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군부령의 방식-(7) (118/190)

한편, 같은 시각.

“총사령관님.”

라파엘은 정중한 무표정을 쥐어짜 내며 희희낙락 입을 열고 있었다.

“1왕자가 아주 대단한 꽃다발을 르페브르 공자에게 툭 던져 주지 뭡니까? 예. 블란데아 경이 아니라 엔리코르 르페브르 공자한테 말이에요. 그런데 재미있게도 1왕자의 눈은 계속 블란데아 경에게 꽂혀 있었습니다. 보통 그런 꽃다발은 최소가 구애고 최대가 구혼인 걸 감안했을 때, 제 생각엔 안에 최고급 다이아몬드 반지라도 숨겨 놓았던 게 분명합니다.”

총사령관 집무실에 있는 보좌 기사들은 하나같이 라파엘을 닥치게 하고 싶었다.

아그네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예의 그 단정한 미소를 환하게 머금은 채 생각했다.

‘나쁜 놈….’

자긴 강 건너 불구경을 할 수 있다 이거지.

그래서 아주 재미있다 이거지.

이게 다 가십처럼 보인다 이거지!

정확히 짚었다.

‘너무 재밌다.’

라파엘은 제2 지휘관인 디오스 이젤보다도 슐로이츠와 지낸 기간이 조금 더 길었다.

그렇다고 슐로이츠와 친구나 동기처럼 친하고 막역하게 지냈다는 소리는 절대 아니었다.

어릴 적 막 입단한 슐로이츠는 몇 달을 무생물처럼 덩그러니 지냈다. 웃지도 울지도 않는 줄 끊긴 인형처럼 무표정한 얼굴에 생기 한 점 없는 공허한 푸른색 눈동자.

그러다 어느 순간을 기점으로 세상이 뒤바뀐 듯 치고 올라오기 시작했는데 그때가….

‘프로키온 령 출신의 어떤 준사관이 괜히 꼬투리를 잡았을 때였던 것 같은데.’

생도들은 다인실 숙소를 써야 했고, 이름도 기억 안 나는 준사관이 슐로이츠의 물건을 죄 갖다 버린 적이 있었다.

물론 그건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적어도 당시의 군부에선 드물지 않은 일이었다.

생도들은 전부 귀족 출신이니 언제나 물품은 원하는 만큼 넉넉하게 지급되었다.

기강을 잡는다며 자행되는 간단한 괴롭힘 정도인데….

‘물건도 몇 개 없었잖아. 사이드 테이블 옆에 뒀던 화병이나 한두 개 깨졌고…?’

그때 비쩍 마른 꽃 한 송이가 없어지긴 했다.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블란데아 경이 주셨던 게 틀림없어.’

어쨌든 당시의 라파엘은 슐로이츠가 어울리지도 않게 시든 꽃 한 송이에 눈이 도는 모습을 보자 묘한 확신을 느꼈다.

줄을 서야 되겠다는….

군부는 줄이 전부니까.

버려진 인형처럼 말 한마디 없이 지낼 때도 슐로이츠는 대단히 강하긴 했으니, 결과적으론 아주 잘한 선택이었다.

라파엘이 슐로이츠에게 일찍 베팅한 결과 인연이 깊어져 여동생인 페니는 아예 프로키온 저택의 기사로 가게 되었지만.

일생일대의 배팅은 크게 성공했으나 슐로이츠에게 아무렇지 않게 퍽 맞고 날아가던 나날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러니 라파엘에게 지금은 호사나 다름없었다. 라파엘은 종종 한계를 찍은 즐거움에 심장이 팡 터질 것도 같았다.

슐로이츠는….

무표정한 얼굴로 시선을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친 라파엘은 웃고 있다가 반사적으로 굳었다. 슐로이츠가 계속 서류에만 시선을 처박고 있어서 방심하고 웃다가 새어 나온 미소였다.

“라파엘 클로비스.”

“예…!”

“1왕자에게 사람 붙여 놔. 이틀 안으로 군부에서 꺼지게 만들어.”

“예!”

아그네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총사령관님. 1왕자님의 기존 일정은 일주일이었습니다만, 갑자기 내쫓으려면 명분이 필요합니다. 지금 1왕자를 내쫓으면 너무… 빼먹을 것만 쏙 빼먹고…내쫓는 것 같지 않습니까?”

“이틀 후 군부 계급 재편성을 공표할 거다.”

“예?”

순간 라파엘이 얼빠진 목소리로 되물었다.

한 박자 늦게 주변을 둘러보니, 아그네스를 비롯한 집무실의 기사들은 차분한 기색이었다.

이미 왕자가 오기도 전에 끝난 이야기라는 소리였다.

“확실히, 계승권이 있는 왕족들은 거주에 수많은 제한이 따르니… 군부의 1급 일정에는 함께 할 수 없습니다.”

늦은 시각이었음에도 총사령관의 집무실은 순식간에 분주해졌다. 군부에서 말하는 계급 재편성의 의미는 통상적으로 하나다.

“총사령관 아래로 4개의 사령관 자리가 공식적으로 추가되는 거잖습니까…!”

라파엘은 갑자기 호흡이 달리기 시작했다.

라자크 왕국의 역대 총사령관들은 본인이 일구어 낸 공훈에 따라 휘두를 수 있는 권한이 판이하게 달랐다.

특히 4개의 사령관 자리를 부활시키는 것은 역대 총사령관들이라면 반드시 꾸는 꿈이었으나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그만큼 하사받아야 할 훈장의 개수가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철저한 신분제인 귀족 사회에서, 적나라할 정도로 능력을 증명해야 하는 군부.

“가장 먼저 블란데아 경을 사령관으로 임관하시겠지요?”

명분도 의미도 완벽했다.

르페브르의 오파츠란 슐로이츠 프로키온이 총사령관으로 재임해 있는 동안 처음으로 등장한 괴수 대항 방어구로서, 앞으로도 역사에 기록될 기적적인 물건이었다.

군부와 최연소 총사령관인 슐로이츠 프로키온은 르페브르에게 충분한 정중함과 성의를 표했음이 한 줄로 더 추가되겠지.

근시안적으로는 가호를 내릴 수 있는 르페브르와 군부의 관계가 얼마나 돈독한지 외부에 효과적으로 알릴 수 있었고….

보좌 기사들이 물었다.

“그런데 총사령관님. 블란데아 르페브르 경은 애초부터 기간제로 입단한 분이잖습니까.”

“맞습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경을 비교적 낮은 사령관으로 임관하시는 게, 총사령관님이 이후 왕실에 헌납해야 할 괴수의 수를 줄일 수 있는 방법….”

슐로이츠는 서늘한 얼굴로 말을 잘랐다.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숫자가 달라지지 않아.”

라파엘은 쿵쿵 뛰는 심장 위에 두 손을 올리고 물었다.

“그럼, 총사령관님.”

역시 자신은 언제나 베팅을 잘한다. 줄도 잘 섰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말이다.

“이틀 후에 제1 사령관부터 임관하시는 겁니까?”

***

“네 예비 남편은 총사령관이 아니라 상인이었어도 대성했을 거야.”

엔리코르의 말에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갑자기 무슨 말이야? 엔리.”

“왜냐면 성공해야 네게 온 대륙의 보석을 가져와 선물할 수 있을 테니까. 아득바득 성공했을 거란 소리지.”

“……?”

이어지는 설명을 들어도 의문은 해소가 되지 않았다. 내 표정을 본 엔리코르가 속닥였다.

“아까 왕실 쪽 사람한테 살짝 들었거든? 내가?”

“뭘?”

“1왕자는 군부 기지의 출입 허가를 받기 위해 몇 달을 소요하며 협상을 벌였다는데….”

“군부 기지는 원래 특수한 지역이라 출입이 쉽지 않잖아.”

“난 1분 만에 허가를 받았어. 블란아.”

“…….”

“내가 아무리 르페브르여도 말이지. 알다시피 슐로이츠 프로키온 경은 르페브르에게도 그다지 정중한 편은 아닌 걸로 알거든. 아무래도 내 생각엔 너와 내가 닮아서인 것 같아.”

“닮아 봤자….”

나는 유심히 엔리코르를 들여다보았다.

“많이 닮았네.”

“그렇지?”

모이라 반지를 끼고 있어서인지 요즘 엔리코르는 머리카락도 나처럼 길었다.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었다. 나와 엔리코르는 아버지의 판박이였다. 나와 닮아서 슐로이츠가 엔리코르에게도 너그럽게 대해 주는 거라면….

아버지한테도 어느 정도 그러겠지만 어머니한테는….

‘음…. 슐로이츠는 국왕이 아니면 공대도 안 쓰는 성격이라고 원작에서도 나오니까.’

아무래도 아버지나, 특히 어머니는 슐로이츠와 독대하게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블란아. 그런데 네 숙소 앞에 왜 왕족이 서 있을까?”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엔리코르의 말대로 숙소 앞에는….

“이스 공주님.”

왕실의 막내 공주인 이스 공주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가 1왕자인 로티스와 함께 왔다는 건 알고 있긴 했는데….

“르페브르 공자.”

이스 공주는 엔리코르를 흘긋 보더니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 그녀의 손에 들린, 직접 자수를 놓은 듯한 손수건을 확인한 나는 엔리코르를 슬쩍 보았다.

“말씀하세요. 공주님.”

엔리코르는 정중하고 온화하게 웃고 있었지만 눈빛 저변에는 ‘또?’라는 난감함이 은은하게 깔려 있었다.

‘아주 배가 불렀지.’

작중에서 엔리코르의 침대에도 숨어 기어 들어가 있던 사람들에 비하면 이스 공주는 아주 평화롭고 낭만적인 방식을 택하긴 했다.

어쨌든 직계 왕족이니 르페브르도 거절하면 큰 결례이기도 했고.

나는 적당히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피해 준 후, 공주의 용건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겹사돈도 난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난 흠칫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1왕자님.”

로티스 라쥬누크가 요요하게 웃고 있었다. 달빛을 받은 그의 눈동자는 평소보다 훨씬 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이스는 자수를 잘 놓지. 특기야. 정성을 들인 아름다운 선물은 누구나 좋아하는 법이잖아.”

“네, 그렇긴 하죠.”

‘난감하네.’

제1 지휘관인 내가 군부령 기지 안에서 왕족을 용건도 없이 피하는 게 이상한 꼴이긴 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에 그냥 피하는 게 나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나?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

“제 결혼은 제가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왕자님.”

“영애의 마음만이라도 언질을 주면 나머진 내가 알아서 할게.”

“언질이요?”

“응.”

“죄송합니다. 왕자님.”

로티스 왕자는 바람이 빠진 풍선처럼 웃었다.

“알아? 오늘 가져온 꽃다발은 사실 영애에게 주고 싶었어.”

“주신 꽃다발은 제 오라버니가 잘 가꿀 거예요.”

“영애.”

로티스 왕자가 미소를 지었다.

“나와 약혼을 맺으면 내일이라도 당장 군부에서 꺼내 줄게.”

왕족과 혼사를 맺거나 맺을 가문에는 다양한 편의와 함께, 훈장을 대체할 순금 증서도 받으니 그 얘기를 하는 모양인데….

“이러지 않으셔도 저는 군부에서 복무하는 게 크게 힘들지 않고.”

사실 체질인 것 같고.

“또 르페브르는 왕실과 언제나 우호적이고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겁니다. 1왕자님.”

“참 왕족 입장에서 기꺼운 말이긴 하지만…. 영애.”

로티스 왕자가 달빛을 덧대듯 속삭이며 물었다.

“남자로서 나는 어떤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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