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군부령의 방식-(13) (124/190)

‘상황이 달라진 건 아무래도 오파츠의 영향이 가장 크겠지?’

탁자 위에는 금줄에 매달린 아름다운 오파츠들 여러 개와 진급을 축하하는 꽃다발들이 놓여 있었다.

하나같이 커다랗고 값비싼 꽃들로 즐비한 꽃다발 사이에서, 유독 눈에 띄는 꽃다발이 있었다.

노란 꽃잎에 푸른색 술을 단 특이한 꽃들. 보통 꽃다발엔 잘 쓰지 않을 소담한 꽃송이.

앨리스 꽃이었다.

시한부 블란데아로 태어나고, 살기 위해서 후원으로 간신히 기어가 뜯어 먹었던 바로 그 꽃.

나는 괜히 엔리코르가 선물해 준 앨리스 꽃다발을 다시 한번 안아 보았다. 기분이 묘해졌다.

비록 오파츠의 공로 덕분이라지만, 그래도 이름만 덜렁 나온 시한부 조연이었던 내가 이렇게 군부에서 진급했다는 사실이 낯설었으며, 조금은 감동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니 엔리코르도 일부러 앨리스 꽃으로 꽃다발을 제작해 선물해 준 것이겠지.

이 나이까지 기어이 살아남았구나.

건강에도 특별히 문제가 없었다. 아직까지는.

이제 왕국 멸망 루트만 해치우면 평화롭게 여생을 보낼 수 있겠지?

슐로이츠와 함께….

앨리스 꽃다발에 잠시간 얼굴을 파묻고 있던 나는 다시 꽃다발을 내려놓았다.

내내 얌전히 있던 라파엘이 함께 웃으며 입을 열었다.

“블란데아 경. 아무리 그래도 너무 웃으시는데요.”

“좋은 날이니까 웃는 거잖아.”

“그게 아니라 사령관이라는 이례적인 진급에 기뻐하시는 것 아닙니까? 권력 되게 좋아하시잖아요.”

나는 다시 거울을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기분이 되게 좋긴 하네.”

“그렇죠?”

즐거운 기분으로 새 집무실을 배정받은 나는 그날 저녁, 이 정신 나간 원작의 정신 나간 미인 중 하나인 남주 놈이 사고를 쳤다는 소식을 전해 듣게 된다.

“힐드온 케트펠이 왕실 전령의 멱살을 잡았다고?”

“…예. 각하.”

슐로이츠와 차를 마시고 있던 나는 시선을 옮겼다.

“말이 ‘전령’이지…. 이번에 왕실을 대신해 온 귀족은 다름 아닌 바티스트 공이잖습니까.”

바티스트는 제법 이름이 있는 가문 중 하나였다. 그런 가문의 가주가 전령으로 왔다는 건 왕실에서도 이번 계급 재편성에 아주 신경을 써 주었다는 뜻이었다.

“왜 멱살을 잡은 건데.”

“바티스트 공의 증언대로라면 가벼운 말싸움이 붙었다고 다짜고짜 멱살을 잡았다는데요. 생도 본인을 감옥에 가두고 심문했지만 조개처럼 입 꾹 다물고 아무런 대답도 안 합니다.”

“케트펠 가문과 바티스트 가문 사이에 원한이라도 있나?”

“바티스트 공이 펄펄 뛰는 걸 보니 그건 아닌 것 같았습니다. 무엇보다 둘 다 좋은 가문이잖습니까.”

이곳은 귀족들이 즐비한 군부였지만, 왕도 사교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특히 슐로이츠가 왕도 사교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고.

그때였다.

문을 두드리는 정중한 소리와 함께 다른 기사가 들어왔다.

“각하. 생도 중 하나가 감옥을 탈출해 바티스트 공의 숙소에 침입하려다가 붙잡혔습니다.”

***

‘이 새끼 눈빛 봐라….’

나는 아주 삐딱하게 서서 나를 노려보고 있는 힐드온 케트펠을 응시했다.

힐드온 케트펠은 바티스트 공과 몸싸움을 하면서 호위 기사들에게 처맞았는지 입술도 터져 있었고, 얼굴 여기저기 긁힌 상처가 가득했다.

나는 잠시 힐드온 케트펠을 빤히 보다가 뒷짐을 지고 배회하기 시작했다.

“생도들은 기본적으로 군부 소속이야. 소속 전 가문이 뭐든 간에 공식적으론 그래.”

“…….”

“한낱 생도 주제에 왕실 전령의 멱살을 잡아?”

“…….”

“심지어 생도는 가호의 특수성 때문에 제1 지휘관‘이었던’ 내 책임하에 있는데도 그런 소동을 일으켰어.”

“…….”

나는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힐드온 케트펠에게 흘긋 시선을 던지고 말을 이었다.

“바티스트 공의 재혼 상대가 국왕의 숨겨진 정부라는 사실은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아는, 공공연한 비밀이잖아.”

“…….”

“나는 근데 다른 소문도 들어 본 적이 있어.”

힐드온 케트펠은 여전히 동상처럼 굳어서 대답이 없다.

“케트펠에도 국왕의 숨겨진 정부가 있었다는 소문 말이야.”

순간 힐드온 케트펠의 눈이 멎었다. 그가 반사적으로 내 멱살을 틀어쥘 듯 몸을 크게 움직였다가 가까스로 멈췄다.

힐드온 케트펠의 두 주먹이 새하얗게 떨렸다. 안색도 별반 다를 게 없었다.

‘이 남주 자식 국왕의 숨겨진 사생아잖아.’

케트펠 가문은 보수적인 명문가 중 하나였다. 그런데 케트펠의 막내 여식이 아버지의 엄중한 눈길을 피해 임신을 해 돌아왔다.

케트펠 가주는 당연히 노발대발했지만 국왕의 핏줄이라는 고백에 차마 배 속의 아이를 처리하지는 못했다. 다만 가문의 치부가 될까 싶어 가문의 영지에 가두고 아이를 낳을 날만 기다리게 했다.

하지만 막내 여식은 아이를 낳자마자 죽었고, 케트펠 가주는 이 아이를 첫째 아들의 아이로 입적한다.

그게 힐드온 케트펠이었다.

케트펠 가주와 그의 자식들은 힐드온을 어릴 적부터 끊임없이 학대한 것으로 나온다.

아랫도리를 가볍게 놀리고 다녀 막내 여식을 죽음에 이르게 한 국왕이 한 번도 힐드온을 찾지 않는 것에 분해하면서 그 분노를 힐드온에게 풀어 댄다.

힐드온이 군부로 온 것도 공적을 쌓아 국왕과 만날 기회를 잡고 싶은 게 컸다.

어쨌든 좋은 가문 태생이니, 왕실 연회에도 참석할 기회가 적지 않았을 텐데, 케트펠 가주는 절대 힐드온의 바깥출입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런 소문을.”

이를 꽉 악문 목소리였다.

“어디서 들으셨습니까?”

“그건 네가 알 바 아니고.”

“…그럼 그 얘기를 지금 왜 하시는 겁니까.”

“바티스트 공이 어디서 그런 소문을 듣고 와 케트펠 공을 조롱했나 싶어서 말이야.”

“…….”

“그게 아니면 생도가 멀쩡히 있는 전령을 갑자기 폭행한 이유가 짐작이 안 가거든.”

사실 힐드온은 오랫동안 학대를 당한 탓인지 성격이 아주 또라이 같았다. 소설을 읽던 내 눈엔 그랬다.

국왕과 깊게 연관된 이가 등장하면 참지를 못했고, 조금이나마 마음을 붙인 여주가 위험에 처했다 싶으면 눈이 돌아가 멋대로 뛰어들고….

‘그나마 로티스 왕자와 이스 공주가 왔을 땐 조용하게 보내서 다행이었지.’

아마 그때 인내심이란 인내심을 다 끌어모아 쓰는 바람에, 이 녀석이 애먼 바티스트 공을 팬 것 같지만.

작중에서 그나마 힐드온 케트펠을 통제하는 게 가능했던 건 당연히도 여주, 그리고 웃기게도.

‘슐로이츠였어.’

저 자식은 웃기게도 엄청나게 능력 위주였다. 애초에 이 삐딱한 놈이 여주한테 호기심을 가졌던 계기도 그녀와 자신의 성검 숫자가 똑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압도적인 슐로이츠의 성검 능력 앞에서는 그나마 좀 말을 들었고.

마지막에는 슐로이츠가 결국 힐드온 이 녀석을 살려 주며 죽으니까.

‘나한텐 어려운 일이지.’

나는 이 녀석을 성검 능력으로는 통제할 수가 없었다.

나보다 훨씬 많으니까.

“군부 지휘부에서는 생도에게 한 달의 근신을 명하려고 하던데.”

하지만 작중에서도 별 소용은 없는 처분이었다.

힐드온 케트펠은 본인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몇 번의 근신형 정도로는, 그가 장차 바라는 진급에 별 흠이 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확 괴수 앞에 던질 수도 없고.’

나는 목에 걸고 있던 수건을 힐드온 케트펠의 손에 잘 쥐여 주었다.

“힐드온 케트펠 생도.”

“…예.”

“생도는 오늘부터 한 달간 매일 새벽 5시에 연무장에서 200바퀴씩 뛰기로 한다.”

순간 힐드온 케트펠의 낯빛이 변했다. 본인이 들은 말을 의심하는 표정이었다. 그가 곧장 이를 악물고 항의했다.

“가혹 행위입니다!”

“내가 생도더러 혼자 뛰라고 하면 뭐, 가혹 행위로 해석될 여지가 있겠지.”

그러자 힐드온 케트펠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또 제 동기들을 같이 굴리시는 겁니까? 그것도 충분히 가혹 행…!”

“뛰는 건 나와 생도 둘이야.”

“……?”

힐드온 케트펠이 아까보다 훨씬 더 혼란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힐드온은 2주가 지났을 무렵 결국 탈진해서 들것에 실려 갔다.

아무렴 능력 좋고 체력 좋은 남주라 해도 냅다 200바퀴씩 매일 뛰는 건 기술이 부족하겠지.

나도 물론 힘들어 죽을 것 같았다. 양 무릎을 쥐고 고개를 숙이자 땀이 턱을 따라 뚝뚝 흘렀다.

‘무슨 짐승 새끼 길들이는 것도 아니고…. 말을 하면 좀 들으면 되잖아.’

“블란데아 사령관님. 괜찮으십니까.”

“괜찮아….”

나는 페니가 건네주는 수통을 받았다. 차가운 물이 식도를 따라 내려갔다.

“로라 레닌 준사관은 적색 지구에 잘 도착했다고 합니다.”

‘로라가 거기 고아원 출신인 줄은 몰랐는데.’

꺼지지 않는 봄.

어릴 적의 내가 슐로이츠를 만나러 가기 위해 뒤집었던 고아원이었다.

‘본인이 거기 가 보고 싶다고 하니까.’

예전부터 자신이 자랐던 고아원에 한번 가 보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로라는 한 번도 군부를 벗어난 적이 없다고 했다. 이해는 했다. 가뜩이나 출신 성분이 약점인데 본인이 자랐던 고아원에 다녀왔다 하면 다른 준사관들이 뭐라고 비웃을지 뻔하니까.

“이젠 다른 사람도 아닌 제1 사령관님의. 직속 준사관인데. 감히 누가 뭐라고. 입을 텁니까.”

사실 페니가 로라를 온종일 데리고 다니면서 그녀를 은근히 얕잡아 보는 준사관들의 어깨를 퍽퍽 치고 다닌 효과 같지만….

원래 훌륭한 상관은 적당히 모르는 척 넘어갈 줄도 알아야 한다.

“맞아. 어차피 그쪽에서 준사관을 요청하기도 했고.”

‘힐드온 케트펠이 쓰러져서 다행이다.’

적어도 하루는 일어나지 못하겠지?

군의관더러 힐드온 케트펠에게 겁을 잔뜩 주고 가급적 오래 퇴원시키지 말라고 몰래 청탁을 한 나는 이참에 밀린 일들을 처리했다.

‘오파츠는 어떻게 이렇게 매일매일 갱신이 될 수 있는 거야? 나름대로 신기술 같은 건데 이게 가능해?’

헥토르는 사실 저택에서 몰래 인체 실험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하루가 다르게 오파츠나 가호의 정보가 새로워진다니.

게다가 제1 사령관이 된 덕에, 오파츠 외에도 내 선에서 처리해야 할 일들 역시 잔뜩 늘었다.

슐로이츠는 매번 이런 걸 어떻게 감당할 수 있었던 거지?

한참 서류를 처리하다 보니 금세 밤이 되었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다 되어 갔고, 나는 책상에 그냥 엎드렸다.

잠깐 눈을 붙였다가 새벽에 일어나 마저 처리하면 괜찮겠지.

팔을 뻗어 화병에 꽂아 놓은 앨리스 꽃을 만지작거려 보았다. 보송한 꽃잎의 촉감은 언제 느껴도 기분을 좋게 한다.

나는 엎드린 그대로 잠에 빠졌고, 목이 말라서 눈을 떴을 때에는.

슐로이츠가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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