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군부령의 방식-(4) (115/190)

며칠 후.

군부의 분위기는 누가 봐도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제1 지휘관님!”

“생도 리암 베르너! 제1 지휘관님에게 인사드립니다!”

그 일로부터 며칠이 지났다. 이제 더는 긴장과 욕망에 잠겨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 하고 외치는 생도가 없었다.

호칭과 인사가 며칠 전보다 훨씬 나아진 생도들을 본 나는 그럭저럭 만족했다.

연무장은 그날로부터 네 번 더 개방됐으니….

사람은 총 400바퀴를 뛰면 이성이 욕망을 압도하기 시작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느슨해진 군부에 기강이 좀 잡혔어.”

“…좀 잡힌 게 아닌 것 같은데요, 블란데아 경. 역대 최고로, 아주 제대로 잡혔습니다.”

“이게?”

“이게요.”

“별일이네. 난 슐로이츠 경이 더 무서우실 거라고 생각했어.”

“그분은 그냥…. 음…. 기어오르면 마르크 헌트처럼 만들죠. 기억나시죠?”

알지. 입이 쭉 찢겼던.

“그럼 내가 덜 가혹한 거잖아.”

“전방위적으로 기강을 잡는 블란데아 경이 더 가혹하십니다.”

“가혹하지 않아.”

“대체 르페브르 기사단은 어떤 삶을 보내고 있는 겁니까? 연무장 400바퀴씩 뛰라고 하는 분 저 진짜 처음 봐서 그렇습니다.”

‘기사단이라 그런가….’

라파엘의 말을 흘려들으며 나는 시계를 한번 쳐다보았다. 지난 며칠 그놈의 징계 때문에 매일매일 슐로이츠를 찾아갔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총사령관님께서는 왕실에서 온 사람과 독대 중이십니다.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다고 절 보내셨습니다.”

‘시간이 비니까 이때 일정을 좀 처리해야겠네.’

며칠 동안 슐로이츠의 집무실 밖으론 잘 나오지도 못했는데.

징계는 징계고, 나는 할 일이 많았다.

15분 후.

“청색 가호 판별자들은?”

“세 조로 나뉘어 대기 중입니다. 경이 말씀하신 대로 명단을 짰습니다.”

가호의 유효 기간은 여전히 일주일이었는데, 생도들이 대거 입단하면서 내 스케줄 자체가 빡빡해졌다.

명단을 엄격히 나눈 후 스케줄을 관리해야 하는 터라, 이틀 전부터 슐로이츠는 아예 내게 전담 담당자를 배정해 버렸다.

머리가 좋으며, 계급이 높고, 나와 그간 교류한 경력이 긴….

“쨘! 접니다, 블란데아 경의 영원한 따까리!”

라파엘은 의기양양하게 웃으면서 말했다.

“블란데아 경께서 미리 말씀해 주신 대로 티타니아 로시에 생도, 아센 로시에 생도 괄호 열고 남 괄호 닫고, 그리고 힐드온 케트펠 생도 괄호 열고 남 괄호 닫고….”

“성별은 왜 그렇게 붙이는 거야?”

“아그네스가 꼭 붙이라던데요.”

“왜?”

“저야 모르죠. 당분간 제일 중요할 거라고 했습니다.”

라파엘은 묘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생각의 흐름도 마침 멎었다.

“들어와.”

낯익은 얼굴, 총사령관 직속 기사 중 한 명이 손에 뭔갈 들고 있었다.

“제1 지휘관님. 청색 가호에 대한 새로운 지침서가 완성되어 전달 드리러 왔습니다.”

“지침서?”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르페브르에서 보내온 거야?”

“아닙니다. 군부에서 단독으로 제정했습니다. 총사령관님의 직인으로 통과되었으며, 오늘부터 유효하니 참고 부탁드리겠습니다.”

나는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동안 슐로이츠는 가호에 대한 건 독립적인 부분으로 취급했는데 갑자기?

지침서를 펼쳐 보자, 이내 천천히 웃음이 나오기 시작했다.

군부에서는 르페브르 가문의 기품을 어느 상황에서나 최우선으로 존중한다. 가호를 내리는 유일한 주체인 르페브르 직계의 제한된 체력을 고려하여….

공문서 특유의 엄격한 형식을 굳이 헤칠 필요도 없었다.

청색 가호의 피대상자가 동성일 경우에는 르페브르의 판단을 자율적으로 따르나, 이성일 경우에는 뺨을 제외한 접촉을 허가하지 않는다.

“…….”

풍기 문란이라는 단어도 없고, 그것과 비슷한 분위기의 표현도 없고. 사실 그런 표현들을 갖다 썼으면 이 긴 문서가 세 문장으로 확연히 줄어들었을 것이다.

효율을 극도로 따지는 슐로이츠의 성격상 그게 더 어울리기도 했고.

하지만 이 공문서 어디에서도 성적인 얘기는 없었다. 언급 자체를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결백할 정도로 지워 놓으니 이 문서에 남은 건 그저 르페브르에 대한 고집적인 배의만이 남아 있었다.

이 군부의 총책임자인 남자에게 르페브르라곤 나 하나밖에 없으니 전부 나를 위한 말로 봐도 좋을 것이다.

나는 괜히 글씨 위를 한번 쓸어 보았다.

딱딱한 군부 문서일 뿐인데, 사이사이 어떤 마음이 묻어 나오는 것 같아서.

어쨌든 이 덕에, 힐드온 같은 남주 놈이 입에다가 가호를 내려 달라고 버럭 큰소리를 내면 근처 준사관들이 잠깐 머뭇거릴 일은 없겠군.

지침서까지 있으니 이젠 힐드온 케트펠 같은 놈이 또 나오면 즉각 징계를 먹일 수 있게 되었다는 소리다.

군부 내 특별 법령이 아예 새로 선포되었다는 말이니까.

“그러고 보니 블란데아 경. 힐드온 케트펠 생도가 근신 처분을 받았다고 합니다.”

‘벌써?’

“같은 동기 세 명과 주먹다짐을 벌였는데….”

‘진짜 난놈이네.’

“힐드온 케트펠 생도가 제일 덜 맞아서, 사실 거의 안 맞아서 그놈은 바로 감옥에 처넣었고, 곤죽이 된 다른 놈들은 병실로 처넣었습니다. 물론 끝나면 그놈들도 다 감옥으로 가게 될 겁니다.”

“그래. 알았어.”

“그럼 힐드온 케트펠 생도의 가호 일정을 따로….”

“자기가 못 받은 건데 왜? 내가 시간을 따로 빼 줘야 하나?”

“아닙니다. 감히 제1 지휘관님의 시간을요. 가호가 없으면 얼마나 힘들어지는지 겪어 봐야 좀 고분고분해질 것 같은 놈이기도 했습니다.”

‘그 정도로 고분고분해질 놈은 절대 아니긴 하지만…. 여주가 들어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는데.’

누가 남주 아니랄까 봐 여주 아니면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고. 제어가 안 된단 소리였다.

그냥 힐드온 케트펠을 괴수들 사이에 던지고 이 책의 종결을 맺을까 하는 생각이 실없이 스치다 사라졌다.

남주가 죽고 여주도 안 나타나면 소설은 끝이지 않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금세 청색 가호 판별자들이 대기하고 있는 곳에 다다를 수 있었다.

티타니아 로시에와 그녀의 남동생인 아센 로시에였다.

‘책에서는 둘이 여주 때문에 사이도 아주 안 좋은 걸로 나오던데 왜 또 나란히 입단했을까.’

심지어 지금은 사이가 별로 나빠 보이지도 않았다. 내가 티타니아에게 보냈던 오파츠 때문인가?

“제1 지휘관님.”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 앞에 멈춰 섰다.

아센 로시에는 작중 여주인 루리 로시에와 정말 비슷하게 생겼다. 저렇게 닮았으니, 누가 봐도 피가 섞인 혈연임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였다.

오히려 장미꽃처럼 화려한 티타니아가 우유 소금 스프 위에 뜬 이물질처럼 보이기도 했고. 티타니아의 열등감을 자극하던 부분이었다.

“제1 지휘관님. 아센 로시에 생도입니다.”

아센 로시에는 아주 긴장한 얼굴이었다. 그는 차렷 자세로 굳어 나를 쳐다보았는데, 내가 그의 뺨에 입을 맞추기 전부터 숨을 멈추더니 입술이 닿자 곧 죽을 것처럼 바르르 떨었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가호는 늘 그랬듯 따스하게 끝났다.

사실 나는 남자 생도에겐 별 관심이 없었다.

지금 제일 궁금한 건 티타니아 로시에였다.

‘군부에서는….’

아니, 슐로이츠는.

이성에겐 뺨까지. 동성에겐 입술까지 허용하겠다고 했지. 같은 성별끼리 욕실과 탈의실을 공유하는 것과 비슷한 범주로 묶으려는 건 알겠는데.

‘흠.’

나는 뺨보다는 입술에 가호를 내리는 게 체력 소모가 확실히 적었다. 뭐가 다른지는 당연히 아직 몰랐고.

이젠 다수에게 가호를 내려야 하니 이참에 제대로 확인을 해 보고 싶었다.

“…티타니아 로시에 생도입니다.”

나는 티타니아의 뺨을 잡았다. 티타니아는 나보다 키가 두 뼘쯤 작아서, 내가 그녀에게 고개를 살짝 숙여야 했다.

“……!”

가호는 늘 그렇듯 오래 걸리지 않고 끝났다. 입술을 대고 있어야 하는 물리적 시간에 비해 훨씬 시간이 빨리 갔기 때문이다.

‘얼굴 엄청 빨개졌네.’

나는 라파엘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르페브르 저택으로 편지를 보내야 하는데. 언제부터 보낼 수 있을까?”

“아….”

나를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보고 있던 라파엘이 헛기침을 했다.

“흠흠. 모레부터 바로 가능하실 겁니다. 군부 전령의 경로에 관해 다시 보고 올리겠습니다.”

생도들이 대거 입단하면서 이제 가호와 오파츠에 관한 것은 완전히 공문서로 취급되었다.

군법에 따라 나 역시 당분간은 사적으로 르페브르 저택에 편지를 보낼 수가 없었다.

걸음을 막 옮기려던 그때.

“이, 이러시면 어떡해요!”

불덩이처럼 타오르는 얼굴로 티타니아가 새되게 외쳤다.

“가, 갑자기 입을 맞추시면…! 아무리 르페브르 경이라도…!”

“인공호흡이라고 생각해.”

“…뭐라고요?”

“입단 서류에 가호에 대한 조항이 분명 명시되어 있었을 텐데?”

“예, 블란데아 경. 25조 1항 1목에 추가되었습니다.”

라파엘이 상냥하게 덧붙여 주었지만, 티타니아는 들리지도 않는 듯했다.

“수, 숨을 불어넣지 않았잖아요?”

“그게 문제야? 불어넣어 줘?”

“그런, 그런 뜻이 아니라…!”

“라파엘 경.”

“예, 블란데아 경.”

“생도 생활 규정도 추가로 수정되지 않았어?”

“수정됐습니다.”

라파엘이 바로 티타니아에게 근엄하게 말했다.

“티타니아 로시에 생도는 본 지휘관의 말을 똑같이 복창합니다.”

“…예.”

“인공호흡은 입맞춤이 아니다.”

“이… 인공호흡은… 입맞춤이….”

“크게 외쳐야지.”

내가 선량한 목소리로 주의를 주자, 라파엘이 바로 목소리를 높였다.

“인공호흡은 입맞춤이 아니다!”

“인공호흡은 입맞춤이 아니다!”

“좋아.”

나는 미련 없이 옆으로 걸어갔다. 와중에 숨까지 죽이고 옆에 있던 티타니아의 동생, 아센 로시에가 멍하니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나도 여자로 태어날걸….”

“……?”

잘못 들었나 싶어서 쳐다보는데 그와 눈이 마주쳤다.

“……!”

아센 로시에의 얼굴이 화르르 불타올랐다.

저렇게 보니 외양상으로는 닮은 점이 전혀 없는 티타니아 로시에와 진짜 남매처럼 보였는데, 그게 어쩐지 기분을 괜찮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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