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프로키온 영지-(19) (101/190)

아주 깊게 잠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반사적으로 이마를 찌푸렸다.

정신이 잘 들지 않고 눈앞에 안개가 낀 듯 시야가 뿌옜다. 뺨이라도 한 대 때려, 정신을 차려 보려고 손을 들어 보았지만 눈 깜짝할 새 붙잡혔다.

동시에 깨달았다.

이건 현실이다.

슐로이츠의 뺨과 턱은 조금 마른 것 같았다. 그런데도 날카로운 느낌이 들지 않는 건, 나를 쳐다보는 슐로이츠의 눈동자에 배어 있는 성마른 고통 때문이다.

멀쩡한 상태였다면, 나를 저런 눈으로 쳐다보는 그에게 의문부터 들었겠지. 하지만 그때의 나는 조금도 멀쩡하질 못했다.

“레슬리나가 당신을… 사랑한대요.”

그는 내 말을 전혀 듣지 않는 것 같기도 했고, 내 말 한마디 한마디에 아주 열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잠시간 기분이 처참해졌다. 한밤중에 떠오르는 태양을 보는 것처럼…. 원치 않는데. 두려운데. 그토록 진귀한 장면을 내 눈과 머리에 멋대로 쑤셔 넣는 이 남자를….

나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도대체 어떤 기분과 마음으로 너를 대해야 하는 거지?

“진주 가루에… 농부들의 지식을… 이용해서… 별의별 가루를 넣고 뭉쳐서… 독을 넣고… 당신 잔에 넣은… 거래요.”

작은 가짜 진주 안에 든 독은 천천히 흘러나왔을 것이고, 은잔의 표면에 닿아 변색되기도 전 이미 슐로이츠가 마셔 버렸다.

누구도 레슬리나를 의심하지 않았다. 감히. 성에 오랫동안 헌신한 집사가 주인의 잔에 치밀하게 독을 바를 것이라고, 감히 누가 의심하겠는가?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갖고 싶다고… 정신이 나가서….”

“…블란데아.”

오랜만에 듣는 슐로이츠의 음성에 마음 한쪽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 어쩌면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것과 비슷한 기분이었으리라.

“화내. 얼마든지 들어 줄 테니까. 약을 하나 먹여야 한다니, 그것만….”

“화내는 게… 아니에요. 레슬… 리나가.”

“…….”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한테… 독을 먹일 수 있겠냐고… 하던데. 그 말 때문에 하는… 말이에요.”

물속에 갇힌 것처럼 호흡이 달리기 시작했다.

“난 너한테… 독을 먹인 거나… 다름없는데.”

어릴 때 너를 만나러 가지 말걸.

“그래서 넌… 날 이렇게… 증오… 하잖아.”

가더라도 너를 볼 때마다 손을 잡지는 말걸.

평범한 지휘관으로 군부에 입단해야 했다. 슐로이츠가 나의 변심에 매번 신경을 곤두세우게 만들면 안 됐다.

그랬다면 슐로이츠는 편치 않은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그 악천후에 영지의 경계선까지 나오지 않았을 것이다.

“잠을 며칠… 못 잤다고… 했잖아. 그게 아니라… 독 때문… 이었잖아.”

고인 눈물이 시야를 흐리게 만든다.

“조금만… 늦었으면… 뭐 하나라도… 어긋났으면… 죽을 뻔… 했잖아….”

그 말을 하는데 어깨가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야라의 관. 티모테 프로키온이 아주 오랫동안 준비해 놓은 극독.

야라의 관이 호흡을 어떻게 멎게 하는지, 사람을 어떤 속도로 죽이는지. 의사에게서 보고를 받아 듣는 시간이 지옥 같았다. 단어 하나하나가 못이 되어 가슴에 박히는 듯 끔찍한 기분에, 도무지….

“매일 나한테… 화를 내는 걸로는… 부족했어?”

“…….”

“나한테… 그렇게까지… 화가 나서… 이런 식으로… 복수하는… 거야?”

결국 울음이 터져 나왔다.

나는 슐로이츠에게 붙잡힌 손을 빼내려고 했으나 그가 놓아주질 않았다. 이런 것마저 이렇게 쉽게 통제를 당해야 하나. 무력감은 분노로, 분노는 노여움으로 쉽게 윤곽을 바꾸었다. 빈혈성으로 드러나는 상처는 날것이다. 적나라하게 껍질이 벗겨져, 생혈을 뚝뚝 흘리는….

그를 밀쳐내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아주 정성껏. 이를 악물고 최선을 다해서.

그렇지 않고서는 도대체 견딜 수가 없었다. 어째서 너는 끝까지 네 마음대로야. 슐로이츠를 온전히 원망할 수조차 없는 나의 잘못임에도 그에게 탓을 돌리고 싶었다.

다른 쪽 손을 움직여 슐로이츠의 가슴을 밀어냈다. 하지만 아무리 밀어내도 그는 도무지 밀리지를 않으니, 어느새 내 손은 그의 가슴을 때리고 있었다.

몇 대나 때렸는데도 슐로이츠는 내 손을 조금도 막지 않았다. 내 손에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대단한 기사인 그에게 이 정도는 간지럽지도 않아서인지….

“너는 진짜… 너무 못됐어. 정말… 못돼… 빠졌어!”

눈물이 뺨을 타고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렸다. 흐느낌이 멈추질 않았다.

“내가… 그렇게 미워? 나를 평생… 이렇게까지… 괴롭혀야… 네 마음이… 풀려?”

“…….”

“이럴 거면… 차라리 나를… 놔줘.”

“싫어.”

이제껏 동상처럼 굳은 채로 가만히 나를 쳐다만 보다가, 그 말에만 내뱉는 대답에 또다시 화가 솟구쳤다. 그는 끝까지, 정말이지.

눈앞에서 무언가가 차례로 터지는 기분이었다. 화가 났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어딘가가 크게 고장이라도 난 사람처럼 눈물이 정신없이 쏟아졌다. 나는 몸을 마구 비틀었다.

“놔!”

“블란데아, 제발.”

내 손과 허리를 붙들던 슐로이츠가, 내가 헐떡이기 시작하자 아예 나를 품에 껴안았다. 이상할 정도로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

“약 지금 먹여.”

분명 슐로이츠를 제외하곤 이 방엔 아무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의사가 나타나 내게 신속하게 약을 먹였다. 두 눈을 뜬 채로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 그렇게나 어지럽고, 막막했다.

의사가 진땀을 흘리며 참담한 어조로 말했다.

“아가씨, 이젠 괜찮습니다. 계속 처방해 드렸던 약 때문에 지금 기분 조절이 잘 되지 않는 상태이십….”

슐로이츠가 의사의 말을 끊었다.

“나가.”

“가주님. 지금 아가씨가….”

“위험한 게 더 없으면 나가 보라고.”

“그…. 그럼 가주님. 지금처럼 몸을 잘 붙잡고 계셔 주셔야….”

순식간이었다. 거짓말처럼 의사가 또 사라졌다.

의사의 말을 되짚어 보려고 했는데 잘 되지가 않았다. 의사의 말이 꿈결이었던 것처럼 아무것도 머릿속에서 정리가 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휘저으며 슐로이츠에게서 떨어지려고 애썼다. 그럴수록 그는 나를 단단하게 껴안았다. 놓아주질 않았다.

“날 때리고 싶잖아. 때려.”

“아프지도… 않잖아!”

가슴에 화약고가 있는 것 같았다. 그의 별거 아닌 말 한마디 한마디에도 걷잡을 수 없이 타올라 나를 살라 먹는다. 그렇게 시뻘건 불길이 뇌까지 죄 익게 만드는 혼란한 느낌에 도무지 정신이 차려지지 않았다.

손이 닿는 범위에서 슐로이츠의 어깨와 등을 몇 번이나 때렸지만 그뿐이었다. 발버둥을 칠수록 몸이 점점 처지는 건 나였다. 고작 몇 대 때리는 것만으로도 힘이 쭉 빠져 괴로웠다.

나는 슐로이츠의 어깨 위에 고개를 떨어뜨린 채 천천히 헐떡였다.

“블란데아.”

숨이 차올라 대답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나를 껴안고 있는 슐로이츠의 단단한 팔에 힘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나를 멋대로 통제하고 있는 그의 말도 안 되는 힘이, 어째서 매달리는 소년처럼 연약하게 느껴질까…. 어렴풋이 든 생각은 어렴풋이 사라졌다. 몸은 끊임없이 떨렸고 수많은 감정들이 일시에 사무쳐 한 줌 기력마저 전락시켰다.

슐로이츠의 손이, 아니 손 같은 게 내 등을 쓸어내리는 게 느껴졌다. 어딘가에 그저 붕 떠 있는 듯 부정확하기만 한 감각.

“네가 때리는 건 하나도 아프지 않아.”

“…….”

“네가 때리는 것보다 네 말이 더 끔찍하게 괴로워.”

“괴로워?”

“그래. 그러니까 말을 해.”

“무슨… 말이… 괴로운데?”

“…….”

슐로이츠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전부.”

“네가… 보고 싶지… 않아.”

“그래. 그런 말이 특히….”

“…….”

슐로이츠가 내 머리를 아주 약한 힘으로 조심스럽게 눌렀다. 그의 목덜미에 붙게 되는 턱. 내가 자기 귀를 물어뜯으면 어쩌려고 이렇게 무방비할까.

“…그런 말이나 해 줘, 블란데아. 온종일 괴로워해 줄 테니까.”

“싫어.”

나는 이를 악물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네가 원하는… 건… 이젠 죽어도… 아무것도… 해 주지… 않을….”

“미안해.”

한순간 공기가 죄 사라진 것 같았다. 숨이 그렇게나 턱 하고 막혔다.

“미안해. 블란데아.”

“…….”

“네게 한심하게 화를 냈어. 내가…. 빌어먹게 한심한 새끼라서.”

“…….”

“너를 괴롭히고….”

“…….”

“네 몫이 아닌 화까지 냈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린다. 바로 코앞에 있는 슐로이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깊은 밤바다 같은 눈동자에 내가 드문드문 비친다. 시야가 흐려 잘 보이지 않았지만, 지금 나는 아주 서러운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사실, 슐로이츠가 내게 화를 낼 때마다 무언가를 꾹꾹 눌러 삼키고 있었던 것 같다.

그가 나를 죽이겠다고 할 때마다, 죽이고 싶다고 할 때마다 무섭고 서운했던 것 같다.

그런 게 분명했다….

“정말… 보기 싫어….”

“…그래.”

“넌 정말… 어떻게 그렇게… 못됐는지… 몰라….”

“알아. 미안해.”

“다신… 안 볼… 거야….”

“…….”

숨도 쉬지 않고 그저 흐느끼고만 싶었다. 그에게 불만을 터뜨리고 싶었고, 할 수만 있다면 이 남자에게 한마디라도 더 상처를 입히고 싶었다. 내가 이렇게 괴롭다고 그에게 온몸으로 소리치고 싶었다.

야속하게도 힘이 들어가질 않았다.

숨이 가파르게 올라왔다. 몸이 축 늘어졌다. 슐로이츠의 어깨를 밀어내고 싶었지만 끌어안긴 자세 그대로였던지라, 나를 쓰러지지 않게 지탱하고 있는 건 사실상 그의 몸이었다.

잠이 오니까 놔 달라고,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던 것 같다. 그는 나를 놔주기는커녕 내 몸을 더 단단히 끌어안기만 했다. 내 머리를 감싸 껴안는 슐로이츠의 손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나를 재우려는 것처럼 등을 가볍게 쓸어내리는 손길에 혼란하던 정신이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나는 슐로이츠의 가슴에 뺨을 기댄 채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이윽고 나는 완전히 잠에 빠졌다.

***

다음 날.

라파엘은 얼빠진 어조로 중얼거렸다.

“아…. 내가 아직 꿈을 꾸고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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