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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 군부령의 방식-(5) (116/190)

‘근데 그건 그거고.’

나는 <미친 미인의 최후>를 읽을 때마다 늘 하는 생각이 있었다.

티타니아 저 미친 악역을 가족 중 하나라도 따뜻하게 대해 주었으면 저렇게까지 막장으로 치닫지 않았을 텐데, 하고 말이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늘 생각하던 게 나도 모르는 새 이루어진 모습을 보면 기분이 좋아질 수밖에.

덕분에 아센 로시에와 티타니아 로시에가 사이가 나쁘지 않아 보이는 건 아주 좋게 보였다.

‘책을 읽을 때마다 그러긴 했는데.’

덕분에 기분은 완만하고 평온한 상태였으나, 그와는 별개로 아센 로시에의 방금 언사엔 문제가 있었다.

아주 많이.

“이 새끼 지하 감옥에 처넣어.”

순간이었다. 공기가 굳었다. 라파엘은 짧고 딱딱한 목소리로 예, 하고 대답하더니 바로 아센 로시에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큰 의미 없이 라파엘 쪽으로 흘러간 내 눈길이 한순간 의아한 빛을 띠었다.

항상 호구처럼 상냥하게 웃던 라파엘의 얼굴이 놀라울 정도로 차갑게 식어 있었기 때문이다. 눈빛이 어찌나 얼음장 같은지 다른 사람을 보는 듯한 낯선 기분까지 들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이 개새끼가 미쳤나?’

…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나는 얼굴이 창백하게 질린 아센 로시에 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센 로시에 생도. 방금 지껄인 말 다시 해 봐.”

“그게….”

“뭐로 태어나고 싶다고? 여자로?”

“……!”

새빨갰던 아센 로시에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아센 로시에 생도의 눈에는 르페브르의 가호가 다른 걸로 보이는 모양이야.”

“아, 아닙니다…!”

“이 정신 나간 놈이 감히 르페브르와 제1 지휘관을 동시에 모욕해?”

“죄, 죄송합니다…!”

“내 처분이 과하게 느껴지면 지금 항의하든지.”

“절대 아닙니다, 제1 지휘관님…! 제 발로 가겠습니다…! 관대한 처분 감사드립니다!”

아센 로시에는 이제 울 듯한 얼굴로 횡설수설 중얼거렸다.

“정말 죄송합니다….”

난 그에게서 시선을 떼고 라파엘을 쳐다보았다.

“라파엘 경.”

“상세한 처분은 총사령관님께 보고 후 말씀드리겠습니다, 블란데아 경. 일단 뚫린 입이라고 나불댄 이 생도 새끼는 당장 지하 감옥에 처넣고 오겠습니다.”

분명 자기 발로 걸어 감옥으로 들어가겠다고 했는데 라파엘은 아센 로시에를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얼굴이 새빨개져 라파엘의 말을 복창하는 티타니아 때문에, 웃음기가 감돌던 분위기는 순식간에 바닥에 처박혔다.

하지만 분위기가 얼마나 바닥을 치든, 아랫사람들이나 죽을 맛이 되는 거지 자리에 있는 최고 권력자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 법이다.

따라서 나는 이중 유일하게 느긋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난 몸을 돌려, 티타니아 로시에를 바라보았다. 그녀 역시 다른 이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돌처럼 굳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었다.

“티타니아 로시에 생도.”

티타니아의 입이 조금 벌어졌다, 네, 라고 대답은 한 것 같은데 소리가 너무 작아 들리지 않았다. 지금 문제 될 일은 아니었고.

“나는 로시에 가문을 생각해서 아센 로시에에게 아주 너그러운 처분을 내릴 생각이야. 군부에서도 배경을 아예 생각하지 않을 수는 없잖아.”

“…….”

“하지만 아센 로시에 때문에 다음부터는 생도에게도 오늘 같은 가호는 없게 됐네.”

***

“이게 또 무슨 개소리야.”

슐로이츠가 뻐근한 뒷목을 한손으로 주무르다 말고 표정을 굳혔다.

“로시에의 어린 개새끼가 블란데아에게 뭐라고 지껄였다고?”

총사령관의 심기만큼 군부에서 중요한 게 없었던지라, 집무실에 있던 기사들은 당연히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커다란 집무실이 금세 얼어붙었다.

예전엔 그 긴장한 기사들 범주에 들어가던 라파엘은 이제 신분이 달라졌다.

블란데아에게 스케줄 담당자로 달라붙으며 반영구적인 안전과 신체의 보존 권리를 획득한 라파엘은 혼자 속으로 행복해하며 겉으로는 차분하게 보고를 이었다.

“…그렇게 되었고, 아센 로시에는 방금 지하 감옥에 처넣고 오는 길입니다.”

슐로이츠의 미간이 깊게 일그러졌다.

“블란데아는.”

“경께서는 백색 가호 판별자들에게 가호를 내려주고 계십니다. 저는 아센 로시에의 처분에 대해 총사령관님께 여쭙고 돌아가 바로 블란데아 경에게 보고 드리기로 했고요.”

가호라는 것 자체가 올해 처음 도입된 것이라 군법으로 해결하기 어려운 게 많았다. 선례가 없는 것들은 대부분 군부 총책임자의 판결에 따라 결론이 나곤 했다.

“로시에 가문의 직계가 생도로 더 입단해 있나?”

“예. 총사령관님. 티타니아 로시에 생도까지 총 두 명입니다.”

“다 퇴단시켜.”

“예?”

“아니면 그 새끼의 혀를 뽑아 버리든지.”

“어…. 총사령관님.”

전자는 가문의 존속이 흔들리는 일이었고 후자는 즉결처형을 하겠다는 말이었다. 라파엘은 아무래도 후자가 낫겠다고 판단은 하면서도 일단 입을 열었다.

“블란데아 경이 가문을 생각해 너그러운 처분을 내릴 거라고 티타니아 로시에 생도에게 이야기기하셨답니다.”

“…….”

“아무래도 로시에 가문에 상당한 빚을 져두려고 하시는 것 같던데요. 블란데아 경은 왕국 사교계에도 원하기만 하신다면, 얼마든지 입성할 수 있는 가문 태생이신지라…. 그런 게 필요하실 수도 있잖아요.”

슐로이츠가 허공을 올려다보며 짜증스러운 한숨을 내쉬었다.

“지하 감옥에서 한 달 있다가 꺼내.”

“존명.”

블란데아가 말한 ‘적당히 너그러운 처분의 범주’에 아슬아슬하게 드는 처분이었다.

“가장 가까이 비는 일정이 언제지?”

“내일 오전에 일정이 빕니다.”

“그 시간에 블란데아를 호출해. 청색 가호에 대해 다시 법규를 수정할 테니까. 르페브르에도 편지를 보내고. 군부 단독으로 진행하기 어려운 부분들이 있군.”

“존명.”

정중한 대답에 그렇지 못한 미소. 희희낙락 블란데아에게 가는 라파엘을 기사들은 부러움을 삼키고 쳐다보았다.

슐로이츠는 시계를 노려보았다.

내일 오전은 무슨. 마음 같아선 당장 블란데아를 봐야 하지만 빌어먹게도 그럴 수가 없었다.

공적인 업무 시간에 사적으로 불러내는 건 블란데아가 아주 싫어하는 짓이었기 때문이다. 거기에 자칫 잘못하다간 군부령에서 그녀의 입지를 우습게 만들 수도 있으니 그가 알아서 자중해야 하는 것도 맞았다.

슐로이츠의 기분이 바닥을 쳤기 때문에 덩달아 온종일 눈치를 보게 된 간부급 기사들이 대신 이를 갈았다.

아센 로시에?

최상위급 탑의 가문 출신에, 남매가 함께 들어왔으니 웃기게도 제법 살 만한 새끼였던 모양이다…. 군부령의 방식은 다르다는 걸 몸소 알려줘야 하는 놈들은 매해 지겹게도 쏟아지는 법이었고.

오늘 아침 ‘폐허의 숲’으로 파견을 나간 디오스를 대신 해, 슐로이츠의 보좌를 대신 맡고 있는 아그네스도 힘든 건 마찬가지였다.

이상하게도, 슐로이츠는 지난 며칠 간 일을 거의 처리하지 않은 상태였다.

‘왜 일을 평소보다 훨씬 못하셨지? 블란데아 경이라는 보좌까지 그렇게 붙여 드렸는데…?’

며칠 간 처리해야 할 일들이 그대로인데다가, 오랜만에 군부로 돌아온 터라 매일매일 두 배로 늘어나고 있는 지경이었다. 살아 있는 게 용했다.

‘블란데아 경 일 잘 하시는 걸로 아는데. 또 싸우셨나?’

…하는 의문이 아직 몸이 순진한 아그네스에게 와 닿았지만 금세 스르르 흩어졌다.

아그네스는 끓여서 술기운을 날린 포도주에 꿀을 한 스푼 넣은 걸 먹으며 정신을 차렸다.

온종일 서류를 처리하는 와중에도 슐로이츠가 한 번씩 허공을 노려볼 때마다 긴장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몇 시간 후.

슐로이츠는 잠시 중단하고 나왔던 회의를 재개하러 들어갔다.

“총사령관님.”

“이어서 얘기 드려도 되겠습니까?”

“마저 해.”

“예. 말씀하신 대로 총사령관 이하 간부 계급을 재편하면, 네 개의 사령관 자리가 새로 추가되는데….”

***

“뭐?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엔리코르가 분노한 얼굴로 군부에서 온 서류를 팍 내려놓았다.

“우리 블란이가 여섯 명의 뺨에 입을 맞춰줘야 한다고? 심지어 매주?”

충격에 흔들릴 뻔한 시약을 재빠르게 치워 낸 헥토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충격에 얼마나 약한 건데….

“아가씨는 입을 맞추는 게 아니라 가호를 내리는 거잖아.”

“아무튼! 행위 자체는 뺨에 입을 맞추는 거잖아! 입술을 갖다 대야 하니까! 애초에 청색 가호가 왜 그렇게 많이 나오는데!”

“그간은 표본이 극도로 적었잖아.”

헥토르가 목덜미를 긁적이며 말했다.

“근데 나도 청색 가호 판별자들이 왜 이렇게 많이 나왔는지 모르겠어.”

“하.”

“애초에 청색 가호 판별자들에게 무슨 공통점이 있는지도 모르겠고. 역시, 군부령에 한번 가서 아가씨를 볼…. 너 뭐하냐?”

엔리코르가 펼쳐져 있던 수십 권의 책들을 착착 덮고 있었다.

“내 여동생이! 블란데아 르페브르가! 여자 한 명과 남자 다섯 놈의 뺨에 매주 입을 맞춰 줘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그건 입맞춤이 아니라 가호라니까? 아니, 총사령관은 괜찮았고?”

“한 명과 여러 명은 느낌이 다르지! 그리고 그놈은 감정적으로 뭔가 납득이 되는 놈이었어!”

“아니. 엔리코르. 아가씨가 하는 건 스킨십이 아니고 가호라니까?”

엔리코르는 이미 듣지 않고 있었다. 그는 분노에 찬 손짓으로 하인을 불렀다. 새 옷을 가져오라고 말한 엔리코르가 이를 갈았다.

“나 군부로 간다.”

헥토르가 바로 끼고 있던 안경을 내렸다. 그의 하늘색 머리카락이 주인의 두근거림에 화답하듯 산뜻하게 산들거렸다.

“나도 아가씨 보러 갈래!”

“넌 오지 마.”

“왜!”

“퍽 하면 블란이 피나 뽑을 생각에 설레 있는 놈이….”

“난 그냥 아가씨 볼 생각에 설레는 거야.”

“블란데아가 오파츠와 조금도 상관이 없는 레이디라면?”

헥토르는 심장이 멈춘 것 같은 표정으로 빙그레 웃었다.

“생각만 해도 여전히 설레는걸?”

“그딴 기만적인 표정으로… 잘도….”

“아닌데. 진지하게 받지 마. 상처라고. 나 아가씨 진짜 좋아하는데.”

“됐어. 네놈이 제일 위험해. 절대 오지 마. 군부령 근처 10km로도 오지 마.”

몇 시간 후.

엔리코르는 비너스를 비롯한 기사들을 대동해 군부령으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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