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야 열이 좀 내렸군요.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는 게 문제이긴 한데….”
“주방에 가서 뭐라도 가져올까요?”
블란데아의 체온을 몇 번씩 신중하게 재던 의사는 좀 누그러진 안색이었다.
“아가씨. 수면제를 그렇게 함부로 드시면 안 됩니다. 그것도 가주님의 수면제를요.”
“…….”
블란데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자 의사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그걸 냅다 드시다니 참…. 가주님이랑 성격 여러모로 비슷하십니다.”
“…아냐.”
“아니시긴요. 제 눈엔 가주님보다 아가씨가 더하십니다. 외람되지만 아가씨가 군부의 총사령관이셨으면, 이미 왕국 전역에 괴수와의 전쟁이 여덟 번은 더 선포되고도 남았을 것 같습니다.”
“…….”
“아. 페니 경. 물수건은 이제 괜찮습니다.”
페니는 블란데아의 이마와 목덜미 그리고 손을 차가운 물수건으로 닦아 주고 있었다. 간밤에 블란데아가 열이 많이 났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그나마 열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다. 아직도 열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의사는 대단히 뛰어난 인재였고, 이 정도는 안심해도 되는 축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앞으론 수면제를 마구 드시지 마십시오.”
옆에서 페니가 물었다.
“그래도 정기적으로. 아가씨가 가주님을 협박.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원래 다루기 힘든 맹수일수록 오직 한 명의 조련사만 따른다는 말이 있지요.”
“저도. 그런 얘기. 들은 적. 있습니다. 따르던 조련사가 죽으면. 맹수가 충격에 빠져서. 사람들을. 전부 공격한다고 하죠. 그래서 그 전에. 사살해야 한다고. 들었습니다.”
“……?”
비유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블란데아가 고개를 들었다.
‘뭘… 사살해?’
라파엘과 아그네스는 웃음을 열심히 참다가 블란데아와 시선이 마주치고 바로 정색했다.
“그럼 아가씨. 뭐든 가주님의 약을 빼앗아 드시고 싶다면 딱 5분의 1만 드십시오. 그게 아가씨에게는 부담이 가지 않을 양이거니와….”
그때였다.
문가에 동상처럼 서 있는 라파엘과 아그네스가 갑자기 신경이 곤두선 듯 어깨를 곧게 폈다. 마치 육식 동물의 기척을 감지한 초식 동물처럼 예민하고 연약한 반응….
그들은 반사적으로 시선을 마주치더니, 블란데아에게 양해를 구하고 곧장 군인다운 깍듯함으로 문을 열었다.
기사 숙소의 침실은 넓지 않은 편이었다. 문밖으로 바로 보이는 남자의 모습에 블란데아의 눈이 조금 커질 수밖에 없었다.
“가주님?”
“총사령관님.”
슐로이츠는 평생 그렇게 살아왔던 성격답게 성큼성큼 침실로 들어왔다. 애초에 이 성과 영지 자체가 온전히 그의 것이었으니 그다지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는 블란데아가 앉아 있는 침대 앞에 멈춰 서서는 잠시간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붉은색인 블란데아의 선명한 눈동자는 열 때문인지 조금 충혈되어 있었다.
“…….”
고용인은 주인의 기분에 민감하고, 군인들은 상관의 기분에 예민하다. 그래서 이 침실에 있는, 블란데아를 제외한 세 명 모두가 슐로이츠에게 촉각이 곤두세워져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딱딱해 보이는 차가운 눈빛. 마찬가지로 굳어 있는 입매.
그리고 왜 손에 쟁반을….
들고 계시지…?
“……?”
슐로이츠는 침대맡에 앉았다. 물이 든 유리컵. 스푼. 뚜껑으로 닫힌 깊은 그릇 하나.
각이 반듯하게 잡힌 군인들보다는 눈치가 다소 떨어지는 의사가 아, 하면서 말했다.
“주방장이 아가씨 드실 음식을 만들었다고 하더니 그건가 봅니다. 아가씨가 자주 드시던 거라 분명 이 맛을 그리워할 거라며….”
순간 블란데아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페니와 아그네스와 라파엘은 각기 눈치가 넘쳐서 의사의 말에 맞장구는 치지 않았지만, 내내 아무것도 삼키지 못하고 토하기만 하던 블란데아가 뭘 자주 먹는지 내심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르페브르의 주방장이라면 뭔가 더 대단한 걸 가져올 것도 같고….
르페브르는 뭘 좋아할까?
사실, 이 좁은 침실에서 감히 더 궁금해할 수 있는 게 없기도 했다.
남들이 어디에 어떤 관심을 기울이고 있든, 슐로이츠는 블란데아에게 온 신경이 집중되어 있었다. 그녀의 핼쑥한 얼굴을 보고 그는 한숨을 삼켰다.
이런 거라도 먹을 수 있다니 다행이지.
뚜껑을 열려던 슐로이츠의 소매가 순간 붙잡혔다. 블란데아였다.
“…제가 먹을게요.”
언뜻 듣기엔 네가 먹여 주는 것도 필요 없으니 나가란 소리처럼 들리는 말이었다.
슐로이츠가 블란데아를 빤히 보면서 입을 열었다.
“다 나가.”
순식간에 침실이 조용해졌다. 말하진 않았지만 블란데아가 내심 안도하는 게 느껴졌다. 슐로이츠는 쟁반을 고쳐 받치며 말했다.
“왜. 아이들이나 먹는 거라 부하들한테 보이기는 부끄럽나?”
“…….”
블란데아의 뺨이 점점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그는 정확히 정곡을 찔렀다. 그녀의 귓가가 발갛게 변하는 모습을 보게 되자 슐로이츠는 어쩐지 말문이 막혔다.
내내 마음에 단단하게 뭉쳐 있던 눈송이는 불기에 닿은 듯 순식간에 녹고, 한순간에 보송한 깃털을 만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기 시작한 까닭이다.
“라파엘하고 아그네스는 네 침실에 왜 와 있어.”
“페니가… 계속 혼자 고생했으니까.”
페니더러 마음껏 부려 먹으라는, 블란데아 나름의 애정 표시였다.
“하녀가 없어서 그래?”
“한 명 있어. 시킬 게 있어서… 잠깐 자리를 비우게… 했고.”
블란데아는 이마를 찌푸렸다.
“너도 나가. 내가… 먹을 거야.”
“주방장이 나더러 먹이라던데.”
“헬디는 그런 말… 안 해.”
“했어.”
“안 해.”
“불러와 줘?”
무심히 되물은 슐로이츠는 우유죽을 덮고 있던 뚜껑을 열었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며 특유의 깊고 고소한 냄새가 났다. 막상 입 안에 넣으면 간을 강하게 하지 않아 담백한 맛만 느껴지지만, 어릴 때부터 아프면 먹던 것이라 그런지 블란데아는 그마저도 좋아했다. 한 스푼 입에 떠 넣고 미각을 집중하면 간간이 찾을 수 있는 짠맛과 단맛, 조화로운 고소한 맛도 부담이 없었고….
슐로이츠가 스푼으로 휘저으며 우유죽을 식히는 걸 멍하니 바라보던 블란데아가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렸다.
“아.”
“……!”
블란데아의 얼굴이 불덩이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그에게서 스푼을 빼앗으려고 했지만 턱도 없었다.
“내가… 먹는다고!”
“입으로 먹여 달라는 거 아니면 가만히 있어.”
“넌 진짜….”
“입 벌리란 말 듣고 싶으면 그렇게 해 주고.”
하여간 말은 참 이상하게 하지….
블란데아는 슐로이츠를 노려보았다.
“너 정말… 보기 싫어.”
“난 보고 싶으니까 상관없어.”
“…뭐?”
“먹고 화를 내든 뭘 하든 해. 나한테 몇 마디 더 소리 지르다가 쓰러질 것 같은 안색으로 말은 잘하지.”
“안 쓰러져.”
블란데아가 이를 악물고 말했지만 별로 효과는 없는 것 같았다. 그녀는 스푼을 들고 있는 저 탄탄한 팔이 흔들릴 때까지 입을 다물고 있을까 하다가 그냥 포기했다.
먼저 지치는 건 제 몸일 것 같았고, 이렇게까지 힘을 뺄 일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용히 우유죽을 먹기 시작했다. 블란데아를 보고 있자니 슐로이츠는 모이를 덥석덥석 받아먹는 아기 새가 생각이 났다.
그렇게 화를 내더니 얌전히 잘도 오물거리는 모습에 우습게도 묘한 재미마저 느껴졌다. 블란데아가 혹여 또 아무것도 먹지 못하면 이 우유죽을 먹이면 되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그녀는 모르는 모양이지만, 한 스푼 두 스푼 먹으면서 눈빛도 조금이지만 풀리고 있었다.
눈빛이 누그러지고 있는 건 자신 역시 마찬가지라는 사실은 미처 모르는 채로.
헬디가 생각보다 큰 대접에 우유죽을 담아 두었음에도 블란데아는 거의 다 먹어 치웠다.
“그렇게 맛있나?”
블란데아는 풀어진 눈을 깜빡이다가 물었다.
“…한 입 줘?”
슐로이츠는 하마터면 픽 웃을 뻔했다.
“아니.”
블란데아가 물을 마시는 모습까지 본 슐로이츠는 이후로도 별다른 말 없이 그녀를 쳐다보았다.
짧은 침묵이 그들을 휘감았다. 블란데아는 속이 안정된 걸 느끼고 이건 토하지 않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다행이었다. 슐로이츠 앞에서 토하는 모습은 보여 주고 싶지 않았으니까.
“버림받은 건 나인데, 왜 네가 어릴 때 몇 달이나 앓고 울었다는 거지?”
토할 뻔했다.
“도무지 이해가 안 간다고.”
“…….”
“네 심리도 이해가 안 가는데 내게 그 말을 하지 않은 너도 이해가 안 가.”
“…내가 무슨 말을 하든… 넌 화만 냈잖아.”
“…….”
“내가 어릴 때… 아팠던 걸 말해 봤자… 기만이라고 여겼을 거잖아. 나더러 눈물로 상황을… 모면하려고만 한다고… 화를 내는데… 내가 무슨 말을 더….”
어릴 적 자신이 그에게 입혔던 상처는 줄에 매달려 흔들리는 무거운 돌처럼 끊임없이 이곳저곳에 부딪히며 블란데아의 가슴을 멍들게 했다.
슐로이츠의 시간이 더 괴롭고 끔찍했을 걸 알아 언제나 쏟아지는 그의 분노를 감내했다. 매일 사과하고, 매일 상처를 받을 준비를 하고, 매일 그가 조금이라도 웃기만을 기다리며 가슴을 졸이고….
“나한테 다신 침실에… 들어오지도 말라며 화를 냈잖아. 나랑 얘기도… 하고 싶지 않아 했잖아….”
“…….”
“그런데 내가 너한테 감히… 무슨 말을 더 할 수 있어?”
이래서 몸이 아플 때는 슐로이츠를 보고 싶지가 않다. 자신은 우는 게 아닌데도 말이 드문드문 이어져 꼭 흐느끼며 말하는 것처럼 보이니까.
어쩌면 슐로이츠의 귀에는 자신이 조금만 더듬거려도 다 울음소리로 들리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도 들었다.
또 그렇게 무겁게 가라앉은 눈으로 자신을 보고 있으니까.
블란데아는 슐로이츠의 손이 제 뺨을 조심스럽게 닦아 내는 걸 보고서야 스스로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깨달을 수 있었다.
“…제발 울지 마.”
“…….”
“네가 울 때면 난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