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군부령의 방식-(10) (121/190)

사실… 나라도 이런 상황이라면 나를 지켜 줄 것 같은 상대에게 깊은 호감을 느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나는 그 괴물 같은 슐로이츠가 아니었다.

“왕자님.”

나는 혼자 감당이 안 된다고.

“제 앞에 서서 저만 바라보고 계세요. 고개 돌리지 마시고요.”

로티스 왕자를 내 앞쪽에 끌어 세우는 것과 거의 동시였다.

등골이 스산해졌다.

“……!”

르페브르 영지의 푸른 성채에서 죽어라 구른 경험 덕에 어느 정도 괴수의 기척을 눈치챌 수 있게 되었다. 정말 다행히도 말이다.

“절대 움직이지 마세요.”

로티스 왕자는 나보다 몸집이 훨씬 컸기 때문에 괴수의 입장에선 내가 잘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무엇보다, 로티스 왕자는 정말로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괴수가 뛰어오는 소리가 들렸을 텐데도 말이다.

왕자는 등 뒤에 불확실한 적을 둔 사람 특유의 굳은 낯으로 나를 내려다보다가 아예 눈을 감았다.

괴수가 턱이 찢어져라 입을 벌리고 왕자에게 뛰어든 직후. 로티스 왕자의 머리 위로 떠오른 보호막에 괴수가 그대로 몸을 처박았다가 뒹굴었다.

세 번이나 괴수가 뛰어들 동안 미동도 않던 왕자는 내가 괴수를 해치우고서야 기척을 감지한 듯 눈을 떴다.

“피 닦으세요.”

품에서 손수건을 꺼내 주자 로티스 왕자가 손수건을 홱 낚아채 갔다. 성검을 사용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비를 맞은 왕자는 제법 처량해 보였다.

“…나를 싱싱한 미끼로 쓸 줄은 상상도 못 했어.”

“화나셨나요?”

“자존심이 상해.”

“네?”

주변을 살피며 입으로만 왕자를 대충 달래 주고 있던 나는 뜻밖의 대답에 그를 돌아보았다. 피 묻은 손수건을 꽉 쥔 로티스 왕자는 진심으로 자존심이 구겨진 표정이었다.

“내가 왜 레이디 뒤에 숨어서 이딴 식으로 목숨을 보전하고 있어야 해.”

“전 지금 군인이니까요, 왕자님. 그리고 저흰 지금 협력하는 중이잖아요.”

“…내가 죽으면 경도 죽는다는 얘기군?”

“잘 아시네요.”

“…….”

로티스 왕자가 새 오파츠를 받아 들며 말했다.

“경의 부하로 들어갔으면 지금 사는 것보다 몇 배는 더 재밌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유언 남기지 마세요.”

“…….”

“저흰 살 거예요.”

“…내가 경에게 약한 소리 따위를 하는 게 아니라.”

반사적으로 반박하던 것 같던 로티스 왕자가 천천히 침착해졌다.

“알겠어.”

일생을 나른하고 계산적인 장난으로 보낸 것 같던 왕자의 평소 얼굴이 가면이라는 건 물론 짐작하고 있었지만, 막상 이런 상황에서 날것의 본모습을 마주하게 되니 그건 그것대로 신선했다.

로티스 왕자는 이후 총 세 개의 오파츠를 더 깨뜨렸다. 그리고 오파츠가 깨지면서 받는 충격 때문에 피도 엄청나게 토했다. 나중에는 이 왕자에게 오파츠를 더 줘도 될지 고민하는 내게서 아예 강탈해 가듯 낚아채 갔다.

‘처음인데도 어마어마하게 버텼네.’

결국 로티스 왕자는 몸의 내구도가 한계에 다다랐는지 쓰러지고 말았지만.

‘여기 계속 있는 건 아닌 것 같아.’

벌써 세 구의 괴수 시체가 널브러져 있었다. 특히 마지막 한 마리는 팔만 뻗어도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절명했고.

로티스 왕자를 질질 끌어서라도 다른 데로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돌아, 가자.”

아래에서 들리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주저앉은 로티스 왕자가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네 번째 오파츠가 깨지며 더 이상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지.

“좀 있으면 돌아갈 거예요.”

“…거짓말은. 나를 더 이상 미끼로 쓸 수도 없잖아.”

“음….”

“이젠 남은 오파츠도 없으니까.”

“알고 계시네요.”

나는 턱을 가볍게 긁적였다. 로티스 왕자는 피를 어마어마하게 토하는 바람에 시체같이 창백한 낯으로 물었다.

“왜 이렇게 침착해? 본래 성격이 그러나?”

“아뇨.”

사실 로티스 왕자의 마지막 오파츠가 깨졌을 때부터 심장이 바닥에 떨어진 상태였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는 부하나 호위 대상을 누구보다 안심시켜야 하는 게 지휘관의 덕목이라고 교범에 나와 있거든요.”

“죽음을 앞둬….”

“어떠세요? 왕자님. 아까 제가 말씀드린 대로 슐로이츠 경이 아주 보고 싶어지시죠?”

괜히 나를 노려보는 것 같던 로티스 왕자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움직였다.

“총사령관이 아주 간절해지네.”

‘본심을 말할 때는 시선을 피하는 게 습관인가 보네.’

본인이 모르는 습관 같은데 굳이 말해 줄 필요는 없겠지.

“내게만 약한 소리를 종용하지 말고, 경도 똑같이 속내를 말해 줘야 공평하잖아? 경은 어떤데?”

“보고 싶어요.”

“…….”

“전 아주 오래 사는 게 삶의 목표인 사람이었는데 큰일 났네요.”

로티스 왕자의 눈동자가 순간 어울리지도 않게 흐려지기 시작했다. 우는 건 절대 아니고, 그것과 결이 아예 다른 묘한 감정….

더 살펴볼 수가 없었다. 로티스 왕자가 아까와는 달리 아예 고개를 바닥에 처박는 걸로 내 시선을 피했기 때문이다.

“미안해.”

“갑자기 뭐가요? 왕족의 호위는 원래 군인의 의무….”

나는 홱 뒤를 돌아보았다. 괴기스러울 정도로 환하게 웃는 두 마리의 괴수가 바퀴벌레처럼 기어 오고 있었다.

곧바로 성검을 휘둘렀으나 두 마리를 동시에 죽이는 건 이 대륙을 통틀어 슐로이츠밖에 할 수 없는 일일 터였다.

내 몸 위로 떠오른 보호막에 괴수가 부딪혔다.

쾅!

결국 견디지 못한 오파츠의 마지막 보호막이 무너져 내렸다. 얼굴의 반이 날아간 괴수가 내 쪽으로 달려오던 그때.

나는 기이한 경험을 했다. 무언가 까맣고 커다란 것이 순식간에 시야를 차단하는 경험.

거의 동시에 빗물처럼 쏟아지는 성검들. 나는 한 박자 늦게야 내 앞에 선 게 슐로이츠라는 사실을 알았다. 내 시야를 가로막은 것이 슐로이츠의 단단하고 팽팽한 등이라는 사실 역시.

홀린 듯 가만히 서 있던 것도 잠시였다. 슐로이츠는 나와는 감히 비교하는 게 민망할 정도로 압도적이며 경이로운 힘으로 괴수 두 마리를 순식간에 해치웠다.

해치운 것 같았다고, 짐작만 했다.

이 남자가 살아 있는 괴수를 앞에 두고 무방비하게 등을 돌릴 리 없으니까.

그는 그렇게 나를 돌아보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슐로이츠의 푸른 눈에 담겨 있던 게 어떤 감정들인지 하나씩 건져 내 볼 시간도 여유도 없었다.

“…….”

성검을 젖은 흙바닥 위에 내리꽂은 슐로이츠가 그대로 나를 품에 껴안았기 때문이다. 순간 숨이 멈출 만큼 강한 힘이었다.

“…블란데아.”

그렇게 강한 힘으로, 어울리지 않게 그의 목소리는 끝이 희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슐로이츠가 이상할 정도로 연약하게 느껴졌다.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당연히 걱정할 거라고는 예상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라서….

“…다친 곳은?”

“다칠 뻔했는데 다치지 않았어요. 경 덕분에 괜찮아요.”

“괜찮다고. 그래….”

슐로이츠는 나를 끌어안은 상태 그대로 내 어깨 위에 이마를 묻었다. 그가 천천히 토해 내는 숨결이 뜨겁게 느껴졌다.

이대로 영원히 나를 껴안고 있을 것 같던 슐로이츠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한순간이었다. 슐로이츠가 딱딱한 철갑을 두른 듯 순식간에 싸늘하고 무표정한 얼굴을 지은 것은.

나를 놓은 슐로이츠가 그대로 성큼성큼 뒤편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여전히 다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게 분명한 로티스 왕자의 멱살을 한 손으로 잡아 들어 올렸다.

퍽!

나는 순간 두 눈을 크게 떴다. 슐로이츠에게 주먹으로 뺨을 처맞은 로티스 왕자가 쿨럭이며 고개를 들었다.

입 안이 터졌는지 피가 주르륵 흘러나왔다.

“정신 나간 새끼 같으니라고.”

슐로이츠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뒈지고 싶으면 혼자 뒈지든지. 친서를 조작해?”

“……?”

‘조작?’

무슨 말이지?

“일평생 안전한 왕궁에 처박혀 살다 보니 괴수가 체스판 위의 말처럼 느껴진 모양인데.”

“…….”

“눈알이 달려 있으면 똑바로 봤겠지. 어때. 한 마리 끄집어내 너의 그 상황극에 이용할 수 있을 만큼 괴수가 만만해 보였나?”

“…….”

로티스 왕자의 눈에 핏발이 섰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 말을 찾지 못한 사람처럼.

순간, 아까 전 로티스 왕자와 나누었던 대화가 머리를 스쳐 갔다.

“전 아주 오래 사는 게 삶의 목표인 사람이었는데 큰일 났네요.”

“미안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