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프로키온 영지-(29) (111/190)

슐로이츠가 빈정거리며 대답했다.

“더 마실 기력이 남아는 있나? 그렇게 취해 놓고.”

“……?”

나는 뺨에 손을 대 보았다. 어리둥절한 표정이 눈에 읽힌 모양이다. 슐로이츠는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더니 내 뺨을 감쌌다.

달라붙는 슐로이츠의 손이 시원하게 느껴졌다. 한겨울의 눈송이를 한가득 움켜쥔 것처럼. 그제야 내 손과 뺨이 함께 열이 올라 달아올라 있다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라파엘 녀석이 따라 주는 대로 족족 들이켜면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슐로이츠의 목소리에 배어 있는 희미한 불쾌감에 나는 혹시나 싶어서 테이블 아래로 치워 놓은 병을 들어 보았다. 큰 병이 텅 비어 있었다.

“내가 아무래도 상관으로서 부하 지휘관에게 멋있게 보여야 하니까….”

“기강 한번 참 완벽하고 가혹하게 잡는군. 그런 건 누가 가르쳤나?”

라자크 왕국의 군권을 모조리 쥐고 있는 남자에게 군부 기강을 가혹하게 잡는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묘했다.

은근히 민망하다고 할까, 비슷한 농도로 긴장이 된다고 할까. 총사령관에게 감히 하극상을 하는 듯한 기분이다. 우습게도 미약한 쾌감이 들기도 했다.

‘내가 취하긴 했나 보네….’

그러니 슐로이츠의 얼굴만 보면 웃음이 나오는 모양이고.

슐로이츠의 빈 잔에 술을 따라 주려다 병을 빼앗겼다. 그는 혀를 차며 직접 잔을 채웠다. 슐로이츠가 마저 채워 준 내 잔에서도 적자색이 반짝였다.

술을 가만히 마시고 있으니 의문이 하나 들었다.

‘슐로이츠 얼굴이 문제인 걸까? 아니면 술이 문제인 건가?’

슐로이츠가 이마를 한 번 가볍게 찌푸려서 잔을 비우는 속도를 자제하고 있는데도, 슐로이츠의 얼굴을 마주 보면 자꾸 술이 넘어갔다. 미인과 독주는 다를 바가 없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인사불성으로 취하면 안 되는데.’

걱정이 들어 잔을 아예 내려놓고 슐로이츠나 바라보았다. 하지만 보면 볼수록 이상했다. 슐로이츠는 아예 취하지 않는 걸까?

‘하기야 내가 더 많이 마셨으니까….’

아까부터 라파엘이 계속 내 잔을 채워 줬잖아.

슐로이츠가 이미 나보다 더 많은 병을 비우고 있긴 했지만 나는 본새 없이 편파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커다란 테이블 위에 가득한 빈 병과 잔들을 보고 있자니 문득 입이 열렸다.

“이런 무거운 테이블을… 발로 어떻게 그렇게 쉽게 차는 거야?”

“왜. 그런 것도 배우고 싶나?”

“그냥 물어본 거야.”

새침하게 말한 나는 슬쩍 덧붙였다.

“…사실 배우고 싶어.”

슐로이츠가 헛웃음을 지었다.

“아주 별별 가혹 행위를 다 하려는 모양이야.”

“네가 나한테 어떻게 했는지는… 생각 안 나나 봐?”

“네 상관은 이유가 있었거든. 블란데아 르페브르.”

가볍게 말한 슐로이츠가 갑자기 내 쪽으로 몸을 숙였다. 짙고 강렬한 포도주 냄새가 훅 끼쳤다. 순간 어깨가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었다.

슐로이츠의 손이 내 발을 감싸더니 가늠하듯 주물렀다. 내내 신고 있던 실내용 슬리퍼가 카펫 위를 굴렀다.

뭐 이렇게 손쉽게 사람 발을 가져가 만져…? 내 발이 내 것이 아니라 본인 것이라고 해도 믿을 속도였다.

그런 생각이 스치는 것도 잠시. 슐로이츠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넌 안 되겠어.”

“…….”

“네가 먼저 부러지겠는데.”

“…….”

“정 공주님이 걷어차고 다니고 싶다면 군부령 테이블들을 다 가벼운 걸로 바꿔 놔 줄까.”

농담인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질문을 하며 슐로이츠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넋을 놓은 채 멍하니 슐로이츠를 바라보고 있던 나는,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슐로이츠의 손에 붙잡혀 있는 발을 조심스럽게 빼내면서 괜찮다고 말했다.

“테이블에 사람 올려 두는 방법도 궁금하나?”

이어진 슐로이츠의 질문에 하마터면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아, 그렇지. 테이블을 발로 걷어차고 날 휙 올려놨으니까.

그는 사람을 짐짝처럼 올리는 게 습관인 것 같은 남자였다. <미친 미인의 최후>에서 가끔씩이나마 보던 슐로이츠의 서술이었으니까.

지키는 병사들을 뚫고 회의실에 난입한 남주. 여주를 구하러 가야 한다며 박박 우겨 대는 남조. 그들의 멱살을 차례로 낚아채, 회의 테이블 위로 가차 없이 내던지던 짜증이 난 얼굴의 슐로이츠….

“대체 이 새끼들한테 누가 발언권 허락해 줬지?”

아직도 나는 슐로이츠의 지문들을 잊지 못한다.

“슐츠.”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제 군부로 가면 남주가 있을 거고, 여주도 만날 거고….

“넌 원래 테이블 위에 사람들 잘 던지니까… 옆에서 보다 보면 나도 곧 알게 될 것 같아.”

“던진 적 없어.”

“분명히 나를….”

“넌 올려놓은 거고. 술이나 마저 마셔. 아니면 그만 마시든지.”

남주랑 남조랑 남조랑 남조랑….

“아무튼 다른 사람을 분명….”

웃음기 섞인 내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갑자기 시야가 훅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엉덩이에 딱딱한 게 닿아 왔다. 순식간에 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슐로이츠가 테이블 위에 나를 올려놓은 것이다. 이만한 높이의 테이블에 앉고 나서야 슐로이츠와 눈높이가 얼추 맞았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바로 눈앞에 있는 슐로이츠의 이마가 평소보다 조금 파여 있었다.

“누굴 생각하고 있는 건데.”

“그….”

“너 말고 이럴 생각이 없다고.”

“…….”

심장에서 순간 덜컥거리는 소리가 들린 건 내 착각이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 몸이 휙 들리면서 얼굴에 열이 급하게 올랐다. 술기운으로 인한 열기였다. 뺨과 이마가 뜨거워지며 순간 강한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반사적으로 내 양 허벅지 옆을 짚고 있는 슐로이츠의 팔을 붙잡았다.

슐로이츠가 너무 가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그동안 우리는 무수하게 입을 맞추긴 했지만, 이전에는 슐로이츠가 화를 낼까 봐 전전긍긍하며 그가 키스를 하는 대로 끌려다녔잖은가.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전혀 달라서….

갈증이 났다. 목이 심하게 말랐다. 어떤 것이든 마셔서 당장 목을 축여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어쩌면 오를 만큼 오른 취기 때문에 제정신이 아닐 수도 있었다. 나도 모르게 옆에 있을 잔을 더듬거리게 됐다.

슐로이츠의 눈에는 내 이 미숙한 행동이, 짙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이 분위기를 이기지 못해 뒷걸음질을 치는 모습으로 비추어졌던 것 같다.

그는 여전히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직접 손을 움직였다. 어느새 내 손에는 술이 찰랑이는 잔이 쥐어져 있었다.

“마셔, 블란데아 르페브르.”

어디까지 도망을 치는지 보겠다고.

귓가에 울리는 슐로이츠의 목소리는 딱 그렇게 왜곡돼 들렸다. 그의 음성은 다정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았으나, 이 테이블 위에 나를 올려놓은 순간부터 슐로이츠의 눈동자는 내게 완전히 붙박여 있었다.

슐로이츠의 짙은 눈이 너무도 분명한 욕망으로 타오르고 있어서 자꾸 머리에 열이 올랐다. 귀가 달아올랐다. 불길이 붙은 것 같았다.

침착하게 마셔야 한다고 수없이 되뇐 것도 무색하게, 긴장으로 인해 손이 다 떨렸다. 똑바로 마시지 못한 꿀 색 술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민망한 얼굴로 닦아 내려던 손등이 그대로 붙잡혀 내려졌다.

직후 슐로이츠가 내 얼굴 쪽으로 고개를 숙였다.

입을 맞출 거라는 예상은 빗나갔다. 슐로이츠의 입술이 내 턱에 묻은 술을 훑었다. 숨이 멎는 기분도 잠시. 슐로이츠의 입술이 목을 훑으며 내려가기 시작했다.

방금 전, 흘린 술이 가느다란 줄기를 이루며 흘러내려 간 방향이었다.

슐로이츠의 입술이, 가볍게 벌어진 틈으로 이따금 느껴지는 혀끝이 내 목을 핥으며 천천히 내려가고 있었다.

움푹 팬 쇄골 위로 내려앉은 슐로이츠의 혀가 어떻게 술을 훑었는지 모르겠다. 아니, 애초에 거기까지 술이 흘러내려 갔는지도 모르겠고….

슐로이츠의 짙은 머리카락이 내 시야를 어지럽게 방해했다. 각도가 조금 바뀌었다. 목과 어깨를 잇는 선이 한 번 따끔하게 깨물렸다. 몸이 움찔 떨렸다. 슐로이츠의 팔이 내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나를 옴짝달싹도 못 하게, 품에 파묻은 슐로이츠는 점차 아래로 입술을 내렸다.

물기 어린 뜨거운 혀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사실 내가 사람이 아니고 설탕이나 꿀을 빚어 만든 사탕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몽롱하게 들 정도였다. 슐로이츠의 혀가 내 피부 위로 미끄러질 때마다 아랫배가 자꾸 조여들었다.

당장이라도 내 온몸을 핥아 삼킬 것 같던 슐로이츠의 혀는 가슴을 덮고 있는 옷감에 닿자 멈췄다. 내 허리를 강하게 껴안고 있던 슐로이츠의 팔에 아플 정도로 힘이 들어간 순간이었다.

슐로이츠가 고개를 들어 올리더니 내 머리를 붙잡고 흉포하게 입을 맞췄다. 입 안을 거칠게 파고드는 혀가 어찌나 앞뒤가 없던지 혀뿌리가 뽑히는 것 같았다. 턱이 다 얼얼했다.

얼마나 미친 듯이 입을 맞췄는지 모르겠다. 나를 거의 터뜨릴 듯 껴안고 숨도 못 쉬게 몰아붙이던 슐로이츠는 침실을 밝히던 수정등 두 개가 꺼지고 나서야 고개를 천천히 들었다.

슐로이츠의 눈가 역시 붉어진 게 그나마 만족스럽긴 했다. 하지만….

나는 헐떡이는 숨을 간신히 갈무리하며 물었다.

“꼭 그렇게… 아프게 입을 맞춰야 해?”

“아니었으면 옷을 뜯어 버렸을 것 같아서.”

“…….”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것 같은 눈으로 한다는 말이….

나는 홱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이내 턱이 붙잡혀 슐로이츠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아까보다 훨씬 더 부드럽게 입을 맞추더니, 오래지 않아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호흡이 조금 진정되기 시작했다.

슐로이츠는 내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겨 주며 말했다.

“너와 결혼하고 싶어.”

심장이 무심코 내려앉았다.

“…퇴단하면 할 거잖아.”

“지금 당장 하고 싶다고.”

“초야 때문이라면….”

“그게 기대가 안 되는 건 아닌데.”

“…….”

“1년쯤 너와 둘이 조용한 곳에 처박혀 있고 싶어.”

그게 그 말 아닌가…?

의아했지만 슐로이츠가 나를 또 홱 껴안는 바람에, 미처 되물어 보지는 못한 질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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