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을 바닥에 부어?”
슐로이츠가 되물었다. 의사가 조심스레 눈치를 보며 말했다.
“…아가씨가 가주님을 많이 생각하셔서, 그리 가차 없는 방법을 선택하신 게 아닌가 하고….”
정정하자면 눈치를 보는 게 아니라 아주 대놓고 블란데아의 역성을 들었다. 눈빛만 봐도 역시 대귀족 직계는 남다른 결단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표정에 어린 선망이 어찌나 분명한지.
그래. 매일매일 제 뒤꽁무니나 쫓아다니며 잠을 자야 회복이 된다는 말을 밤낮없이 설파하던 의사였으니. 한마음 한뜻으로 협박해 주는 귀한 공주님이 얼마나 든든한 아군으로 보일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공주님이 그들을 이끌고 무찌르고 싶은 적군은 슐로이츠 자신인가? 우습게도 자신 역시 그 공주님 하나만을 목 빠져라 바라보고 있는데. 자주 약탈을 꿈꿨던 게 화근이었던 모양이다. 슐로이츠는 블란데아가 자신을 전혀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이 문제일 뿐이었는데.
“줘 봐. 그게 수면젠가?”
“예. 가주님.”
라파엘은 슐로이츠 옆에서 간단한 서류에 기록을 하고 있었다.
그는 순순히 수면제가 든 작은 유리병을 받아들였고 또 아주 순순히 삼켰다. 이때까지의 무심함은 이렇게나 가볍게 무너진다. 슐로이츠는 피곤함이 묻어나는 얼굴을 쓸어 넘겼다.
“라파엘.”
“예? 총사령관님.”
“다 마셨으니 네가 가서 블란데아에게 그대로 전해.”
“예…. 바로 전하겠습니다.”
제 목숨을 가지고 그렇게 협박을 한다고.
이런 식으로 협박을 하겠다고.
블란데아의 모든 반응이, 아니 실은 블란데아 그 자체가 슐로이츠의 턱 바로 아래에 박혀 버린 화약 같았다.
그녀가 그의 호흡을 통제했고, 그의 정상적인 판단을 흐리게 했으며, 그가 매분 매초를 숨 가쁘게 세게 만든다.
슐로이츠는 블란데아가 약을 잘 마시더라는 라파엘의 보고를 듣고서야 베개 위에 머리를 뉘었다.
의사는 슐로이츠가 잠드는 걸 보고 안도했지만, 다음 날.
별반 길게 자지도 않은 슐로이츠는 느린 자살이라도 결심했는지 또 그날 잠을 걸렀다.
이틀은 사흘이 됐고 사흘은 나흘이 됐다.
슐로이츠의 침실에서 생긴 일은 블란데아에게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흘러갔고, 그녀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의사 앞에서 약을 바닥에 부었다.
…그렇게 전해 들었다.
슐로이츠는 닷새 동안 수면제를 받아먹었다. 의사가 첫날 처방한 것처럼 강한 건 줄 수 없다며 다른 걸로 바꿔 온 게 짜증스럽긴 했지만, 또 여기 있는 일들을 잘도 블란데아에게 일러바칠 게 뻔했다.
일주일 가까이가 지났을 무렵이었다.
슐로이츠는 정말로 블란데아를 전혀 볼 수 없었다. 그사이 프로키온 성을 휩쓸던 폭풍우도 거의 가라앉은 상태였다.
조용한 성은 조용한 대로 끔찍했지만.
군부령의 총사령관 관저와 제1 지휘관의 숙소. 두 건물의 거리를 가늠해 보며, 슐로이츠는 침실로 걸어 들어왔다.
피곤해 빡빡하기까지 한 눈을 습관처럼 누르며 고개를 들어 올렸던 슐로이츠는 그대로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블란데아.”
침대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자가 고개를 들어 올린다.
머리에 감고 있던 붕대의 면적이 조금 줄어들었다는 게 가장 먼저 슐로이츠의 눈에 들어왔다. 두 다리로 다행히도 멀쩡히 서 있었고….
화로 옆의 눈사람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릴 것 같던 일주일 전보다는 확연히 나은 안색이었다.
가만히 서서 침대를 보고 있던 블란데아가 고개를 움직여 슐로이츠를 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는 건 잠시였다.
“슐츠.”
“…….”
거리감만 가득히 담은 목소리.
슐로이츠는 블란데아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그녀에게 총사령관으로서 ‘슐츠’라고 부르라고 명령했던 과거를 떠올렸다.
이것이 명령의 잔재였다는 사실도 충분히 깨달을 수 있었다.
깨닫기는 했는데 차마 블란데아에게서 시선을 거둘 수가 없었다.
“군법에 따라 일주일 이상 지속되는 총사령관의 수면제 복용의 기록은….”
“…….”
“같은 영지 내에 잔존하고 있는 가장 높은 지휘관이 맡아야 한다고 해서 왔습니다.”
“…그래.”
한 박자 늦게 대답을 꺼낸다. 간신히 토해 낸 말은 그게 전부냐는 함의를 가득 담고 있었으니, 사실상 질문과 같았다.
“취침 준비가 끝나실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냉랭한 미성에 슐로이츠의 손끝이 조금 꿈틀거렸다.
사실 그녀가 아무리 화를 내도 상관없었다. 아니 화를 내면 내는 대로 정신 나간 놈처럼 입이나 맞추고 싶었다. 블란데아가 때리는 대로 맞고, 그녀가 증오를 하든 저주를 하든 순순히 기고, 제게서 벗어나 가 버리려고 하면 그녀의 두 팔을 붙잡아 그저 온종일.
내게 얼굴을 좀 더 보여 줘도 되잖아.
고압적인 눈이어도 상관없으니 내게 시선 몇 줌 던져 줘도 되잖아.
그딴 임시 기사 숙소보다 여기가 편할 거잖아. 이 침대가 네 몸을 받치기엔 그나마 부족하지 않을 거잖아. 부릴 하녀도 없을 텐데 자신이 옆에서 시중이나 들어 주면 그 아프고 약한 몸도 조금이나마 편할 거잖아.
그딴 비루한 말들이 입 안에서 맴돌아 슐로이츠의 목을 틀어막았다.
당장이라도 성큼성큼 걸어가 블란데아의 뺨을 붙잡고 자꾸만 피해 대는 눈을 똑바로 마주치고 싶었다. 그녀가 입었다는 상처를 직접 확인하고 싶었으며, 목소리를 온종일 듣고 싶었다. 품에 껴안아 그녀의 심장이 제대로 뛰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확인하고 싶었다.
그런 한심하고 원색적인 욕망이 절벽 아래 파도처럼 슐로이츠의 목 아래에서 넘실거렸다.
슐로이츠는 블란데아가 내미는 수면제를 받아들였다.
침대는 넓었고, 주위엔 아무도 없었고, 블란데아는 고고한 낯과는 달리 무방비하게도 제 옆에 붙어 있었다.
“내가 자는 것까지 봐야겠나?”
“군법에 따라서요. 싫으시면.”
“싫지 않아.”
“…….”
“싫을 리가 없잖아. 네가 목을 졸라도 가만히 있어 줄 거고.”
“저는 경의 목을 조를 생각도 마음도 계획도 없습니다.”
“경이 아니라 너여도?”
“너는 보지 않겠다고 했잖아.”
한숨 같은 웃음을 토해 낸다. 슐로이츠는 블란데아 앞에 기꺼이 누워 주었다. 그는 느리게 숨을 내보내며 물었다.
“몸은 좀.”
“…….”
“어때, 블란데아.”
공란이 가득한 서류 위로 시간과 서명을 하나씩 적어 가던 블란데아의 손끝이 잠시지만 멎었다. 슐로이츠의 기민한 감에 포착이 된 그 작은 동요.
“괜찮아요.”
“공적인 일에는 괜찮은 모양이지.”
“네. 슐츠.”
슐츠, 슐츠. 그놈의 슐츠.
블란데아가 슐츠라고 그를 부를 때마다 그는 숨이 막혔고, 그녀가 차갑고 상처 가득한 목소리로 자신을 부를 때도 그의 숨이 막혔기에 슐로이츠는 거의 숨을 쉬지 못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기록서 줘 봐.”
슐로이츠는 종이 뭉치를 넘겨 가장 첫날 라파엘이 휘갈겨 놓은 서류를 찾았다.
“내일부턴 이 수면제로 먹을 테니 이걸로 기록해.”
블란데아가 이마를 약하게 찌푸렸다. 한 박자 늦게 오늘 자신이 가져왔던 수면제와 다른 수면제의 이름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왜인지 여쭤봐도 되나요?”
“…네가 여기 있겠다며.”
슐로이츠의 목소리에서 희미하게 묻어나는 잠기운에 블란데아는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그가 제 앞에서 흐트러지는 건 처음이라 낯선 기분이었다.
슐로이츠는 눈을 감았다. 제정신이 아니지. 매시간마다 그렇게 보고 싶어 굶주린 기분마저 들게 했던 그 얼굴이, 제 발로 직접 그의 침실까지 찾아와 줬는데 감히 먼저 눈이나 감아 버리고.
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블란데아의 눈동자를 보면 슐로이츠는 무수한 충동에 시달렸고, 그녀가 울음을 터뜨릴까 봐 막막했다.
뭍 위로 던져진 물고기처럼 죽을 듯 헐떡대면서 자신을 향해 끊임없이 눈물을 쏟던 젖은 눈동자.
그게 그렇게 아플 것을 알아서, 어릴 적엔 시력이 알아서 숨을 죽인 건가 싶었다. 그런 멍청한 생각이나 들 정도로 슐로이츠는 멀쩡한 상태가 아니었다.
지금 슐로이츠에게 잠이란 게 회복의 도구가 아니라 그저 내키지 않은 것이었는데도.
“가 봐. 내일 약 가지고 다시 오든지.”
***
나는 한참 잠든 그를 보다가 침실에서 걸어 나왔다.
바깥에선 사람 한 무더기가 대기하고 있었고, 슐로이츠가 수면제를 바꿔 오라고 했다는 명령을 전한 나는 의사를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아주 오랜만에 보는 것 같은 슐로이츠는 정말로 피곤해 보였다. 수면제를 일주일 가까이 복용했다면서, 왜 사람이 잠을 똑바로 자지 못해 초췌해진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눈가 아래 짙은 그늘을 보고 있자니, 혀 아래에 우박이 그득하게 맺힌 듯 불편한 기분만 들었다. 사실은 아팠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리라.
그러고는 스스로가 한심했다. 이런 감정을 또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진저리가 쳐졌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너무 오래 슐로이츠를 좋아했던 모양이지.
죽기 전에도 그를 좋아해 활자를 쫓아다니더니 다시 태어난 후에도 삶의 절반 이상을 슐로이츠나 회상하며 썼다.
그러니 이렇게 마음이 아픈 게 당연한 일이지. 습관적인 감정이니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자신을 이렇게 미워해 매일 화를 내고 매일 죽이겠다고 말하며 스스로의 목숨까지 그리 느슨하게 이용해 버리는 못된 남자 따위를….
내가 언제까지 사랑할 줄 알고.
누가 그렇게 미련할 줄 알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