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을 하고 왕도로 바로 출발해 버린다고?’
기가 막혔다. 나는 슐로이츠가 초청장을 받았으니 왕도로 올라갈 ‘준비’를 하라는 줄 알았다.
하지만 그는 내게 오늘 르페브르 저택이 있는 왕도로 올라갈 것이라고 ‘통보’를 했다.
정신을 차리니 나는 르페브르 저택으로 향하는 마차에 실려 있었다.
“정말 이래도 되는 일정이야?”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곧장 성실한 대답이 돌아왔다.
“됩니다. 블란데아 사령관님은 바로 처리해야 할 급한 일정이 없었잖습니까. 페니도 제법 능숙하게 일을 잘 처리하니 걱정하실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아니, 라파엘. 나 말고 슐로이츠 경 말이야.”
“아…. 각하를 말씀하시는 거였군요.”
라파엘이 어색한 얼굴로 웃었다.
“괜찮습니다. 일단은요?”
“…….”
슐로이츠는 역대 다시없을 총사령관이라는 위명에 걸맞게 군부에서의 일정이 아주 빡빡했다.
슐로이츠가 그동안 왕도에 잘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이유는, 그가 왕도에 별다른 흥미가 없기도 했지만 실제로도 굉장히 바빴기 때문이었다.
나는 슐로이츠의 보좌를 직접 한 적이 있었기에 그의 다소 끔찍하기까지 한 일정에 대해서 매우 소상히 알고 있었다.
물론 그때가 유독 바빴던 거라고는 해도 말이지.
‘알아서 하겠지만….’
문득 슐로이츠에게 매번 날아오던 아름다운 초청장이 생각났다.
자존심이 상하지 않을 기간을 아슬아슬하게 계산해 왕비가 잊지 않고 보내던 그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종이.
두꺼운 지면 위로 백단향이 은은하게 풍겨, 어린 귀족이라면 받기만 해도 장밋빛 꿈을 꾸게 할 그런 환상적인 편지였다.
‘매번 초청장에 답장도 안 하던 슐로이츠가 이렇게 왕도로 쉽게 온다는 사실을 알면 자존심이 바닥을 치겠는걸….’
물론 왕비가 슐로이츠와 르페브르 사이에 오간 편지를 알 리는 없지만, 그래도.
르페브르와 프로키온 사이에 합의된 결혼에 대해선 로티스 왕자에게서 전부 들어 이젠 분명히 알고 있을 테고.
내가 평범한 귀족 레이디였으면, 그래도 왕비는 슐로이츠가 재혼이라도 하길 바라며 은근히 밀어붙였을 텐데.
르페브르라면 왕비도 부담스러울 테니까.
***
덜컹.
한참 자고 일어났을 땐 어느새 마차가 왕도의 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얇은 커튼 사이로 땅거미가 내려앉고 있었기에 저녁이라는 사실은 짐작할 수 있었다. 성 밖이었으면 슬슬 야숙을 준비했을 텐데 이미 왕도에 도착해 그냥 달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무엇보다 내가 잠들어 있던 사이, 마차에 타고 있던 인원이 바뀌어 있었다.
라파엘이 아닌 슐로이츠가 앉아 있었으니까.
나는 맞은편에 앉아 있는 슐로이츠를 조심스럽게 훔쳐보았다.
그는 좌석 시트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잠이 든 것 같았다.
저 특유의 단정하고 곧은 자세는 타고난 걸까, 아니면 기사로서 오래 살아온 흔적 같은 것일까.
검은색 군복이 절대 퇴폐적이고 문란한 옷이 아니었음에도, 그가 입고 있으니 묘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실용적인 목적을 가지고 디자인을 통일한 군복인데, 입는 사람에 따라서 이렇게 분위기가 달라지는 건 신기한 일이었다.
슐로이츠의 몸을 빤히 응시하던 나는 이윽고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기 시작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 슐로이츠의 얼굴은 서늘하고 아름답다.
저런 얼굴과 저런 몸이 오직 한 명의 남자에게만 주어졌다는 사실은 반칙이다 못해 신의 농간처럼 느껴졌다. 심지어 그 남자가 역사에 다시없을 대단한 기사임을 감안하면 더더욱.
‘슐로이츠가 왕도 사교계에 흥미가 깊었으면 치정극이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졌을 텐데.’
그러고 보면 슐로이츠는 장성한 후엔 제대로 왕도 사교계에 모습을 보인 적도 없었다.
그나마 앳되던 시절, 엔리케 시에도를 찾겠다며 나와 춤 한 곡을 췄을 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지 않나?
어린 티가 미묘하게 묻어나던 그때에도 슐로이츠는 굉장히 수려하여 갓 데뷔한 레이디들이 정신을 못 차리던 모습이 생생했다.
***
“도대체 내 딸이 얼마 만에 집에 돌아오는지 모르겠어요. 블란데아가 좋아하는 음식으로만 준비를 해 놨는데 잘 먹을지….”
르페브르의 안주인인 아네사는 차분하게 웃고 있었지만 실은 몹시 기쁘고 들뜬 기색이었다.
“당신이 너무 그러면 블란데아가 도리어 집을 불편하게 느낄 수도 있소.”
“레너드. 그런 말을 할 거면 당신이나 그 정복부터 갈아입는 게 어때요?”
“흠흠….”
가주인 레너드는 일 년에 한 번 있는 국무 회의에서나 입을 법한 복잡하고 엄숙한 정복을 갖춰 입고 있었다.
굳이 이 시간에, 굳이 집에서.
“마님. 음식을 다시 데워 올까요?”
“자꾸 데우면 맛이 떨어지잖니. 미리 보내 놨던 하인이 돌아오면 그때 데우려무나. 스튜만 다시 끓이고. 그건 오래 끓일수록 맛이 좋으니까.”
“아가씨가 오랜만에 집에 오셔서 정말 기쁘신가 봐요.”
어릴 때부터 바깥에도 안 나가고 매번 집에만 있던 블란데아라 그런지 입단했을 때 가주 부부는 은근한 상실감을 앓았다.
“총사령관도 너무 궁금하구나. 엔리코르에게 듣기로는 ‘나쁜 놈은 아닌데 아무튼 마음에 안 드는 놈’이라던데.”
2층에 딸린 아름다운 테라스 너머로 여름밤 특유의 생생한 바람이 불어왔다.
이제나저제나 테라스만 바라보고 있던 아네사와 레너드는 여덟 대의 마차들이 르페브르의 정원으로 들어오는 걸 보고 동시에 안색을 환하게 밝혔다.
하지만 그도 잠시.
개중 마차 네 대가 떨어져 나가 다른 쪽으로 가 버리는 걸 본 가주 부부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아가씨!”
나는 하녀들의 열렬한 환대를 받으며 오랜만에 내 침대에 풀썩 누웠다.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너무 많이 먹은 탓에 배가 터질 것 같기도 했다.
이대로 잠들기보다는 아무래도 산책을 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나는 정원으로 나가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무식하게 꽃나무나 잔뜩 심긴 군부나 걷다가, 균형적으로 조형된 아름다운 정원을 보자 미약한 감동까지 몰려 왔다.
곳곳에서 빛을 발하는 수정등의 부드러운 불빛이 기분을 좋게 했다.
한여름의 밤하늘은 이미 어둡다 못해 별이 충분히 빛날 정도였다. 바람이 적당히 불어와 덥지 않은 게 가장 좋았다.
난 사실 의아했다.
‘오늘 바로 같이 올 줄 알았는데….’
슐로이츠는 내일 약속된 시간에 저택을 찾아오겠다며 마차에서 내렸다.
‘뭐지?’
얼떨떨했지만 슐로이츠는 나를 르페브르 정원에 데려다주고 정말 그대로 훅 떠나 버렸다. 사실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왕도에는 프로키온 저택이 따로 없잖아.’
왜냐하면 선대 프로키온 가주가 반역을 꾀하면서 국법에 따라 왕도의 프로키온 저택도 국고로 회수되었으니까.
“…저택도 없는데 어디에서 묵겠다는 거지?”
물론 사교철을 대비한 아름답고 안락한 타운 하우스들이 도처에 널렸지만 그래도 잠시 머물 거라면 르페브르 저택이 낫지 않나?
“아가씨.”
내 뒤를 따라오던 비너스가 되물었다.
“총사령관 얘기를 하시는 겁니까?”
“응.”
“프로키온 저택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얼마 전에 새로 샀다던데요.”
“새로 사?”
“예. 근접한 세 개의 저택을 한 번에 사서 전부 터 버렸다고 들었습니다. 제법 대공사였지요.”
“세 개를 한 번에…. 그렇구나.”
하기야 슐로이츠가 그 지위에, 그 계급에, 그 명성에 왕도에 번듯한 저택 하나 없는 게 더 이상하니까.
새 저택이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다음 날.
나는 일찍 눈을 떴다. 군부에서도 늘 눈을 일찍 뜨곤 해, 피곤할 건 없었지만….
오늘은 조금 달랐다.
늘 그렇듯 습관처럼 연무장을 달리는 것도, 발록 경한테 체력 관리를 잘하셨다며 칭찬을 듣는 것도 좋았는데.
그다음부턴 하녀들이 내 손을 잡고 방으로 끌고 갔다. 이른 아침부터 따뜻한 물을 채운 욕조에 풍덩 던지더니 손발을 주물러 주느라 여념이 없었다.
만족할 만큼 내 피부를 손질한 하녀들은 이후 나를 거울 앞에 세워 두었다.
“역시 우리 아가씨는 금실로 수를 놓은 하얀 드레스가 잘 어울려요.”
“살갗이 비치는 얇은 레이스로 쇄골을 감싸는 게 요즘 사교계의 유행이거든요.”
“이건 들장미 화환을 무늬로 짜 넣은 레이스인데, 보세요. 정말 우아하죠? 마님께서 살롱의 수석 디자이너를 불러 열두 벌이나 주문하셨답니다.”
하녀들 옆에서 흐뭇하게 웃고 계신 어머니의 모습에 나는 점점 안색이 창백해지기 시작했다.
한 가지, 까맣게 잊고 있었던 사실이 불현듯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왜 그러니, 블란데아?”
아버지와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표정이었다.
“피곤하니?”
“아니에요.”
“블란데아. 안색이 영 좋지 않은데, 혹시….”
그때였다. 집사가 단정히 고개를 숙이며 슐로이츠의 방문 소식을 알려 왔다.
“가주님. 마님. 총사령관님이 방문하셨습니다.”
막 눈을 뜬 아침까지만 해도 슐로이츠가 정식으로 저택에 방문한다는 사실에 두근거리던 나는 이제 식은땀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
부집사의 안내를 받아 들어온 슐로이츠는 내 예상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나는 당황해서 그를 살펴보았다.
‘…군복이 아니잖아?’
어쩌면 당연한 것이긴 한데.
슐로이츠가 살가죽 대신 군복을 두르고 있는 것도 아니니까.
하지만 평범한 귀공자들이 입는 짙은 색의 슈트를 입은 슐로이츠는 순간 나를 낯설게 하기 충분했다.
공식적인 왕실 연회에 참석하거나, 혹은 약혼녀의 가문을 방문하는 젊은 가주처럼 말끔하고 단정하게 차려입은 모습이 익숙지 않아 나는 말문을 잃고 그저 눈만 바보처럼 깜빡였다.
“반갑소. 프로키온 공. 르페브르에 온 걸 환영하오.”
“저택에 온 걸 환영해요. 부디 편하게 지냈다가 가길 바랍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다정한 인사에 나는 목이 바짝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작중에서도 슐로이츠는 그 어떤 여자와도 약혼도 결혼도 하지 않아 이런 상황은 그려 본 적도 없었다.
저런 완벽히도 귀족적인 인사에 슐로이츠가 평대를 한다면….
“안녕하십니까. 르페브르 공, 르페브르 부인.”
나는 순간 귀를 의심했다.
‘뭐야? 내가 잘못 들었나?’
“르페브르 부인. 에스코트를 청해도 되겠습니까?”
어머니가 손을 내밀며 웃었다.
“물론이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