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프로키온 영지-(22) (104/190)

“알겠어? 오라버니. 아가씨한테. 이렇게 말을. 하라고.”

“…넌 정말 천재야. 페니.”

페니가 속닥이는 걸 들은 라파엘은 블란데아를 보자마자 평소의 신뢰 넘치는 얼굴로 다가왔다가 눈을 깜빡였다.

“블란데아 경. 왜 이렇게 상태가… 안 좋아 보이시죠?”

“상태가 안 좋아?”

블란데아가 마른세수를 한 번 했다.

“아니, 얼굴에 문제가 있다는 말씀이 아니고요.”

그녀는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많이 피곤해 보이시거든요.”

“너무 많이 자서 그래.”

“아. 그러시구나.”

‘하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수면을 느긋하게 취한 후엔 상태가 좋아지지 않나? 라파엘은 어리둥절했지만 일단 페니가 시킨 그대로 말했다.

“총사령관님이 처방받으신 수면제가 독해서 말입니다. 가급적 이불을 총사령관님 목 끝까지 올려 덮어 주십시오.”

“목 끝까지…. 알겠어.”

“화나셨습니까?”

“화났다고 하면 어떡하게?”

“예? 일단 제3 지휘관으로서 마땅히 상관의 심기를 편안하게 해 드리기 위해 무엇이든….”

“됐어. 안 났어.”

무엇이든, 이라니. 내가 무슨 말을 할 줄 알고. 상급 지휘관인 주제에 말하는 건 일개 사병보다도 더 빌빌 기어 대니 블란데아는 종종 기가 찼다.

“르페브르에서 편지는 안 왔어?”

“아.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오면 전해 줘. 오파츠에 성검을 결합할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보호막을 좁고 길게 만들어 괴수를 베어 낼 때 순간적으로 증폭을 시킬 수만 있다면….

기존의 성검보다는 훨씬 유리한 무기가 만들어질 것이다.

“블란데아 경.”

라파엘이 물끄러미 블란데아를 보다가 입을 열었다.

“총사령관님 때문에 그런 것만 온종일 생각하셨습니까?”

“아니야. 그냥 제1 지휘관으로서 생각을 하다 보니까.”

“블란데아 경.”

라파엘이 안타까움을 갈무리한 목소리로 말했다.

“총사령관님은 경 때문에 사고를 당하신 게 아닙니다.”

“…….”

“그렇게 생각하지 마세요.”

블란데아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붉은 눈동자에는 수많은 빗금이 새겨지고 있었다.

그날 저녁.

블란데아는 어김없이 침실 안으로 들어섰다.

욕실에 들어간 것 같은 슐로이츠를 기다리며, 쟁반 위에 올려 둔 유리병을 보았다.

블란데아는 의사에게 이 수면제와 전날 자신이 슐로이츠에게 건넸던 수면제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는 거냐고 물었지만 들을 수 없었다. 의사는 난감한 표정으로 대답을 얼버무리기만 했다.

대충 봐도 알 수 있었다. 의사를 계속 곤란하게 해도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을.

어쨌든 슐로이츠가 이 가문의 주인이고, 영지를 완전히 장악했고, 의사는 이 프로키온 영지에 속해 있는 사람이니….

“…네가 여기 있겠다며.”

슐로이츠의 말이 머리에 달라붙어 아른거렸다.

그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그때 인기척이 들렸다. 블란데아는 시선을 들어 올렸다.

“슐츠. 약을 가져왔어요.”

어제처럼, 슐로이츠는 한여름에 내리는 눈송이를 보듯 자신을 보기는 했지만 그뿐이었다.

슐로이츠는 어제와 비슷하게 잠에 빠졌다. 블란데아는 오늘도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십여 분이나 흘렀을까.

‘라파엘이….’

신신당부를 하던 게 생각이 났다.

왕국 총사령관의 건강은 군부에서 가장 중요한 사안이었으며, 공적인 나랏일로도 취급되는 것이었다.

슐로이츠의 이불을 잘 덮어 주기 위해 블란데아는 몸을 일으켰다. 그의 목 끝까지 꼼꼼히 이불을 덮어 주느라 그녀의 금빛 머리카락 몇 가닥이 슐로이츠의 뺨을 간지럽혔다.

거의 동시였다.

블란데아의 몸이 그대로 슐로이츠의 위로 무너졌다.

굳어 있던 것도 잠시였다. 희미한 속삭임이 블란데아의 귓가를 파고든다.

“…엔리.”

“…….”

그 나지막한 목소리는 꼭 꿈결을 타고 흐르다가 객로를 잃은 나비 같았다. 나비의 꼬리를 타고 빛줄기가 흘렀으며 현실 같지 않은 처염한 꼬리는 블란데아의 목을 무자비하게 졸랐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슐로이츠가… 이 남자가 일주일 넘게 똑바로 잠을 자지 못했구나. 수면제를 먹으면서도 나날이 뺨이 해쓱해지고 턱이 마르는 이유가 있었구나.

“엔리, 제발.”

가슴이 정신없이 뛰었다.

블란데아는 박제된 나비처럼 슐로이츠의 가슴 위에 무너져 있었지만 심장은 날것의 감정으로 고동치고 있었다.

누군가의 앞에서 잠들고 싶지 않았던, 할 수만 있다면 한심한 소년의 그림자는 영원히, 한 자락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했던 남자를 깨우기에는 모자라지 않은 자극이었다.

제 위에 쓰러져 있는, 정확히는 자신이 붙잡고 있는 블란데아의 손을 본 슐로이츠가 낮게 욕설을 짓씹었다.

수면제를 바꿨는데 왜 또 중간에 깨서 이런 한심한 몰골이나….

아무 말도 하지 않았기를 되뇌면서 묻는다.

“블란데아.”

“…네.”

“내가 네게….”

슐로이츠가 희미하게 이마를 찌푸렸다.

“무슨 말이라도 했나?”

“안 했어요.”

“…….”

“아무 일도 없었어요.”

“그래?”

“…네.”

슐로이츠가 헛웃음을 지었다.

“나는 온종일 네 꿈만 꾸는데.”

“…….”

“다행이지.”

슐로이츠는 블란데아의 손을 냉정하게 느껴질 정도로 무심하게 놓았다. 그가 깊이 눈을 감았다가 천천히 떴다.

“나가 봐.”

그녀가 나가면 의사나 불러야겠다. 도대체 수면제를 어떻게 제조했길래 이따위로 쉽게 눈을 뜨는지.

“내일부턴 너는 내 침실에 들어오질 마. 아그네스와 라파엘을 부르고 군부에서 디오스까지 소집해 예외 사항으로 처리할 테니까, 너는….”

“슐츠.”

“…….”

“의사를 불러 줄까요?”

“네가 부르지 않아도 돼.”

“수면제에 대해 물어보고 싶을 거 아니에요. 왜 이렇게 약효가 약하냐고 캐묻고 싶을 거잖아.”

순간 슐로이츠가 미간을 일그러뜨렸다.

그는 그대로 굳어, 블란데아의 품으로 들어가는 손을 보았다.

그녀는 기가 막히게도 품속에서 작은 유리병 하나를 꺼냈다. 본래 슐로이츠가 의사에게 처방하라고 지시했던 수면제 병이었다.

저 수면제가 생각보다 위험하다는 사실을 슐로이츠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몇 병 더 달라고 하니까 의사가 절대로 안 된다고 객기를 부리던 수면제. 그게 왜 블란데아의 품에 숨겨져 있나.

순간 슐로이츠의 두 눈이 굳었다. 그는 블란데아의 손에 잡혀 있는 수면제 병을 빼앗았다. 아무것도 출렁이지 않는 작고 가벼운 유리병.

“이게 왜 비어 있어.”

“…….”

“블란데아. 입 열어서 대답해.”

추궁하는 목소리는 거칠었고 눈동자는 사나웠다. 그 사나운 눈동자가 가여운 아이처럼 보이는 이유를 블란데아는 쉬이 짐작할 수가 없었다.

“내가….”

조금 쉰 듯한 목소리가 블란데아의 입술에서 흘러나왔다.

“마셔서 비었어.”

“…마셔?”

제 귀를 의심한 슐로이츠는 반사적으로 블란데아의 상태부터 확인했다. 단순히 자신이 보기 싫어서 내내 저렇게 죽을상인가 싶었더니 그 독한 걸 복용해서 상태가 이런가?

“의사가 네게 이걸 처방했나? 왜. 잠을 그렇게나 못 자? 블란데아….”

“훔쳤어.”

“…뭐?”

어떻게 그렇게 뻔뻔하고 상냥한 대답이 흘러나올 수 있는지 모르겠다. 천하의 슐로이츠조차 한순간 말문이 틀어막혔을 정도였다.

약제실의 물품을 도둑질했다는 말을 저렇게나 선량해 보이게 말하는 건 특유의 재능인지….

블란데아가 조금만 덜 창백했더라면, 하다못해 그 보송한 낯에 아주 약간의 미소라도 어려 있었다면 슐로이츠는 아무 말 없이 넘어갔을 것이다. 무엇이든 넘어가 주고 싶었다.

사실 그러질 않았나. 슐로이츠는 블란데아가 제게서, 프로키온에서 무엇을 몰래 가져가든 아무 상관도 없었으니까.

애초에 그 모든 게 이 여자를 조금이나마 만족시키기 위한 발버둥이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은 도무지 그녀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저 작은 머리통을 열어 확인해 봐야겠다는 충동과 금빛 머리에 감겨 있는 붕대에 목이 졸리는 듯한 상반된 감정에 시달리며 슐로이츠가 이를 갈았다.

“네가 르페브르라는 자각은 있나? 무슨 수면제인 줄 알고 멋대로 입에 밀어 넣어서 프로키온을 곤란하게 만들어?”

그는 이제 스스로와 블란데아를 분명히 선을 긋고 있었다. 그녀를 프로키온이라는 선 안에서 빼 버렸지만 블란데아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의사한테 아무리 물어도 차이점을 대답을 해 주지 않는 게 이해가 안 가서.”

“…….”

“나한테 그랬잖아. 내가 여기 있기 때문에 수면제를 바꿔야 한다고…. 네가 그렇게 말했잖아.”

“…하.”

의사도 입을 다물고, 슐로이츠의 말은 곱씹어도 곱씹어도 이해가 가지 않으니 그저 한 병을 가져와 시간을 재고 먹어 본 것뿐이다.

총사령관에게 바치는 것인데 설마 독을 제조했을 리도 없을 거고.

아, 그런 거라면 자신이 먼저 먹고 사달이 나는 게 공적으로 조금 더 이득이긴 할 거라는 심술궂은 생각도 있었다.

의사가 알았으면 억울해 죽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블란데아가 복용한 수면제는 순결한 약이었을 뿐, 결단코 독은 아니었다. 하지만 독에 버금가게 사람의 생기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슐로이츠의 짙은 눈동자가 블란데아를 똑바로 노려보며 묻는다.

“수면제 먹고 몇 시간이나 잤어?”

“열여덟 시간.”

슐로이츠의 심장이 순간 덜컥 내려앉았다. 자신은 기껏해야 여덟 시간이나 수마에 빠지게 하는 수면제였다.

본래 그가 평소에도 수면 시간이 짧은 편이라, 너덧 시간만 자도 충분한 점을 감안하면 아주 긴 시간이었지만….

“도대체가, 넌….”

슐로이츠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먹고 못 깼으면 어쩌려고 그런 걸 함부로 마셔!”

“너는 마셨잖아.”

“너와 내 몸 상태가 똑같나? 약이란 게 왜 정량이 있는지 몰라? 건강하기나 하면 말이라도 않지. 어릴 때부터 걸핏하면 쓰러져서 사람 정신을 나가게 하더니….”

“…너는 내가 바본 줄 알아?”

“…….”

“정량이라는 말로 속이면 내가 바보처럼 그냥 믿는 줄 아느냐고!”

블란데아가 화가 나 있다는 사실을 슐로이츠는 불현듯 깨닫는다.

수면제를 복용한 이래 블란데아는 아무것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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