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을 구해 온 건 숙부님이세요.”
레이디 레슬리나의 숨이 조금 빨라졌다.
“전 숙부님의 별채를 몰래 뒤져서, 해독제를 구해 놓았을 뿐이에요. 숙부님이 독을 구했다는 사실은 차마 알릴 수 없었어요! 공께서도, 영애께서도 이미 부재중이셨고….”
“…….”
“혹시라도 사람들에게 알려도 숙부님은 프로키온의 혈족이시잖아요! 권력을 이용해서 숙부님께 해독제를 빼앗길까 봐 두려웠어요. 제가 갖고 있다가 슐로이츠 공께 드리려고 했을 뿐….”
“1번도 2번도 안 고르겠다면 내가 고르도록 할게.”
아그네스에게 사무적으로 손짓을 하면서도, 블란데아의 두 눈은 레슬리나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나도 사람 목숨 잔인하게 뺏는 건 익숙하지 않으니까….”
“…….”
“1번이 좋겠네. 자살은 괴롭거든.”
“……!”
“그렇게 결정할까? 아그네스, 지금부터 하는 모든 말은 전부 기록해. 사형수면 사령부에 비공식적으로 제출할 문서도 필요하잖아.”
“예. 블란데아 경.”
순간 레슬리나는 깊은 무력감을 맛보았다. 아무리 항변하고 애원해도 소용이 없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마치 견고한 성벽 같았다.
저렇게 달콤해 보이는 외양으로 웃음기 한 줌 없이, 그녀가 판단한 선고만을 가차 없이 집행하려는…. 일이 잘 풀리지 않더라도 말 몇 마디로 그녀를 구워삶는 건 어렵지 않을 거라는 판단은 착각이었다.
레슬리나의 눈이 재빠르게 돌아갔고, 눈 깜빡할 새. 그녀는 블란데아의 약점을 발견했다.
“르페브르 경. 혹시… 아프신가요?”
두려움과 조심스러움이 뒤섞인 목소리는 끝이 가볍게 떨렸다. 레슬리나는 죽음의 공포 속에서 치밀하게 블란데아를 관찰한 끝에, 그녀의 밑도 끝도 없는 냉랭함이 어디에서 기인했는지 알아챌 수 있었다.
기력의 쇠락이다.
그녀는 거의 죽어 가고 있었다.
어쩌면, 정말 어쩌면 맥박이 조금 오락가락할 정도로…. 미약하게 내뱉는 숨소리는 자세히 들어보면 불안정했다.
“아프신 거죠? 많이… 아프신 거죠? 그래서 제게 이렇게 화를 내시는 거죠? 아니에요, 정말로 아니에요. 저는 정말 공을 모시는 가신으로서, 그저 공의 안위만을 생각했어요. 영애, 아니 르페브르 경.”
그녀가 떨리는 손을 들어 블란데아의 손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블란데아의 등 뒤에서 대기하고 있던 두 명의 기사가 잠시 인상을 썼지만, 그뿐. 최고 결정권자인 블란데아가 아무런 명령도 내리지 않아 누구도 자세를 풀지 못했다.
“제발 저에게 이러지 마세요….”
“…….”
“제게 선대 부인이… 그러니까 슐로이츠 공의 어머님께서 특별히 물려주신 희귀한 약이 있어요. 그걸 드시고 한숨 푹 주무시면 분명 몸이 다 나으실….”
“선대 프로키온 부인?”
“네, 부인께서…. 저를 몹시 아끼셔서…. 저희 어머니와 부인께서 정말 막역한 사이기도 하셨….”
블란데아가 웃음을 터뜨렸다. 눈은 냉혹하게 얼어붙어 있는데 소리만 가볍게 내는 조소. 레슬리나는 이런 웃음을 모르지 않았다. 고위 귀족들 특유의 우아하고 강렬한 멸시.
“내게 매달리고 싶으면 매달리기만 하든지, 질투를 유발하고 싶은 거면 질투만 유발하게 하든지….”
순간 레슬리나의 귀가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녀의 얼굴에 은은하게 서리는 수치심과 분노. 하지만 레슬리나는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블란데아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귀한 거면 레이디가 사랑해 마지않는 총사령관님께 전해 드리지 그랬어.”
“저는….”
“군인으로서 이 자리에 있으니 형식적인 예의를 지켜 주자면, 나는 그딴 약 필요 없어.”
“오해하지 마세요! 르페브르 경, 저는 그저…!”
“그래, 계속 억지를 써. 몰래 살해하려고 했던 이안이란 하인을 다시 대면하고 싶으면.”
레슬리나의 입이 얼었다. 아까 전, 배반당한 걸 안 이안이 레슬리나와 대면하자마자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었다. 군인들이 막고 있어서 문제는 없었으나 그 악마 같던 표정은 아직도 잊을 수가 없었다.
전신이 구속된 티모테와는 달리, 레슬리나는 적어도 사지는 자유로웠다. 그녀의 동공이 흔들렸다. 레슬리나가 블란데아의 다리에 매달렸다.
“저는! 저는 그런 극독인 줄 몰랐어요! 아무리 그래도 티모테 경은 슐로이츠 공의 숙부님이신데, 그저 일주일 앓게 만드는 약이겠거니 싶었다고요! 사랑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그런 극독을 먹이겠어요! 아시잖아요! 경께서도 총사령관님을 사랑하니까 아실 거 아니에요! 사랑하는 사람의 입에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 독을 쏟아 넣을 수 있겠어요? 그럴 수 없는 걸 경도 아시잖아요! 제발….”
숨도 쉬지 않고 가쁘게 결백을 주장하던 레슬리나가 순간 말을 멈췄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블란데아의 눈동자가 아주 잠시간 뒤틀렸기 때문이다.
“프로키온 부인께서… 살아 계셨다면 분명… 분명 저를 믿어 주셨을 거예요….”
한 번만 더 잘 두드리면 살아날 수도 있을 거란 미약한 희망이 레슬리나를 다급하게 만들었다.
“슐로이츠 공의 외가도 예전에 공을 저버렸는데, 저까지 이렇게 억울하게 죽으면 그분이, 슐로이츠 공이 너무 가엽잖아요.”
바로 앞에는 레슬리나가. 뒤에는 군인들이. 현재 블란데아의 어깨 위를 무겁게 빛내는 견장은 제1 지휘관의 것.
이런 상황이 아니었다면, 이런 경우가 아니었다면. 블란데아가 르페브르 경이 아니라 그저 르페브르 영애였다면…. 방금 레슬리나의 말을 듣는 순간, 블란데아는 저도 모르게 마른세수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상황이 블란데아에게 섬약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을 허락지 않았다. 그렇기에 블란데아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으며, 그녀의 낯은 여전했다. 여전히 많은 것들을 씻어 내지 못한 채였다. 가면처럼 두른 딱딱함도 한결같기만 해서.
“제가 아니면 누가 그분의 어머니를, 선대 프로키온 부인을 기억할 수 있겠어요…? 네? 르페브르 경, 제발….”
“프로키온이라면 이젠 지긋지긋해.”
순간 레슬리나는 귀를 의심했다. 블란데아는 더 말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다리가 순간이지만 조금 후들거렸다.
“서류… 마무리 지어, 아그네스.”
“…존명.”
레슬리나의 두 눈이 충격으로 얼룩졌다.
“르페브르 경!”
그녀가 비명 같은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두 눈동자는 이미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프로키온이 지긋지긋해요? 공과 결혼하려고 여기까지 왔으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요? 당신이 아무렇지 않게 가지게 된 건 내가 평생 바라 왔던 거예요! 나만 그런 줄 알아요? 슐로이츠 프로키온 공을 사랑한 여자가 고작 나뿐이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쉽게 다 가졌으면서! 그저 슐로이츠의 주변을 맴도는 여자 하나도 기어이 죽음으로 끌고 가려는 본성이 어찌나 지독한지!
“공께서는 진심으로 잘못된 선택을 하셨어요! 당신의 그 잘난 가문 때문에, 고작 그것 때문에 이렇게나 비정한 여자를…!”
“프로키온 경에게 다른… 가문이 필요하다고 생각해?”
“…….”
“오래 성을 안주인… 처럼 관리했으니 더 잘 알 텐데.”
“…….”
레슬리나의 호흡이 불규칙적으로 변주되기 시작했다.
“당신 같은 여자 때문에 죽고 싶지 않아! 내가 왜 죽어야 해? 왜!”
“레이디 레슬리나.”
“…….”
흥분한 와중에도 소름 끼치게 잔잔한 호명에 레슬리나는 숨이 턱 막혔다.
“레이디는… 내가 아니라 라자크 왕국의 국법과… 그대가 누렸던 귀족의 의무를 어긴 죄로… 죽는 거야.”
“…….”
“감히 프로… 키온 공을 독살하려고 했으니, 그 죄로 시체도… 거두지 못하고 비참하게… 처형당하는… 거라고.”
타오르는 불길에 손을 넣지 않아도 뜨거움은 짐작할 수 있다. 눈앞의 이 여자가, 블란데아 르페브르가 내내 두르고 있는 냉랭한 고상함이 그랬다. 실제의 무자비한 온도를 끊임없이 상기하는 열기. 감히 뛰어들 용기조차 꺾어 버리는, 혈통이라는 높디높은 벽.
그래, 눈앞의 이 여자는 슐로이츠가 부재해 있는 동안 행정적으로는 군부의 최고 결정권자이며, 이 먼 영지에서조차 귀족들을 벌벌 떨게 만드는 르페브르의 귀하디귀한 직계 혈족….
블란데아가 걸음을 떼고, 레슬리나는 살려 달라고 소리를 지르며 뛰어들었지만 아그네스를 위시한 살벌한 낯의 군인들에게 가로막혔다.
아까 전부터, 도를 넘은 상관 모욕으로 레슬리나의 입을 틀어막으려다가 군인들한테 몇 번 제지당한 아그네스가 사무적인 어조로 말했다.
“군법에 따라 당신은 이 시간부로 1급 사형수로 취급됩니다.”
“안 돼…”
“최종 재판은 군부에서. 목이 곱게 잘려 죽기를 바라기나 하십시오.”
“안 돼! 살려 줘! 영애!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 슐로이츠!”
레슬리나가 비명을 지르며 끌려갔다.
***
“아가씨. 제 오라버니가 보기보다. 유능합니다. 걱정 마시고.”
페니의 목소리가 웅웅대며 들렸다. 잘 들리는 것 같지도 않았다. 급히 뛰어온 것 같은 의사는 심각한 얼굴로 내게 뭘 자꾸 먹였는데, 몇 번 넘기다가 토하자 페니는 거의 울상이었다.
“나 괜찮… 은데….”
“예, 아가씨. 괜찮으십니다. 아무 문제 없으세요. 그러니까 마음 놓고 한숨 푹 주무세요.”
해독제니, 독하다느니, 과로가 겹쳐서, 충격을 크게 받아서….
그런 말들이 드문드문 들렸다. 심문실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쓰러져서 잠깐 기억이 끊겼는데….
자면서 춥다는 생각을 계속했는데, 이상하게 목 아래는 땀으로 젖어 흥건했다. 시트와 잠옷이 매번 교체되어 있지 않았으면 많이 찝찝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페니가 방금 전 나를 욕조에 넣고 씻겼는지 머리카락이 덜 말라 젖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팔을 짚어 물속에서 깨어나듯 상체를 일으켰다.
몇 시간이나 지났는지 모르겠다. 어쩌면 며칠이 지났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
아니면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걸 수도 있었고.
눈앞에 있는 남자를 본다. 내 뺨을 감싸는 그의 손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아주 낯선 광경이었다. 이렇게 직접 보면서도 좀처럼 믿을 수가 없어서….
몇 번, 아이처럼 눈만 깜빡이게 되는….
“…슐로이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