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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프로키온 영지-(26) (108/190)

슐로이츠의 뇌리 깊숙이 새겨진 말이 떠나질 않는다. 영원히 뱉어 내지 못할 것 같았다.

첫사랑에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소년. 그 얼간이 같은 사심을 제외하고서라도, 사실 블란데아의 모든 것이 그랬다. 그녀에게선 이제 무언가를 속이려는 사람 특유의 깊은 긴장감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를 적극적으로 달래는 절박함이나 느껴졌을 뿐이지.

블란데아가 꺼낸 ‘꿈’이란 변명은 모호했고, 때에 따라서 너무도 변주가 쉬운 도구였지만 적어도 슐로이츠를 감정적으로는 납득시켜 줄 수는 있었다.

절반은 그녀에게 완전히 기울어져 있는 감정으로 인한 수긍이었고, 절반은 총사령관다운 판단이었다. 어쨌든 그 말 외에는 도무지 블란데아의 지난 행동들이 이해가 가지 않기도 했다.

내내 품어 왔던 의문에 결론이 났으나 도무지 이성적으로 되짚을 만한 여유가 없다. 블란데아를 향한 온갖 열망이 슐로이츠를 그득하게 집어삼킨다.

블란데아는 슐로이츠가 자신을 빤히 보자 이상함을 느낀 것 같았다.

“슐로이츠?”

“슐츠라고 불러.”

“슐츠.”

“그래. 블란데아.”

슐로이츠는 블란데아의 손에 깍지를 끼고 잡았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니 아까까지만 해도 어두운 수렁을 헤매는 것 같더니 그녀의 말 몇 마디가 뭐라고 이렇게 보드라운 솜털을 만지는 듯한 기분이 드는 건지.

“넌 애칭이 없나?”

“난….”

“엔리 같은 건 말고.”

“…….”

다소간 짓궂은 심술이 묻어 나오는 질문이었다.

“주방장에게 듣기로는 르페브르에서 아주 사랑을 받고 자랐다던데. 공주님이니 가족들이 애칭을 부를 거 아냐.”

블란데아가 눈썹을 약하게 찌푸리고는 대답했다.

“애칭이라면 있어. 블란.”

“블란.”

“부르지 마.”

“…왜.”

“멋대로 내 애칭을 빼앗아 가는 남자에겐 어림도 없어.”

“…….”

입가에 감돌던 슐로이츠의 미소가 천천히 사그라졌다.

그는 익숙하지도 않은 사과를 몇 번이나 건넸지만 블란데아는 끝까지 완고하게 허락을 해 주지 않아 그를 드물게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결국 가능했던 건 블란데아를 매만지는 정도였다. 그마저도 블란데아가 없는 기력을 죄 쥐어짜 내 흐물흐물 녹아내리기 시작한 터라 가능한 일이었다.

‘그랬는데….’

블란데아는 자신이 마치 아이에게 안긴 곰 인형이 된 것 같은 착각까지 들었다.

“왜 사람을… 장난감처럼 안아.”

“내가 공주님 장난감이겠지. 넌 날 잘도 갖고 놀았잖아.”

“정말, 걸핏하면….”

블란데아가 슐로이츠의 가슴을 밀어내며 그를 노려보았다.

“놔.”

“농담이야.”

“놓으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으면 팔다리에 힘이나 좀 넣든지.”

“…….”

“못 하겠으면 이대로 있어.”

자신이 지탱해 놓지 않으면 그대로 매트리스 위로 주르륵 쓰러질 것 같으니까.

슐로이츠는 블란데아를 껴안은 채, 규칙적으로 뛰는 맥박을 느꼈다. 그녀의 호흡도 역시 정상이다. 여전히 축 늘어진 몸이 문제이긴 했지만….

헬디가 힘을 줘 말한, 블란데아가 건강하다던 이야기는 일종의 신성한 기도처럼 느껴졌다.

슐로이츠를 안심시키고 그를 불안에서 구해 내고….

그는 그녀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코와 입술을 블란데아에게 처박고 천천히 숨을 내쉰다.

살 것 같았다. 우습게도, 그 말 말고는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러다 문득 드는 의문이 있었다.

꿈속에서라면, 지금은?

“…….”

포근한 계절처럼 블란데아를 온몸으로 한껏 향유하던 슐로이츠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설사 가슴을 갈라 심장을 쪼개 본다고 해도 타인의 마음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품고 있는 마음을 가장 날것으로 표현해 주는 창구가 있다면 그게 눈인지라, 슐로이츠는 자연히 블란데아의 눈을 살피기 시작했다.

가장 깊은 곳까지 남김없이 헤집어 보고 싶은 욕망으로 블란데아의 눈동자를 뜯어본다. 강렬하고 희귀한 붉은색. 그녀의 눈동자가 이보다 흐린 색이었어도 자신에겐 그 어떤 빛보다 깊숙이 박혔을 텐데.

“…슐츠.”

“음?”

블란데아가 미간을 천천히 찌푸리더니 슐로이츠가 감히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을 물었다.

“내가 또… 너를 화나게… 했어?”

“…뭐?”

갑자기 그게 또 무슨 말인지.

“아니면 왜 그렇게… 봐? 또 갑자기… 죽이고… 싶어졌어?”

“…….”

“슐츠?”

“그게 무슨 말이야. 대체.”

“그런 눈으로 볼 때마다… 항상 날 죽이고 싶다면서… 화를 냈잖아.”

슐로이츠는 순간 뒤통수를 아주 거하게 얻어맞은 기분에 휩싸였다. 블란데아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애칭 때문에… 그래?”

“그런 게 아니라.”

도대체, 그딴 게 아니라…. 슐로이츠는 천천히 말을 골랐다.

“…화나지 않았어, 블란데아. 그냥 본 거고.”

“아니면 다행… 이고.”

블란데아는 자신이 방금 전 왕국 총사령관의 머리를 후려쳐 말문을 죄다 잃게 했다는 사실에는 관심도 없는 듯, 아니 정확히는 그런 사소한 것에 쏟을 체력이 더는 남아 있지 않은 듯 느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는 갓 잠에서 깬 아기처럼 몹시 졸려 보였다.

실제로 잠이 무겁게 쏟아지고 있는 중이기도 했다.

텅 비어 있던 속은 따뜻하게 채워졌고, 자신을 받치듯 껴안고 있는 슐로이츠의 몸은 너무 단단했다. 하늘을 찌르는 커다란 고목에 온몸을 내맡긴 듯 편안한 안정감만 느껴졌다.

와중에도 돌처럼 굳어 제게 고정되어 있는 슐로이츠의 눈길이 이상한 듯, 혹은 의식한 듯.

황금색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붉은 눈동자는 성실히도 그를 봐 주고 있었다. 큰 의미가 없이, 그저 적선처럼 베풀어 주는 시선이겠지만….

슐로이츠는 드물게도 블란데아의 시선을 피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그녀를 바라보며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가늠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슐로이츠는 블란데아의 머리를 아예 제 가슴에 붙이게 했다. 그녀의 온몸을 제 쪽으로 그저 끌고 왔다. 그녀는 저항도 없이 그에게 몸을 기댔다.

자신이 완전히 잠들면 슐로이츠가 침대 위에 똑바로 눕혀 주리라는 신뢰가 어느 정도 포함된 듯, 의심이라곤 한 톨도 없는 반응이었다.

슐로이츠는 블란데아의 등을 천천히 토닥이기 시작했다.

아이가 잘 먹는 포근한 음식을 잘 만드는 요리사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헬디는 아이들을 손쉽게 조종하는 주방장이었다. 특히 아이 때 제대로 아이 취급을 받아 본 적 없다면 나이를 먹을 만큼 먹고도 아이 같은 미숙한 면이 종종 발견되는 터라…. 헬디는 그런 아이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데 탁월했다.

슐로이츠는 아픈 블란데아에게 죽을 먹여 주고 이불을 덮어 주었으니, 이젠 그녀를 완벽히 재워야 할 것 같다는 묘한 의무감이 들기 시작했다.

의무에 목을 매야 하는 군인의 특성, 기사의 매너, 어쨌든 레이디를 배려해야 하는 신사로서, 무엇보다 소년이었던 시절부터 눈앞의 여자에게 아주 오랫동안 빠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남자로서의 근본적인 긴장감 등이 혼재된 결과였다.

아무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무슨 말을….

한쪽 손으로 입매나 매만지다 보니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다. 뇌를 거치지도 않고 말이 흘러나온다.

“예전엔 거울을 보기도 싫었어.”

“…왜? 너… 진짜… 엄청 잘생겼는데.”

하마터면 터뜨릴 뻔한 웃음을 슐로이츠는 간신히 참았다.

어릴 적에 블란데아가 어떤 눈으로 자신을 보았는지 알 수 없는 게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온종일 제 얼굴을 보려고 매일 와 주었다면 항상 자신을 빤히 응시했을 텐데.

슐로이츠는 블란데아의 어린 시절을 두 눈으로 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쉬워서, 그 낯선 아쉬움을 씁쓸하게 되새기면서 블란데아의 보드라운 뺨을 조심스럽게 쓸었다.

“눈이 잘… 안 보여서 그랬어?”

블란데아의 목소리에 슐로이츠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래. 그랬어.”

“지금은?”

“옛날얘기야.”

눈이 제대로 보이지 않던 어린 그가 죽어라 붙잡고 있던 누군가의 그림자가 있었다.

사람이 가질 수 있는 그림자는 반드시 하나뿐이라, 그가 반평생을 붙들고 있던 것은 어느 순간 스스로의 그림자가 되어 있었다.

그 반절만 한 그림자가 슐로이츠의 전부를 삼키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절반이 아니라 전부에 가깝지 않았을까….

인정하기 싫은 회한 따위가 이따금 슐로이츠의 머릿속을 물들이다 사라졌다.

가슴 위에는 나날이 훈장들이 증식하는데 거울을 보면 그저 주인 잃은 개새끼 하나만이 @비쳐 빌어먹게 비참했다.

버려진 자리를 맴도는 스스로의 모습은 얼마나 처량하고 보잘것없었는지는 굳이 되새길 필요도 없었다.

실은, 그래.

그 어릴 적의 추억에 너를 매장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그는 자신을 매장했다.

그러니 블란데아가 그를 떠난 이후 슐로이츠의 시간은 완전히 멈췄다. 흐르질 못했다. 단 한 번도 산 사람처럼 멀쩡히 흘러간 적이 없었다.

그가 죽었다는 말과 다를 바 없는 이야기였다.

누구한테 제 생사 여탈권이 있는지 짐작도 어려웠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를 죽이는 것도, 살리는 것도 온전히 블란데아 르페브르라는 것을.

나름대로 낮은 목소리를 자아내 말한 게 효과는 있었는지 아니면 그냥 깨어 있을 여력이 없는 모양인지 블란데아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마찬가지로 서서히 느려지는 호흡. 슐로이츠는 어느 순간 블란데아가 완전히 잠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녀는 자신이 잠에만 들면 끝이 나는 줄 알았던 모양이다. 그가 자신을 침대 위에 곱게 놓아 주고 갈 줄 알았던 듯한데, 사실 슐로이츠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런 척만 했을 뿐이었다.

블란데아에게 온종일 입이라도 미친 듯이 맞출 수 있을 때가 종종 그리웠다.

그마저도 제법 예전이라, 슐로이츠는 적당히 굶주려 있었으며, 따라서 그는 블란데아의 축 늘어진 손을 들어 올려 손등에나 입을 맞췄다.

이런 걸로 해갈될 갈증은 아니었지만 어쨌든 물 몇 방울 정도의 역할은 해냈다. 결혼 전엔 애칭도 허락해 주지 않는 블란데아가, 아니 어쩌면 결혼 후에도 허락을 안 해 줄 것 같은 그녀가 잘도….

슐로이츠는 허공을 바라보며 깊이 한숨을 내쉬었다.

몸을 좀 떨어뜨려 놔야겠는데.

…붙어 있는 게 낫나.

슐로이츠는 짜증스럽게 이마를 찌푸리다가 블란데아가 뒤척거려 잠시 멈췄다.

극독에 중독된 탓에 근래 들어 체력을 이전처럼 소진하지 못한 게 문제였다. 제 몸 위에 젖은 옷자락처럼 걸쳐져 있는 블란데아가 조금씩 움직일 때마다 슐로이츠는 고문을 당하는 남자처럼 시시각각 굳었다.

그녀가 혹시라도 깨서 이 상태를 알게 되면 더는 품 안에서 가만히 잠들 일은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프로키온 성에선 블란데아가 제 옆에서 잠들어야 했다. 손 하나 대지 못하게 하더라도 그 정도는 해야 했다.

짐승 보듯 자신을 노려볼 블란데아를 상상해 보면….

나쁘진 않은데.

더 솔직하게 말하면 벌써 재미까지 느껴지긴 했지만.

지금 슐로이츠는 블란데아가 꺼지라고 하는 말을 얼마나 더 듣지 못한 척할 수 있을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는 블란데아가 좀 더 깊이 잠들기를, 또 다른 것도 좀 가라앉기를 기다리며 시간을 보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주님. 아가씨를. 어디로 데리고. 가십니까?’

아직까지도 침실 문밖에서 딱 대기하고 있던 페니는 슐로이츠가 블란데아를 안고 나오는 모습을 보자마자 입 모양으로 재빠르게 물었다.

슐로이츠는 적당히 침실, 하고 대답해 준 후 걸음을 옮겼다.

별관이든 본관이든 사람 하나 없어 쥐 죽은 듯 고요한 게 나쁘지 않았다.

블란데아와 결혼 전까지는 그냥 이 정도로 프로키온 성을 유지하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결혼을 하고 나면 프로키온 성의 주인은 블란데아가 되니 그때부턴 그가 성에 간섭할 권한도 팔 할 정도는 증발하게 된다.

어차피 나중엔 블란데아가 원하는 대로 뜯어고치게 될 성을 굳이 덕지덕지 바꿔 놓는 것도 비효율적인 것 같고. 자신은 그녀가 원하는 대로 낭비할 수 있게 가문의 금고나 지금처럼 넘칠 듯 잘 채워 놓으면 될 일 같았다.

프로키온 성에 오기 전까지는 딱히 해 본 적도 없는, 그따위 시시콜콜한 생각이나 하면서 슐로이츠는 본관의 침실에 블란데아를 데려왔다.

커다란 침대 위에 블란데아를 눕히고 나니 그제야 묘한 안정감이 들었다. 애초에 좋지 않은 몸 상태로 그딴 좁고 평범한 기사 숙소에 기어이 들어가는 고집도 참 대단했고….

슐로이츠는 흘러내린 블란데아의 모슬린 잠옷을 목까지 한껏 올린 후 그녀의 곁에 옆으로 길게 누웠다.

그녀가 어린 그의 가슴에 밀어 넣었던 공이 있었다. 서투른 기대와 단순한 소망. 미숙하고 조악했던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굵은 가시들로 빼곡해져 슐로이츠를 괴롭혔다.

그의 가슴을 멋대로 굴러다니며 살점을 있는 대로 난도질하던 공은, 이렇게나 시간이 지났는데도 조금도 닳지도 줄어들지도 않았다.

심지어 이제는 슐로이츠의 심장 깊숙한 곳에 의기양양하게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녀에게 조금만 잘못해도 또 그렇게 사람을 산 채로 죽일 듯 헤집어 놓겠지.

그마저도 괜찮은 것 같다고 생각하는 걸 보니 자신도 아무래도 그다지 제정신은 아닌 모양이다.

***

“……?”

한참 깊이 잠들었다가 정신을 차린 나는 이마를 찡그리고 몸을 일으켰다.

‘뭐야…?’

왜 슐로이츠 침실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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