켜 주었다.

그렇다면….

왕비의 머릿속으로 국왕의 적잖은 사생아들이 하나씩 스쳐 갔다.

개중에서 얼굴은 몹시 아름답되 가문 자체에 영향력은 끼치지 못하고, 그러면서 본 혈통은 나쁘지 않아 르페브르에 갖다 대도 반발이 없을 것 같은….

또한 블란데아 르페브르와 비슷한 나이대의 공자가 필요했다.

“당장은 없겠지만 뒤져 보면 또 한둘은 굴러 나오겠지.”

국왕은 이미 오래전 부부의 신뢰를 깨뜨렸으니까. 차갑게 냉소한 에스핀 왕비가 심복에게 국왕의 숨겨진 사생아를 찾아올 것을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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