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8. 군부령의 방식-(2) (113/190)

자, 생각을 해 보자.

슐로이츠는 군부의 총사령관.

이 아름다운 남주 놈은… 아직까지는 말단 생도.

그리고 슐로이츠는 내 예상보다 더 내게 몰두하고 있는 남자였다.

방금 전, 남주 놈인 힐드온의 말이 슐로이츠에게 어떻게 들렸을지는 굳이 묻지 않아도 충분히 짐작이 갔다.

‘당장 자기 입에 가호를 내리라고?’

군부 내 최고 권력자인 총사령관이, 이런 하찮고 사적인 일 때문에 한낱 말단 생도와 티끌만큼이라도 엮이는 건, 사실 말이 되지 않았다.

당장은 몰라도 장기적으로는 남주인 힐드온에게 특혜로 작용될 일이었다. 신데렐라도 저 정도는 아닐 것이다.

내가 비록 슐로이츠에게 빌빌 기긴 했으나, 타고나기는 르페브르의 직계였다. 내가 두르고 있는 혈통은 거대했으며, 나는 어릴 적부터 신분의 엄중함에 대해 분명히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라자크 왕국의 군부 특별 자치령에선 계급이 곧 신분이었다.

다시 말해 나는 지금 이 아름다운 남주 놈이 매우 못마땅했다.

“이 건방진 새끼.”

“…커흡.”

방금 당황 섞인 목소리는 내 옆에 서 있던 따까리 라파엘과 준사관들의 것이었다.

나는 마찬가지로 제 귀를 의심하고 있는 힐드온 케트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뭐 그리 놀라. 본인도 남주라 그런지 어린 시절이 평탄하진 않았던 거 내가 읽어서 다 아는데.

지금도 사정이 있어서 군부에 들어온 거고.

“라파엘 클로비스 경.”

“예, 블란데아 르페브르 경!”

“내 이하 군부 계급은?”

“제1 지휘관님 아래 여섯 명의 지휘관이 있으며, 이하 64명의 준사관! 이하 숫자에 제한이 없는 상부사관과 하부사관! 이하 생도! 이하 군부령 소속 병사들이 제1 지휘관님의 명령 아래 있습니다!”

너와 나 사이에 이만큼의 계급이 있다고. 나는 눈썹을 슬쩍 올리며 힐드온 케트펠을 돌아보았다.

“힐드온 케트펠 생도.”

“…….”

대답이 고분고분 돌아오지 않았지만 그 정도야 예상했다.

“지금부터 본 지휘관이 호명하면 ‘예’ 뒤에 본인 이름 붙여서 대답한다.”

“…예. 힐드온 케트펠 생도.”

“입니다.”

“…입니다.”

내 말을 억지로 따라 하는 남주 놈을 보면서, 나는 뒷짐을 지고 힐드온 케트펠 앞을 천천히 거닐었다.

“분명 신규 생도들은 부사관들에게 교육을 받았을 텐데 말이야.”

“…….”

“교범에 따라 상관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지도 숙지하지 못했나? 머리가 그렇게 나쁘나?”

“…아닙니다.”

이를 악물고 말하는 걸 보니 또 꼴에 자존심은 상하는 모양이다.

내가 여주거나 여조였으면 어땠을까? 남주의 이런 모습도 나쁘지 않았겠지만, 어쩌면 편애적인 마음으로 매력도 충분히 느꼈겠지만 나는 이놈의 상관이었다.

힐드온 케트펠.

이 남주 놈이 꼴에 상처 남주랍시고, 미친 짐승처럼 군부령을 헤집고 다니느라 군부 지휘부가 얼마나 골머리를 앓았는지 책에서도 다 봤고.

내가 지휘부에 있는 동안은 어림도 없지.

“이 새끼가 아주 빠져 가지고.”

“커흡.”

라파엘이 또 숨을 들이켰다. 나는 딱딱하게 굳어 나를 보는 남주 놈, 힐드온 케트펠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입을 열었다.

“오늘 잡힌 2조부터 마지막 조까지 가호 일정은 임시로 취소한다.”

“…예!”

“힐드온 케트펠 생도와 같은 기수들 전부 소집해.”

“네, 알겠습니다!”

라파엘의 대답에, 화가 나 있는 게 분명했던 힐드온 케트펠의 얼굴이 점점 어리둥절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턱짓을 하며 말했다.

“군장 싸.”

“……?”

“힐드온 케트펠 생도 포함 전부 연무장 100바퀴다.”

“……?!”

“10분 줄 테니 생도 연무장으로 집결해. 한 명이 늦을 때마다 50바퀴씩 추가한다.”

힐드온 케트펠은 서서히 상황 파악이 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보라색 눈동자는 당장이라도 날 뜯어 먹어 버리고 싶어 하는 것처럼 형형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래. 뭐, 배경이 아주 대단한 놈이었지. 성격도 그렇고.’

대단하긴 한데 르페브르보단 대단하지 않아서 상관없었다.

“안 움직여? 더 늦었다가는 동기들이 생도를 산 채로 발라 먹을 텐데.”

“…….”

“정상적인 귀족들도 생각만큼 고아하기만 하지 않아. 힐드온 케트펠 생도.”

“……!”

라파엘이 힘껏 소리쳤다.

“뛰어!”

흠칫한 힐드온 케트펠이 연기를 쐰 토끼처럼 후다닥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건 설마, 하는 표정으로 나와 힐드온의 대화를 숨죽이고 듣던 다른 신규 생도들도 마찬가지였다.

출발선의 방아쇠를 당긴 것처럼 우르르 한 방향으로 뛰어가는 생도들을 보면서 나는 뒷짐을 진 채 걸음을 옮겼다.

슐로이츠가 오던 쪽과는 다른 방향인지라 미처 그의 표정을 살피진 못했지만, 별말이 없으니까 괜찮겠지.

‘가혹 행위라고 또 뭐라고 그러는 거 아니야?’

약간 걱정이 들었던 그때. 라파엘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블란데아 경. 설마 진짜 연무장을 100바퀴나 뛰게 하실 겁니까?”

“따까리.”

“시정하겠습니다!”

‘얘도 저거에 맛 들인 것 같네….’

라파엘이 서둘러 내 옆을 따라오며 말을 이었다.

“아니, 도대체 어디서 그런 걸 보고 오신 겁니까? 르페브르 기사단은 신규 기사를 그렇게 가혹하게 굴립니까?”

죽기 전에 주워들은 것들이 있다고 차마 말은 못 했다.

“귀족 출신들한테 그렇게 굴 수 있는 건 블란데아 경밖에 없을 겁니다.”

“르페브르잖아.”

“그뿐만이 아니잖습니까. 오파츠에 가호도 내리실 수 있고요. 사실상 실세…. 신분과 계급이 합쳐지면 어떻게 되는지 제 두 눈으로 이렇게 확인을 하네요. 제가 평생 경의 줄을 잡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너무 행복합니다.”

“난 페니만 안고 가려고.”

“예? 서운합니다. 저도 끼워 주십시오. 그간 군부령에서 블란데아 경을 보좌한 게 제가 아니고 누구였습니까?”

“따까리.”

“말이 많았습니다!”

***

“…연무장을 100바퀴나 뛰라는 말은 실제론 처음 들어 봅니다. 총사령관님.”

디오스가 중얼거렸다.

그는 오랜만에 보는 블란데아의 모습에 은근히 신경을 기울이고 있다가, 나중엔 그녀의 명령 하나하나에 귀를 의심했다.

“죽진 않겠지.”

무심한 대답과는 달리 슐로이츠의 눈은 라파엘과 저쪽으로 걸어가 버리는 블란데아의 뒷모습에 고정되어 있었다. 한 갈래로 높게 올려 묶은 금발이 실타래처럼 부드럽게 출렁였다.

“이 건방진 새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