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군부령의 방식-(14) (125/190)

내 집무실인 것도 여전하고 책상에 엎드려 있는 것도 여전한데. 그 여전한 풍경에 슐로이츠만이 새롭게 그려져 있었다.

그는 조용히 서류를 읽고 있었다. 어두운 시간, 부드럽게 퍼지는 불빛이 슐로이츠의 옆얼굴에 묘한 음영을 주었다. 어쩐지 숨을 죽이게 되는.

나는 여전히 책상에 엎드린 채, 눈만 소리 없이 깜빡이며 그 근사한 남자의 옆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문득 움직인 그의 손이 내 뺨 위에 와 닿았다. 슐로이츠의 두 눈은 여전히 서류에 고정된 채였다.

아무리 조용히 훔쳐봐도 소용이 없나 보다.

조금 머쓱해진 나는 몸을 일으켰다. 어깨에서 겉옷이 스르르 흘러내린다. 내 몸보다 훨씬 큰 그 옷은 슐로이츠의 것이었다.

책상 위에 있는 물을 마셔 마른 목을 축이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언제 왔어요?”

“글쎄. 십여 분쯤 됐나.”

‘아닌 것 같은데.’

나는 슐로이츠가 옆에 새로 쌓아 둔 서류의 두께를 가늠해 보았다. 내가 아직 처리를 덜 한 서류들이었는데, 가장 위에 있는 서류에 슐로이츠가 서명을 해 두었다.

층층이 쌓인 서류 중간에 다른 색깔의 종이를 끼워 놓은 걸 보아하니, 저 위로는 전부 슐로이츠가 처리한 서류라는 소리 같은데….

적어도 한 시간은 걸릴 일이었다.

나는 슐로이츠에게 물었다.

“그렇게 일을 많이 하면 피곤하지 않아요? 슐츠.”

말하면서 동시에 깨달았다. 방을 비추는 불빛의 세기가 많이 약해져 있다는 사실을.

슐로이츠는 그렇게나 내 잠을 깨우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의 눈은 아프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스쳐 가던 것도 잠시.

슐로이츠의 입술이 야트막한 호선을 그렸다.

“피곤하지 않냐고?”

그는 내 말 어디가 웃겼던 모양이다.

“내가 할 말을 왜 네가 하고 있어.”

“전 임관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규 사령관이잖아요.”

“그래서 이렇게 죽어라 일을 해?”

“저는 상관에게 배운 대로 하고 있는 건데요.”

농담조였지만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슐로이츠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방금까지 엷게 머금고 있던 미소까지 완전히 지워 내는 바람에 내심 당황할 정도였다.

“슐츠?”

“내가 네 유일한 상관인 건 맞는데.”

그가 깃펜을 턱 내려놓았다.

“제1 사령관에게 죽을 강도의 업무를 배정한 적은 한 번도 없지 않나?”

“네. 업무엔 문제가 없고, 제가 시간 분배를 제대로 하지 못했어요.”

“블란데아.”

“네?”

“한낱 생도 새끼가 뭐라고 네가 그렇게 온종일 시간을 들여.”

한낱 생도 새끼….

‘맞기는 하지.’

계급 차이가 어마어마하니까.

“그게 가장 효과적인 징계 방식이라고 판단해 진행했습니다. 혹시 제 방식에 문제가 있었다면 말씀을 해 주….”

“둘만 있을 땐 그놈의 공대 좀 그만 쓰지 그래.”

“있었다면 말해 줘.”

슐로이츠가 책상 위를 툭툭 두드렸다.

“군법을 아주 능숙하게도 피했던데. 르페브르 기사단에선 입단하는 아가씨에게 그런 것도 자문해 주던가?”

‘어떻게 알았지?’

슐로이츠의 말이 맞긴 했다.

이건 입단하기 전, 발록 경에게 배운 방법이었다. 르페브르의 기사단장이자 어릴 적부터 내 체력을 전담해 키워 준 그에게 말이다.

군부는 늘 성검을 가까이하는 곳이라 그런지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들도 종종 있을 거라고 했다. 보통의 근신 따위로 해결이 안 될 놈들.

군부에서 감히! 그아아암히! 기어오르려고 하는 놈이 생길 때 요리조리 군법을 회피해 기강을 잡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감옥에 보내든지. 아니면 외지로 파견시켜 버리든지. 방법이야 썩고 넘치게 많은데 굳이 그렇게 관심을 쏟아서 돌봐 주는 이유가 뭐냐고.”

“힐드온 케트펠은 생도들 중 성검 능력도 가장 강하고, 아무튼 청색 가호 판별자니까.”

귀하디귀한 남자 주인공님이시니까 어쨌든 군부 안엔 둬야 하고.

“아. 그런 이유로.”

헛웃음을 흘린 슐로이츠가 물었다.

“다른 청색 가호 판별자들 중에서도, 블란데아.”

슐로이츠가 턱을 삐딱하게 기울였다.

“그렇게 기어오르는 놈이 생기면 같은 방식으로 징계를 내릴 건가?”

슐로이츠의 질문에 잠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다른 청색 가호 판별자들, 그러니까 남자 조연들 중에서는 힐드온 케트펠 같은 성격이 더 없었다. 그놈처럼 더럽게 말 안 듣는 새끼 짐승 같은 놈이 없다는 소리였다.

티타니아 로시에는 충분히 말을 잘 듣고 있었고.

‘그러면 굳이?’

내 표정에서 슐로이츠는 부인의 기미를 읽은 모양이었다.

“그놈이 뭐가 그렇게 특별한데.”

이어지는 슐로이츠의 말은 나를 조금 놀라게 했다.

“그놈도 어릴 때 학대를 받은 놈이라 그러나?”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야?”

“넌 내게도 그런 식으로 친절했잖아.”

“…뭐?”

“내가 버려진 덕에 네 관심이나 한 줌 받을 수 있었던 것처럼.”

“…….”

슐로이츠의 말들이 내게는 하나같이 낯설게만 들렸다. 나는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야기들이라는 점에서 특히.

하지만 아예 억측으로 치부할 오해는 또 아니었다.

애초에, 그래.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도 슐로이츠는 깡패들에게 맞고 있질 않았나. 그 후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고.

어린 시절의 슐로이츠는 굴욕적이고 폭력적인 학대에 내내 노출되어 있었고, 나는 그 힘없는 소년을 구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니 슐로이츠의 입장에서 볼 땐 충분히 그렇게 오해하고 있을 만도 했다.

너는 계속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구나.

더 이상 위를 올려다볼 필요가 없을 만큼 압도적인 지위에 올라서도 말이다.

가슴 한편이 차가운 바늘에 찔린 기분이 들었다. 하염없이 따끔거렸으며 저릿저릿했다.

슐로이츠가 알면 싫어할 생각이겠지만.

“슐츠.”

나는 슐로이츠의 눈동자를 응시하며 입을 열었다.

“난 한 번도 힐드온 케트펠 생도를 가엽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

“믿든 안 믿든 진심이야. 내 입장에선 여러 가지 이유를 따져 보았을 때 힐드온 케트펠을 군부에 두는 게 좋겠다고 판단한 것뿐이야.”

이어지는 목소리가 약간 가라앉았다.

“그리고 나는 슐츠, 너도 가엽다고 생각해 본 적 없어.”

“…….”

“이것도 진심이야. 네가 믿든 믿지 않든.”

새삼 슐로이츠에게 거짓이 아닌, 온전한 진실만을 속삭이는 건 지금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거짓을 속삭일 때보다 훨씬 마음이 편하다는 생각도 함께.

“어릴 적에 내가 너한테 줬던 꽃 한 송이 기억나?”

물으면서도 조금 겸연쩍었다. 내 눈엔 그 꽃이 예쁘게 보였지만 슐로이츠의 눈엔 보이지도 않았을 꽃이다.

“물론 보잘것없고, 초라한 한 송이에 불과해서 기억을 못 할….”

“기억해.”

내 말을 딱딱한 어조로 잘라 낸 슐로이츠가 턱을 조금 움직였다.

“계속 말해.”

“…실은 그날, 그 꽃을 네게 주면서 결혼하자고 말하려고 했어.”

차갑고 치밀한 빛깔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가볍게 흔들렸다.

“물론 둘 다 어렸고, 가문 간의 합의도 없는 날치기 청혼이었지만….”

사실 슐로이츠의 완벽한 미래를 알고 있다는 점에서 불공정 계약이나 마찬가지인 청혼이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나는 널 너무 좋아했고, 그때의 너도 날 많이 좋아했으니까.”

그러니까 우리가 입을 맞출 수 있지 않았겠는가.

슐로이츠라면 아무리 어릴 때라고 해도 싫은 소녀의 입맞춤을 순순히 받아 줄 성격이 아니었다. 그는 내가 오래전 읽었던 활자에서부터 자로 잰 듯 서늘하고 무뚝뚝한 성격이었다.

아닌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어릴 적의 나는… 너를 좋아해서 네게 친절했던 거야.”

처음에는 슐로이츠의 오해를 바로잡고 싶어 꺼낸 말이었는데 말을 할수록 열기가 오르듯 뺨이 천천히 붉어졌다. 부끄러웠다.

내가 꼭 어린 시절을 빗대어 그에게 고백을 털어놓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용건이 끝났다는 의미로 괜히 헛기침을 했다. 시선을 옮기며, 자리에서 슬슬 일어나야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블란데아.”

내가 말을 잇는 내내 눈 한 번도 제대로 깜빡이지 않았던 슐로이츠가 입술을 움직였다.

“지금은?”

“…….”

“지금도 나를 좋아하나?”

평범한 구혼자들이나 할 법한, 옅은 불안감과 깊은 초조함이 함께 묻어나는 질문이었다.

우습게도 입 안 가득 달콤한 사탕이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그는 이렇게 초조해 보이는데 못됐기도 하지….

하지만 손끝이 가볍게 떨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라, 괜히 새침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좋아하지 않으면 내가 너와 결혼을 왜….”

거기까지 말하던 나는 입 안을 가볍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슐로이츠에게 어린 시절 가했던 모욕을 보상하는 의미로 결혼을 암묵적으로 수긍했던 것도 같다.

아니, 애초에….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네가 먼저 내 몸 말고는 르페브르에 바라는 게 없다고 했잖아.”

“내가 언제 그딴 식으로 말을 했어.”

“그때 분명 벗으라고…. 됐어.”

말하면 말할수록 내 손해가 분명했다. 그냥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하고자 시선을 돌리는데 슐로이츠에게 양 뺨이 붙잡혔다.

강압적인 힘은 아니었다. 슐로이츠는 간지럽게 느껴질 정도로 조심스럽게 내 뺨을 감싸 자신을 보게끔 움직였다. 마주치는 시선.

“나는 네 몸이 아니라 너를 원한 거야.”

해명보다는 고백에 더 가까울 말.

“네게 손이 처음 잡혔던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

“너 말고 다른 걸 원한 적이 없다고.”

내내 앓고 있던 깊은 감정이 목 아래서 술렁거렸다.

나는 죽지 않을 너를 원했어.

아주 오래전부터 그랬어.

아무래도 나는 슐로이츠를 구하러 가면서 타고난 용기란 용기를 죄다 써 버린 게 틀림없었다.

슐로이츠의 말 한마디에 이렇게 정신없이 뛰는 섬약한 가슴만 봐도 알 수 있질 않은가.

나는 슐로이츠의 목을 꼭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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