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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군부령의 방식-(16) (127/190)

“난 진심으로 아무 상관이 없어서 드린 말씀인데, 아가씨의 표정이 차가워지더니 쌀쌀맞게 내쫓으시지 뭐야. 내가 또 사회성이 부족한 말을 했나? 아카데미에서처럼?”

아카데미에서 헥토르는 신분은 낮은데 성적은 유달리 좋아서 그야말로 질시의 대상이었다.

거기다가 말하는 것도 묘하게 핀트가 어긋나서 괴짜 취급을 받았다. 매번 괴롭힘도 받았다. 헥토르는 적당히 몸을 사렸지만 사실 그건 남들에게 관심이 없어서 나오는 태도였다.

엔리코르가 혀를 쯧쯧 찼다. 이 녀석은 아카데미에 있을 땐 학생들과 부대껴 살다 보니 어떻게든 사회성이 있는 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젠 르페브르에 처박혀 좋아하는 연구만 온종일 하다 보니 가면처럼 쓰고 있던 사회성은 이미 바닥에 다 처박은 모양이었다.

“어. 아주 부족하다 못해 바닥을 치는 말만 했더만. 네 잘못이지.”

“하지만 사실이잖아?”

헥토르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아가씨가 없으면 가호를 내릴 수가 없으니 손실이 엄청나게 생겨. 하지만 다른 청색 가호자들은 있으나 없으나 상관없잖아?”

“왜 상관이 없어?”

“대체재들이 흘러넘치잖아.”

“네가 그런 사고방식이니까 블란이한테 쫓겨나는 거야.”

엔리코르의 타박에 헥토르가 처음으로 우울한 낯을 했다.

“하지만 나는 르페브르에 속해 있는 사람인데, 당연히 아가씨를 우선순위에 두는 게 맞잖아. 다른 가문의 사람들은 사실 죽든 말든… 아가씨가 더 중요하지 않을까?”

“어휴, 야.”

엔리코르는 헥토르에게 질린 기분을 느꼈을 블란데아를 속으로 동정했다.

“너 아카데미에서 한 달간 손 못 쓰던 때 기억하지?”

“당연히 기억하지.”

“너 괴롭히던 놈들도 처음엔 그냥 찔러보는 거였지, 나중엔 네가 괴롭힘당하든 말든 관심 없이 공부만 하니까 더 심해진 거 아니야.”

얼마나 심했냐면 어디서 닭과 돼지의 피를 공수해 와 그걸 헥토르의 머리에 양동이째로 뒤집어씌우는 일까지 있었다.

헥토르는 그때에도 바닥에 떨어진 시약 비커의 잔해만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동안 아무리 괴롭혀도 반응이 없던 헥토르가 눈물을 뚝뚝 흘리더니 맨손으로 시약을 긁어모았다.

그 모습에 드디어 헥토르의 약점을 알아챈 주동자들이 신이 나 낄낄대며 물러났고.

혼자 남아 유리 조각이 섞인 시약을 맨손으로 한데 모으는 헥토르 앞에 쪼그려 앉은 게, 그 대단한 가문의 직계인 엔리코르 르페브르였다.

“그 정도로 되겠어?”

“……?”

“손을 유리 조각 위로 더 꽉꽉 짓눌러서 피를 콸콸 쏟으라고. 교칙에 위반되니까 걔네가 받을 징계 수위도 훨씬 높아져.”

“그럴 필요까지는….”

“오늘도 소극적으로 대처하면 다음엔 그놈들이 네 책들도 다 찢어 버릴걸? 너 공부에 미친놈이잖아. 자. 이렇게.”

엔리코르가 유리 조각 위에 손을 대고 누르는 바람에 아카데미는 한 번 뒤집어졌다.

르페브르의 직계가 헥토르를 돕다가 다쳤다는 사실에 헥토르를 괴롭히던 놈들은 엄중한 조사를 받았고, 이전의 행적까지 전부 밝혀지면서 아주 무거운 징계를 받았다.

그날 이후 다들 몸을 사렸으니 헥토르도 훨씬 편하게 아카데미를 다녔고.

도와줘서 고맙다고 말했지만 엔리코르는 별반 신경도 쓰지 않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말했다.

“난 우수한 인재를 르페브르에 데려오려고 살피는 것뿐이니까 고맙다고 안 해도 되는데.”

그런 이유라면 다른 방법이 훨씬 많았을 것이다. 신분으로 압박하면 될 일을 가지고, 굳이 자신의 몸을 희생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도.

“아카데미에서의 일과는 결이 좀 다르겠지만 어쨌든, 본인의 관심사에만 열정적으로 굴면 주변인들에게 밀려나기 십상이라고. 블란이라고 안 그러겠어? 네 관심사가 아니어도 적당히 신경은 써야 관계가 계속 유지되지.”

헥토르는 시무룩해져서 중얼거렸다.

“그럼 당분간이라도 외부 활동을 좀 해야 할까…. 너무 저택에만 처박혀 있었나….”

“그건 네가 알아서 하고. 그나저나 일주일에 세 시간씩 잤다고 해도 연구 결과가 너무 빠른 거 아니야?”

“대신 일어날 수 있는 부작용을 청색 가호 판별자에게 전부 넘겼으니까.”

한쪽을 전혀 배려하지 않으면 어떻게든 연구는 빠르게 진행된다.

“물론 아가씨가 보고 싶어서 열심히 한 것도 있지. 꿈에서도 아가씨가 나오고 가호가 나오더라니까?”

엔리코르와는 달리 블란데아는 자신을 크게 필요치 않아 했다. 그 무관심한 태도를 굳이 숨기는 성격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헥토르의 눈에는 블란데아가 엔리코르보다 훨씬 더 가혹해 보였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세상사에 무관심한 기색이었다. 아파서 그렇다는 말로도 포장하지 못할 면모가 종종 있었다.

‘뭐라고 할까. 아가씨는 이 세상에 기대가 없는 느낌?’

무관심은 무자비와 같은 결에 속하니, 까딱 잘못하다간 폭군이 될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덕택에 헥토르는 블란데아가 르페브르를 물려받는 것도 아주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을 종종 하곤 했다.

‘아가씨가 프로키온 영지에선 조용히 지내다 오셨으려나?’

헥토르는 블란데아에게 기어오르는 귀족들을 눈앞에서 한번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빙그레 웃었다.

***

“블란데아 사령관님. 보십시오. 별건 아니고 청색 가호라는 것 덕분에 의무실이 아주 터지려고 합니다.”

군의관이 차가운 은테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청색 가호 판별을 받은 이들이 전부 쓰러져 의무실로 실려 왔다.

이런 반지를 대체 어떻게 쓰라고 가져온 거냐고 묻자, 헥토르는 이미 대처 방법도 고안해 왔다고 했다.

‘익숙해지게 하면 된다니….’

이론적으론 또 틀린 말이 아니었으니, 나는 며칠 전부터 청색 가호 판별자들에게 세 시간마다 가호를 내렸다.

나는 마찬가지로 기절해 있는 티타니아를 본 후 뒤를 돌았다가 깜짝 놀랐다.

힐드온 케트펠이 절뚝거리며 걸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괜찮으니 가호에 익숙해지는 연습을 한 번 더 하고 싶습니다.”

얘 이러다 죽는 거 아니야?

나는 그런 질문을 담아 군의관을 응시했다. 언제나 권태로워 보이는 군의관은 어깨를 으쓱했다. 괜찮다는 의미 같았다.

그럼 뭐….

나는 힐드온 케트펠에게 반지를 낀 손을 내밀었다.

이를 악물고 있는 얼굴과는 달리, 힐드온 케트펠의 두 손은 의외로 아주 조심스러웠다. 손등 위에 닿아 오는 입술이 뜨거운 걸 보니 아직 열이 덜 내린 모양이지만.

손도 덜덜 떨렸다. 무거운 것을 오랫동안 들고 나면 팔이 떨리는 것처럼.

가호는 오래지 않아 끝났다. 비틀거리던 힐드온 케트펠은, 지난 며칠 청색 가호 판별자들이 무수히 그랬던 것처럼 내 품으로 푹 쓰러졌다.

아니, 쓰러지려고 했다.

힐드온 케트펠의 뒷덜미가 붙잡혀 그대로 허공에 멈췄다.

힐드온을 붙잡을 준비를 하고 있던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와 바로 시선이 마주친다.

“블란데아.”

슐로이츠는 한 손으로 힐드온 케트펠의 뒷덜미를 붙잡아 고정한 상태였다.

힐드온 케트펠은 정신을 잃었는지 파리한 안색으로 미동도 없지만.

나는 입을 열었다.

“언제 오셨어요?”

“이 녀석이 네 뒤를 따라 기어갈 때쯤에 도착했나.”

슐로이츠가 툭 던지는 말에 나는 픽 웃고 말았다.

“꼭 힐드온 생도를 늪에서 튀어나오는 괴물처럼 말씀하시네요.”

“괴물보단 벌레로 보이는데.”

“벌레요?”

‘힐드온 케트펠이 그렇게 약하진 않을 텐데.’

물론 힐드온 케트펠이 맨날 쓰러지거나 감옥에 갇혀 있으니 슐로이츠 눈엔 벌레처럼 하찮게 보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슐로이츠는 힐드온 케트펠을 빈 침대 위에 무성의하게 던져 놓고는 내게 물었다.

“의무실에 계속 있어야 하나?”

“아뇨. 용무가 있으신가요?”

“그래. 나오지. 여기서 할 말은 아니니까.”

“네.”

슐로이츠를 따라 나가던 나는 그만 발을 헛디뎠다. 하지만 넘어지기는커녕 비틀거릴 틈도 없었다. 슐로이츠가 한 손으로 가볍게 내 팔을 잡아 지탱해 주었기 때문이다.

깜짝 놀라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으며 서둘러 자세를 바로 했다.

“죄송해요. 감사합니다.”

슐로이츠는 미심쩍은 표정으로 나를 들여다보았다.

“그 새로운 가호가 정말 네게 부담이 가지 않는 게 맞나?”

“맞아요.”

“아닌 것 같은데.”

“제 오라버니가 확인을 끝내 줬어요. 르페브르에서 설마 제게 거짓말을 하겠어요?”

슐로이츠는 그제야 조금 누그러진 기색으로 물었다.

“안고 걸어 줘?”

미쳤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슐로이츠가 픽 웃었다.

나는 슐로이츠를 따라 걸음을 옮기면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를 발견한 이들은 하나같이 각을 잡아 인사를 했다.

사실 나와 슐로이츠의 관계가 특이하다는 생각은 종종 했다.

르페브르와 프로키온은 이미 우리의 결혼을 비공식적으로 합의한 상태였다.

하지만 ‘비공식’이라 공식적으로 우리는 약혼 관계도 아닌 그저 남남이었다.

그렇다고 거리를 두고 있느냐고 물으면 그건 또 아니었다. 슐로이츠는 1왕자 로티스가 보는 앞에서 거리낌 없이 나를 끌어안았으니까.

귀족들은 최연소 총사령관인 슐로이츠에게도, 또 르페브르의 직계인 내게도 관심이 많다.

아마 우리가 미묘한 관계에 있다는 걸 눈치챈 귀족들도 있겠지. 하지만 최소한 군부령에서 쑥덕대지는 않을 것이다.

‘여긴 4인 1실이 기본이라고.’

상관의 일을 입에 올리는 것도 경우에 따라선 처벌을 받으니, 그런 위험은 굳이 감수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모두가 ‘대강 눈치챈’ 것 같은 사실을 미리 입에 올리는 건 이미 입지가 탄탄한 귀족 입장에서 그리 메리트가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보다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왕도 사교계에 이 얘기를 퍼뜨리고 싶어 안달이 나 있겠지.

슐로이츠의 집무실에 들어갈 줄 알았는데, 이번에도 우리가 향한 곳은 옆에 딸린 단정한 분위기의 응접실이었다. 여길 왜 데리고 온 걸까, 의문을 품은 찰나.

“르페브르에서 내게 초청장을 보냈던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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