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는 하루의 절반 이상이 그대로 삭제가 되는 희귀한 경험을 했다. 눈은 간신히 뜰 수 있었는데, 그러고도 몇 시간이나 몽롱하기만 해 기력이 쭉쭉 빨려 나갔다. 라파엘이 괜히 상태가 안 좋아 보인다고 말한 게 아니었다.
이런 걸… 가주에게 먹인다고?
죽음 같은 잠에서 겨우 깬 블란데아가 얼마간 황당해했을 정도였다.
슐로이츠가 자신보다 몸이 훨씬 크니 복용하는 정도가 다를 거라는 걸 감안해도….
“이런 걸 계속 먹겠다고? 언제까지? 내가 네 눈앞에서 없어질 때까지?”
“그따위 말 좀, 제발….”
“슐츠.”
빌어먹을. 귀를 뜯어내든가 해야지. 도대체 언제까지 저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미성숙한 소년처럼 이렇게나 일일이 동요를 할 셈인가.
“어릴 적 꿈을 꿔서 이런 걸 먹는 거야?”
순간 슐로이츠의 두 눈이 딱딱하게 굳었다. 반사적으로 깨닫는다. 아까 전,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없었다던 블란데아의 말이 실은 거짓말이었다는 사실을….
가장 감추고 싶었던 상대에게 제 밑바닥을 모조리 보였을 때의 처참한 기분. 누군가가 입 안에 끓는 쇳물을 처넣은 것처럼 슐로이츠의 목구멍이 사정없이 조여들었다.
발아래가 무겁게 꺼진다. 슐로이츠는 블란데아에게서 냉혹하게 고개를 돌렸다. 이어 떨어지는 축객령.
“나가.”
“그 꿈 때문에 자꾸 깨서 이렇게 독한 걸 처방받아 먹는 거냐고.”
“나가 보라고 했어.”
“대답해, 슐로이츠.”
“블란데아 르페브르.”
“슐츠.”
또 그런 식으로 제 목을 조른다. 슐로이츠의 턱에 힘이 강하게 들어갔다.
“그래.”
그는 욕설을 짓씹듯 대답을 토해 냈다.
“빌어먹게도 네 꿈을 꿔! 엔리케 시에도의 꿈만 죽어라 꾼다고.”
“…….”
“그딴 거라도 입에 쑤셔 넣지 않으면 한심하게 어릴 적 꿈이나 꿔 대니까, 효율을 따져 보니 그쪽이 더럽게 나았어. 뭐든 네가 날 쓰레기처럼 무심하게 버리고 가는 꿈보단 나으니까!”
“…….”
스스로의 말에 스스로가 상처를 입는 꼴만큼 우스운 게 또 있을지.
슐로이츠 프로키온은 약점을 드러내는 순간 괴수에게 물어뜯겨 죽는 게 당연한 군인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무엇보다 눈앞의 이 여자에게만은…. 차라리 괴수에게 목이 뜯겨 죽었으면 죽었지.
평생 어떤 약점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저 눈에 차게 근사한 구혼자처럼만 보이고만 싶었다.
눈이 보이지 않던 소년 때부터 홀로 그토록 꿈꿨던 조용한 소망이, 이렇게 자라서도 별 차이 없는 걸 보면 자신은 참 한결같게 성장한 올곧은 머저리 새끼였다.
슐로이츠는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제 만족하나? 블란데아 르페브르. 다 들었으면 나가고, 제1 지휘관이든 르페브르 영애든 내 침실에 다신 들어오지 마.”
***
“가주님. 아가씨가 약을 다 드시지 못한다는군요.”
“…왜 또. 바닥에 붓는다나?”
“그게 아니라….”
닉의 목소리에 가주가 독한 수면제를 연이어 복용할 때도 찾을 수 없던 깊은 근심이 가득했다.
“약을 다 토한다고 하십니다.”
비가 내리는 창밖을 바라보던 슐로이츠의 등줄기가 곧추섰다.
***
르페브르 가문에서 프로키온 성으로 발탁되어 이적한 주방장, 헬디는 몹시 마음이 아팠다.
아가씨가 해쓱해져 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럴 것 같긴 했지만….’
그러잖아도 블란데아는 선천적으로 충격에 유독 약한 몸이었는데, 근래는 이 가문의 주인과 매일매일 신경전을 벌이고 있었다.
‘근데 왜 내가 왜 그 가문의 주인과 이렇게 독대 중이지?’
희한해. 신기해.
그간 헬디가 모셨던 르페브르의 혈육들은 밝은 머리색에 타는 듯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블란데아는 어릴 적 병색이 완연할 때도 그렇게 오밀조밀 귀엽더니 자라서는 가끔 넋이 나갈 정도였다.
황금색으로 내리는 햇빛 아래에 서 있으면 그렇게 눈이 부실 수가 없었다. 정원을 걸어 다니는 블란데아는 태양을 죄 빨아들이려고 태어난 존재 같았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그러니까 슐로이츠 프로키온은 아가씨와 정반대의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꼭 반전을 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아가씨, 얼굴 심하게 보시는구나. 훌륭한 속물이셔.’
그런 생각도 좀 스쳤고….
‘아닌가. 몸을 보시나? 아무래도 남자 구실은 몸이지. 잘하겠는걸….’
한쪽으론 이런 일차원적인 생각들을 하면서, 헬디는 다른 한쪽으로는 방금 전 슐로이츠 프로키온이 했던 명령을 성실히 반추했다.
“준비해. 르페브르의 의사들을 전부 이 성으로 데려올 테니 관례에 따라 당장….”
“예? 르페브르에서 의사들을 데려오시겠다고요? 아니요. 프로키온 공! 진정하십시오. 괜찮습니다!”
“괜찮다고? 약 같은 게 따로 필요할 거잖아. 도대체, 아무것도 마시지 못하고 토해 내는 게….”
“그건 그냥 충격을 받으셔서 그렇고요.”
“…그래. 그러니까 그 약한 몸에 마땅한 약이 르페브르에는 있을 거잖아.”
헬디의 눈에 슐로이츠 프로키온은 아주 제정신이 아닌 걸로 보였다.
물론 블란데아가 프로키온 성에 온 이후로 상태가 좋지 않은 적이 잦으니, 르페브르에 있는 의사들부터 죄 끌고 와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당연하겠지만….
어쩌면 블란데아만을 위한 특별하고 희귀한 약이 르페브르에 있을 거라고 짐작할 수도 있을 터다.
하지만.
“그런 약 없어요.”
“…….”
“아가씨는 정기적으로 섭취해야 할 특정한 약이 있는 몸도 아니시고요. 프로키온 공.”
블란데아는 선천적으로 타고난 허약함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종종 섬약해질 때가 있을 뿐, 기본적으로는 의사들이 보증하는 건강한 몸이었다.
“물론 아가씨가 지금처럼 상태가 좋지 않으실 때, 아가씨에게 필요한 약들이 있긴 합니다만…. 그건 어디서든 쉽게 구하실 수 있습니다. 당장 사람 없는 시골에 가도 10분이면 구할 수 있을걸요?”
“…어째서?”
“르페브르에서는 아가씨에게 필요한 약이라면 그게 무엇이든 특허를 포기했습니다.”
슐로이츠가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이마를 일그러뜨렸다. 르페브르는 대단한 의술력으로 이름이 높은 가문이기도 했다.
“가주님과 마님은 아가씨가 어디서든 건강하길 바라셨거든요, 프로키온 공. 그러니까 혹시라도 르페브르가 무너져도…. 물론 그런 일은 절대 없겠지만요.”
대양이 하루아침에 말라 버리는 게 더 현실성 있는 말이긴 했다.
“르페브르가 더 이상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어, 혹은 세상이 뒤바뀌어 푸른 피가 죄 말라 버리게 돼도 아가씨가 약을 구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은 절대 오지 않길 바라셨다는 뜻이지요.”
“…….”
르페브르는 의학 쪽에서는 대륙에서도 가히 독보적인 기술력을 갖고 있지만 그중 몇 개, 특히 블란데아가 유사시에 필요해질 약들에 관해선 특허도 따로 받지 않았다.
구하기 힘든 재료들도 최대한 흔한 약초들로 대체하기 위해 끝없이 연구했다. 블란데아를 살리기 위해 르페브르가 쏟아부은 돈이 그렇게 어마어마했다.
“그게 가족 간의 사랑이죠. 부모로서 마땅한 염려고요. 아가씨는 르페브르의 두 분께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자라셨습니다. 지금도 두 분은 아가씨를 정말 사랑하시고요.”
언뜻 듣기엔 그 권력자들이 사랑해 마지않는 우리 아가씨 그만 힘들게 하라는 협박처럼 들릴 수도 있는 말인데, 헬디는 그저 자상한 표정만 짓고 있었다.
혹은 좀 더 걱정이 많은 이였다면 어땠을까.
블란데아가 누린 따뜻했던 과거를 선뜻 이야기해 주지 못했을 것이다. 슐로이츠 프로키온이 불우한 어린 시절을 상기하며 열등감에라도 빠질까 봐. 지나친 염려로 인해 말을 골랐겠지만 헬디는 그러지 않았다.
아가씨와 결혼이 예정된 이 남자가 그럴 좀팽이 같은 놈으로는 전혀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지금 그들이 대화를 나누는 곳은 심지어 주방이었다.
저 태양 같은 명성을 어깨에 두르고 있는 남자가, 아주 초췌한 얼굴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내뱉는 말이. 르페브르에서 의사를 데려와야겠으니 당장 채비하란 소리였다.
다른 가문에 인재를 청해야 할 때엔 안면이 있는 이를 데려가는 게 라자크 왕국의 상식적인 관례였으니, 저 총사령관은 현재 상식과 비상식의 경계를 넘나들고 있다는 소리였다. 역시나, 제정신이 아니란 소리였고.
“프로키온 공.”
헬디는 슐로이츠를 진정시키기 위해서 덧붙였다.
“애초에 저 같은 주방장이 어찌 이리 상세히 알겠습니까? 가주님과 마님이 다 가르쳐 주지 않으셨으면 말이죠. 여기 오기 전에 말이에요. 이런 일이 있을 줄 짐작을 하신 거죠.”
“…….”
헬디의 말은 슐로이츠에겐 아주 낯설게만 들렸다. 배려라고 해야 할까, 보살핌이라고 해야 할까.
기대도 없이 한참 헤맬 각오를 하다가, 누군가의 안배로 세워 둔 이정표를 만난 듯한….
슐로이츠에게는 하나같이 생소한 것들이었다.
“참, 듣기로는 프로키온 성의 의사도 의학 아카데미를 수석으로 졸업한 인재라고 들었습니다만, 프로키온 공께서 몇 년 전에 돈으로 눌러앉히셨다고요, 딱히 돌볼 사람이 없는데도 미리 그….”
슐로이츠는 더 듣지 않고 주방을 걸어 나가려다가 붙잡혔다.
순식간이었다. 슐로이츠는 제 양손 위에 잽싸게 올라온 쟁반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이건 뭔데.”
“우유죽이요. 견과류만 곱게 갈아서 조금 넣었습니다.”
“어린애들이나 먹이는 거잖아.”
“아가씨가 그 어린애 시절에 자주 드시던 겁니다. 그건 웬만해선 토하지 않으실 거예요. 물론 아가씨 상태가 많이 안 좋다면 우유죽도 넘기지 못하시겠지만….”
“…….”
“아가씨가 어릴 때도 어딜 다녀오시더니, 한참 아무것도 못 드시고 토하기만 한 적이 있었습니다. 맨날 우시고….”
슐로이츠의 미간이 천천히 패기 시작했다.
“가져가서 아가씨한테 먹여 드리셔야죠. 그냥 먹기엔 뜨거우니까 식혀서 주셔야 됩니다.”
“…내가 왜 이런 걸 먹여 줘야 하지?”
허참. 심술 났네. 그럼 쟁반이나 꽉 쥐지 말든가. 저렇게까지 붙잡지 않아도 떨어뜨리지 않을 텐데.
하지만 심통이 난 아이를 어르는 건 익숙하다. 아이 둘을 온갖 정성으로 열심히 키운 르페브르의 식솔들은, 웬만큼 서투른 표현도 알아서 다 걸러 듣게 된 지 오래였다.
헬디는 예의 그 자상한 얼굴로 말했다.
“어릴 적의 아가씨를 몇 달이나 펑펑 울게 만든 그 소년이 프로키온 공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