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란데아가 파리한 안색으로 잠들어 있었다.
문제는 장소였다.
여긴 본관에 있는 블란데아의 밝고 아름다운 침실이 아니었다. 자줏빛 나무 장식과 먹색으로 꾸며져 딱딱하고 근엄한 분위기가 가득한, 페니의 옆방….
“…….”
여기가 어디던가.
기사 숙소였다.
페니는 엄밀히 말해 군부령 소속이었다. 기사를 사사로이 부릴 수 없는 프로키온 가문의 복잡한 사정상 당연한 일이었다.
페니 클로비스는 군부령 외 파견 기사로서, 프로키온 성의 수많은 별채 중 하나에 내내 머물고 있었는데….
“페니.”
라파엘이 황급히 페니를 끌고 나갔다.
“여기… 여기로 모셔 오면 어떡해?”
“아가씨가. 본관에서 나가고 싶다고. 우시는데 어떡해.”
라파엘은 눈앞이 아찔해졌다.
“…우셨다고?”
“응.”
“…그럼.”
“그럼?”
“그럼… 어쩔 수 없지….”
“잔소리 다 했으면. 나가라. 이러다 아가씨가 깨시면. 가만두지 않겠다. 오라버니.”
“…….”
라파엘은 블란데아의 침실 앞을 강아지처럼 맴돌았다.
나흘 전, 폭풍우가 쏟아지던 밤.
블란데아는 약 열여덟 시간 동안 이어진 강행군 내내, 잠시도 눈을 붙이지 않았다. 대단히 고고하고 딱딱한 낯빛으로, 프로키온 성의 모든 것을 완전히 통제했다. 르페브르 아래, 제1 지휘관 아래 감히 어느 귀족도 예외가 될 수도 자비를 바랄 수도 없었다. 라파엘의 심장이 약간 선득할 정도였다.
군부의 임시 최고 책임자로서 티모테와 레슬리나에게 차례로 사형 선고를 내리고….
심문실 앞에서 블란데아가 쓰러졌다는 말을 듣고 라파엘도 얼굴이 창백해져서 뛰어갔던 기억이 났다.
애초에 말이 안 되는 강행군이었고, 이미 상태가 좋지 않던 블란데아가 순전히 슐로이츠를 위해서 버틴 거라는 사실을 라파엘은 모를 수가 없었는데….
‘뭐야? 사랑싸움? 근데 내내 블란데아 경이 겁먹어 계시더니 왜?’
하나는 왕국의 전설적인 총사령관이고, 다른 하나는 르페브르의 고아한 직계인데도 이상했다.
둘이 함께 있는 걸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슐로이츠는 불만에 가득 찬 소년 같았고, 블란데아는 어쩔 줄 몰라 움츠러든 소녀 같았다.
라파엘의 눈엔 둘 다 이상하게 그렇게 어려 보였다. 어릴 때 두 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다는 건 대충 눈치로 알겠는데….
‘이혼? 아. 아직 결혼은 안 하셨으니 파혼?’
아무리 봐도 총사령관님께서 블란데아 경에게 차이신 것 같은데.
‘맞나?’
혼란에 빠져 있던 라파엘은 아그네스가 블란데아의 옷가지를 차곡차곡 챙겨 온 걸 보고, 기어이 이놈도 돌았구나 싶었다.
“야, 아그네스. 제대로 묻는다. 너 미쳤냐?”
“미치지 않았습니다만, 저는 상관의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블란데아 경?”
“예. 그 외에 달리 상관이 없잖아요.”
“총사령관님은!”
“총사령관님께는 안 여쭤봤습니다.”
아그네스의 목소리는 너무도 평화로웠다. 라파엘이 순간 ‘그래, 뭐가 어찌 되든 좋겠다….’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 박자 늦게 정신을 차리긴 했지만.
“아그네스. 여기가 아무리 군부령이 아닌 프로키온 영지라지만, 서열이 좀 무너진 것 같지 않나?”
“서열이요?”
“우리 군인이잖아.”
“군인은 줄을 잘 타야죠.”
“뭐?”
아그네스가 블란데아에게 줄을 타기로 결심했다는 걸 라파엘은 아직 몰랐다.
“그러는 라파엘 경께서는 어떡하실 겁니까? 앞길 그만 막고 나오시든지, 아니면 블란데아 경께서 일어나시면 본관으로 돌아가라고 ‘직접’ 말씀하시든지….”
“짐 남은 거 없어? 직접 들고 올게.”
“없습니다.”
라파엘은 결국 블란데아의 새 침실 앞을 빙글빙글 돌다가 슐로이츠를 보러 갔다.
‘블란데아 경이 본관 침실에서 나온 걸 모르시는 건가?’
***
“알아.”
“아신다고요?!”
슐로이츠의 짧은 대답에 라파엘은 한순간 말문을 잃었다.
왜…?
왜 안 붙잡으신 거지?
왜…?
왜 순순히 보내신 거지?
왜…?
안 찾아오시는 거지?
왜…?
“눈으로 욕하지 말고 입으로 하든지. 아님 좀 꺼지든지.”
“죄송합니다…. 아니 그런데, 총사령관님.”
라파엘이 뒤늦게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혹시 어디 가십니까?”
그 말에 답이 떨어지기도 전에, 집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가주님. 가신들이 전부 회의실에서 대기하고 있습니다.”
닉이었다.
슐로이츠는 책상 앞에서 일어나 그대로 라파엘을 스쳐 집무실을 나가 버렸다.
뭐야. 뭔데. 왜 갑자기 회의인데. 라파엘은 홀린 듯 슐로이츠를 따라갔다.
언뜻 본 바깥에는 마차들이 끝도 없이 들어와 있었고, 모두가 푸르죽죽한 낯을 하고 있었다. 슐로이츠는 회의실에 들어오자마자 테이블을 발로 걷어찼다.
당황한 가신들이 주춤주춤 일어났다.
“……!”
“가, 가주님….”
“개처럼 일해서 다 죽은 영지를 살려 놨더니 뒤에서 날 이렇게 개새끼 취급하고 있을 줄 몰랐지.”
“…….”
“프로키온이야 원래 개새끼라 상관없다지만, 르페브르의 신변에 위협이라도 갔으면.”
가신들의 눈이 떨렸다. 이들은 그날, 블란데아의 젖은 금빛 머리에 엉겨 붙은 핏자국을 분명히 보았었다.
“너희 목 다 뜯어내도 모자랐겠지.”
“…….”
“몇은 지금 뜯어내야겠고.”
입이 얼어붙은 가신들은 이윽고 질질 끌려 나오는 몇몇 노신들을 보며 숨을 멈췄다.
라파엘만이 침착하게 이 태풍을 견딜 수 있었다.
야라의 관이 얼마나 구하기 힘든 독인데, 아무리 프로키온의 직계라고 해도 말단 관리처럼 납작 엎드려 있던 티모테가 혼자서 구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티모테가 야라의 관을 구하는 과정에서, 알면서도 모른 척하거나 나슨하게 도와준 노신들이 있었다.
그러니까 슐로이츠 프로키온 역시 느슨하게 알지 못하는 척, 한 번에 치워 낼 심산으로 적당한 때를 노리며 발톱을 숨기고 지켜봤던 영지의 노신들.
“가주님! 아닙니다! 저는 절대로 아닙니다!”
“티모테 공이, 아니 그 정신 나간 놈이 그저 중개인을 연결해 달라고 했을 뿐입니다!”
“결단코 몰랐습니다! 그저 바다 건너 사치품이나 밀수하려는 줄 알았습니다! 가주님! 가주님!”
썩어 빠진 노신들이 대거로 가문에 종점을 찍는 일들을 보면서….
라파엘은 자신이 뭔갈 놓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비단 슐로이츠 뿐만 아니라 대대로 군부령의 총사령관들은 그리 평화로운 성격은 되지 못했다.
애초에 성향이 평온했다면 매시 매초가 준전시 상황인 군부령의 살벌하고 엄격한 계급 꼭대기까지 올라오지도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저런 난폭한 징벌도 라파엘은 익숙한데….
‘상태가 왜 저렇게 안 좋아 보이시지?’
해독제 드셨잖아.
의사도 별말 없었잖아.
라파엘은 슐로이츠가 들어 올리던 펜을 떨어뜨리는 걸 보고 얼어붙어 집무실 밖으로 빠져나갔다.
“아이고, 라파엘 경!”
밖에선 들어오지도 못하고 닉과 함께 이제나저제나 하던 의사가 있었다.
“총사령관님이 왜 저러십니까?”
성검도 안 떨어뜨리는 사람이 그 가벼운 펜을 떨어뜨려….
“깨어나신 이후로 한숨도 안 주무셨습니다.”
“예?”
라파엘이 당황했다. 슐로이츠가 복용했던 건 어쨌든 몹시도 질이 나쁜 극독이었다.
의사가 라파엘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경. 죄송하지만 가주님께 수면제라도 몰래 드시게 하면 안 됩니까? 원래 체력이 대단한 분이긴 하지만 아무튼 사람이십니다. 중독에서 막 빠져나오면 괴수라도 휴식이 절실할 겁니다.”
“군법에 따라 총사령관님께 고지하지 않은 수면제 복용 시도는 즉결 처분입니다.”
“아…. 하지만 프로키온 공으로서는….”
“될 것 같습니다. 줘 보십시오.”
라파엘이 씩씩하게 수면제를 받아 챙겼지만, 옆에 있던 닉이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죄송하지만 지금은 안 됩니다.”
“예?”
“조금 후 가주님께서 직접 법령청에 다녀오기로 하셨습니다.”
“아…. 참. 그렇죠. 사형수 중 하나가 탑의 가문인 프로키온의 직계라 필요한 의례가 복잡하지요.”
…하고 말하던 라파엘은 순간 이상함을 감지했다.
‘아닌데.’
“잠시만요. 왜 그걸 총사령관님께서 가십니까? 국법에 따르자면 사형 언도를 내린 총책임자가 직접 가야 하는데요.”
사실 블란데아의 상태가 너무 좋지 않아 그 일정은 또 어떻게 해야 하나 은근히 걱정하고 있었는데.
“어제 가주님께서 서류의 직인을 다 고치셨습니다.”
“…예?”
밤새 슐로이츠는 닉과 의사를 아무렇지 않게 유령 취급하면서, 명단에 있는 모든 가신들을 내일 아침 회의실로 긴급 소집하라는 명령이나 내렸다.
피로가 그림자처럼 짙게 깔린 바다색 눈을 느리게 깜빡이면서도 슐로이츠는 책상 앞을 떠나지 않았다.
블란데아 르페브르가 제1 지휘관의 권한으로 내린 사형 언도를 총사령관의 직인으로 새로 바꾸고.
프로키온의 가주로서, 프로키온의 손위 직계를 사형에 처하게 된 사유를 공적인 형식에 갖춰 작성하고.
블란데아의 이름은 전부 빠졌다. 이 사형 처분의 총책임자는 블란데아 르페브르가 아니라 슐로이츠 프로키온으로 하나도 남김없이 바뀌었다.
그녀는 그저 비상 상황에 성을 통제한 제1 지휘관으로서의 업적만 갖게 되었을 뿐이었다.
라파엘은 잠깐 말문을 잃었다가 간신히 씩씩하게 말했다.
“그럼 마차 안에서라도 좀 주무시지 않을까요? 물론 하루면 다녀올 거리이긴 합니다만…. 일단 제가 따라갈 테니 두 분 너무 염려 말고 계십시오.”
하지만 라파엘의 기대가 무용하게 슐로이츠는 창밖이나 물끄러미 내다보았을 뿐 눈을 붙이지 않았다.
“…잠이 안 오십니까?”
“안 와.”
“혹시 무슨 각성 상태입니까? 제가 프로키온 성 의사의 판단하에 수면제를 좀 받아 왔는데요.”
‘음. 역시 쳐다도 안 보시는군. 물론 그럴 줄 알았지.’
라파엘은 수면제를 언제든 꺼낼 수 있는 곳에 잘 넣어 놓고 물었다.
“파혼당하셨습니까? 아. 오해하실까 봐 말씀드리는데, 저 블란데아 경과는 대화도 못 했습니다. 몸이 너무 좋지 않으세요. 말이 주무시는 거지 그냥 정신을 잃으신 것 같습니다. 블란데아 경께서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르시죠?”
슐로이츠의 눈빛이 조금 어긋났다.
금사 같은 머리카락 위로 두껍게 감긴 붕대. 핏기 한 줌 없던 낯. 자신을 밀쳐내며 터뜨리던 눈물. 그를 다시는 보지 않을 거라던 목소리와 힘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던 팔다리….
슐로이츠가 가슴 속에 맹렬하고 조악하게 앓고 있던 감정이 있었다. 블란데아로부터 태어난 감정은 주인의 흐느낌과 원망과 서러움에 충실하게도 복수해 주었다. 슐로이츠의 심장 깊숙한 곳에 박혀 죽을 듯이 뒤틀려 주고 있었으니까.
“블란데아 경은 왜 기사 숙소로 순순히 보내 주신 겁니까?”
“본관이 시끄럽잖아. 그쪽이 잠들기는 나아 보였어.”
“…아. 그렇죠.”
본관은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슐로이츠에게 대의 종결을 고지 당한 귀족들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르페브르의 직계인 블란데아한테라도 매달려 보겠다고, 그녀가 머물고 있을 본관에 맨몸으로 달려들다가 끌려가는 귀족들도 있어서 매시간 전쟁이었다. 아무리 철통 경비를 세워도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
“거기서 자게 둬. 자야 나으니까.”
“그건 총사령관님께서도 마찬가지라는 걸 아시는지…. 그렇죠. 또 제 말 안 들으시죠. 괜찮습니다. 익숙해요.”
그래. 어차피 조금 있으면 마차에서 내려서 그 복잡한 의례를 다 직접 처리하셔야 하니까, 괜히 수면제를 드시고 싶진 않겠지.
‘영지로 돌아가시고 일이 마무리되면 좀 주무시겠지?’
하던 라파엘은 슐로이츠가 나흘 가까이 눈 한 번 붙이지 않는 걸 보자, 이건 좀 이상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너무 이상해서….
의사가 블란데아에게 이르러 간 줄도 모르고.
***
“프로키온 공이 안 주무신다고?”
“예. 좀, 강박적으로….”
나는 의사가 가져온 약을 바닥에 부었다.
“나도 먹지 않겠다고 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