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프로키온 영지-(16) (98/190)

“…경.”

“중독… 됐다고. 성으로 가야 해.”

“블란데아 경.”

“성으로 돌아가야 해…. 라파엘.”

“블란데아 경.”

“마차를 끌던 말들이 군마였으니… 훈련을 충분히 받았잖아. 멀리 가지 않았을 테니까, 호각으로 불러서 다리를 확인해 보고, 습보는 무리일 테니까 구보로라도….”

“블란데아 경!”

나를 흔들어 깨우듯 확 높아졌던 라파엘의 목소리가 이윽고 잦아들었다.

“괜찮습니다. 울지 마세요….”

“…….”

슐로이츠의 얼굴 위로 뚝뚝 떨어지는 게 빗물인 줄 알았다. 순간 그렇게 오해할 만큼 정신이 없었다.

“총사령관님께서는 야라의 관에 중독되신 것 같고, 제가 해독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어떻게? 그때만큼은 머리에서 흐르는 피를 의식도 못 할 만큼 놀랐다.

“자세한 건 이따가 설명하고, 어쨌든 해독제가 있습니다. 해독제 병을 딸 수가 없어서 도구들이 있을 위로 올라온 건데….”

라파엘이 입술을 짓씹었다.

이런 오두막들을 이곳저곳에 만들어 놓기는 했는데, 프로키온 영지는 선대의 반역죄로 인해 기사단이 해체된 가문이었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오두막 관리에도 소홀해질 수밖에 없었다. 2층과 이어지는 쇠 덮개는 녹이 슬어 무슨 짓을 해도 열리지 않았다.

라파엘은 어쩔 수 없이 바깥으로 나와 2층에 난 문을 통해 들어왔지만 날씨는 폭우가 아니라 폭풍우. 문을 간신히 열고 들어갔더니 아이가 날아갈 정도로 엄청난 바람에 문이 기형적으로 닫혀 열리지 않는다고.

아까 전, 무언가를 마구 두드리던 소리가 라파엘이 문을 열려고 애쓰는 소리였던 모양이다.

“블란데아 경. 해독제는 직접 입에 머금고 규칙적인 숨과 함께 정확히 30초 동안 흘려 넣어 주셔야 합니다. 시간은 제가 세겠습니다. 기도가 막히지 않게 주의하셔야 하고….”

“알았어.”

“문제는 해독제도 굉장히 독해서 경도 아프실 겁니다. 괜찮….”

“빨리 줘.”

“좀 제 말을 들으시고….”

“라파엘, 제발. 빨리….”

“…….”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를 다잡아야 된다는 생각도 들지 않았다.

손도, 목소리도, 입술까지도…. 하나도 빠짐없이 벌벌 떨리기만 해 그 어떤 것도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심해에 추락한 사람처럼 모든 상황이 쉽게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내 앞에서 눈을 뜨지 못하는 슐로이츠의 모습이….

어찌나 낯설고 두렵고, 받아들이기가 싫던지.

2층과 이어진 좁은 파이프 관을 타고 해독제 병이 조심스럽게 떨어졌다. 라파엘이 셔츠를 찢어 마련한 것 같은 옷감으로 둘둘 말린 금속제 병.

나는 덜덜 떨리는 손을 움직였다. 느슨하게 닫힌 뚜껑을 열고 약을 입 안에 머금었다. 입 안이 화하고 따가웠다.

위쪽에서 라파엘이 초를 셌고 나는 슐로이츠를 놓치지 않으려 주의하며 그의 입 안으로 해독제를 흘려 넣었다.

나는 정말로 독이 싫었다.

슐로이츠와 엮이는 독이 혐오스러울 정도로 싫었다.

어릴 적 내게 중독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홱 돌아서던 소년이 생각나 우울해졌고, 원작에서는 결국 독 때문에 매일매일 죽어 가던 슐로이츠가 생각나 기분이 하염없이 가라앉았다.

내가 그를 어떻게 구해 놨는데. 슐로이츠는 또 이렇게 끔찍한 것에 중독이 되고….

몸이 피곤한 것 같으면 그냥 성에서 쉬었으면 될 일이잖아.

나도 제1 지휘관이니까 내가 군부령 기사들과 태엽 성물들을 회수해 오면 되는 일이었는데.

성검? 나도 쓸 수 있었다. 슐로이츠만큼은 아니지만 나 역시 충분히 쓸 줄 알았다. 이런 사소한 일정 하나하나 굳이 그가 지휘할 필요가 있었을까?

슐로이츠는 정말 끔찍하게도 성실하고, 비효율적이고, 못돼 빠진 데다가, 나를 하나도 믿지 못해서….

원작에서도 총사령관의 자리를 지키며 죽어 버리더니….

“됐습니다! 블란데아 경!”

나는 슐로이츠에게서 몸을 들어 올렸다. 목 아래로 흘러 들어간 얼마간의 해독제가 어찌나 아리던지.

목에 불길이 붙은 기분이었다. 위스키에 럼주를 섞어 그대로 들이켠 것처럼 괴로웠다.

나는 몸을 숙이고 기침을 쏟아 냈다. 목 한가운데에 가뭄이 든 것 같다.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뛰쳐나가 빗물을 주워 마시고 싶을 정도로 심한 갈증이 들었다.

조금 후, 애써 정신을 다잡은 나는 슐로이츠의 몸 위로 엎어졌다.

르페브르의 피에는 정화의 힘이 흘렀다. 그렇다고 독을 해독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그런 원리라면 삼키는 약마다 전부 무효로 만들어 버릴 테니까.

하지만 르페브르니까.

르페브르이기 때문에, 슐로이츠의 어딘가가 오염되어 썩어 들어가고 있다면 그건 막을 수 있었다.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팔로 슐로이츠를 껴안았다. 최대한 많이 닿게끔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는데도 그의 몸은 나에 비해 너무 컸다.

내가 해독제를 똑바로 먹였기만을 바랐다. 라파엘이 나를 안심시키려고 있지도 않은 해독제를 슐로이츠에게 먹인 게 아니길 바랐다. 전우가 눈앞에서 죽으면 충격에 빠진 군인을 진정시키기 위해 거짓말을 하는 것도 지휘관이 배워 놓아야 할 항목이었으니까….

가장 한심한 건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진실이 무서워 라파엘에게 추궁 한마디 못 하는 내 모습이었다.

“블란데아 경. 잠깐만 귀 좀 막고 계십시오.”

슐로이츠의 귀를 막고 기다리자 엄청난 굉음이 들렸다. 순식간이었다. 물에 젖은 생쥐 꼴이 된 라파엘이 벌컥 문을 열고 들어선 것은.

“아니! 경 귀를 막고 계시라고요!”

“문을….”

“그냥 뜯어 날렸습니다. 오두막이 무너질까 봐 좀 망설였는데 안 무너지네요.”

“라파엘….”

“예? 아니, 왜 또 벌벌 떨고….”

“진짜 해독제 맞지?”

라파엘이 입을 자그맣게 벌리는가 싶더니 이내 이마를 홱 일그러뜨렸다. 그리고 상급 지휘관다운, 확신과 신뢰가 넘치는 어조로 단호하게 날 안심시켰다.

“진짜입니다.”

“…….”

“아니, 예. 그렇죠. 놀라셨죠…. 다 괜찮아질 테니 울지 마세요.”

라파엘이 어쩔 줄 몰라 하며 손수건을 꺼내 내게 내밀었다.

어떻게 해독제를 구했느냐는 질문은 필요 없었다. 이런 상황에 해독제가 있었다는 소리는 라파엘이 상시로 갖고 다니고 있었다는 소리고, 이 말인즉슨 누군가가 ‘야라의 관’이라는 독을 구비한 상태라는 정보를 라파엘 측에서 이미 알고 있었단 소리니까.

나는 슐로이츠의 목에 다시 얼굴을 파묻으며 물었다.

“누구야.”

“…티모테 프로키온입니다.”

“슐로이츠는.”

“…예?”

“그도 알고 있었어?”

“아. 예. 4년 전 야라의 관을 극비리에 수배했다는 정보를 총사령관님께서 입수하셨습니다. 티모테 프로키온이 독을 먹일 상대라면 총사령관님밖에 안 계시니, 해독제는 그때부터 구해 상비하고 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럼 그냥 죽였으면 됐잖아.”

“어찌 되었든 티모테 프로키온은 총사령관님의 가까운 친족이니, 프로키온 영주로서 평판을 고려하지 않을 수도 없으셨을 겁니다.”

“평판?”

나도 모르게 어긋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할 수만 있다면 정말 최선을 다해, 라파엘의 그 말을 비웃고 싶었다.

몸을 들어 올린 나는 재차 되물었다.

“언제부터?”

“…제법 되었습니다만.”

“언제부터 평판 같은 걸 고려했다고.”

“블란데아 경….”

“죽을 뻔했잖아.”

“…….”

“정말로 죽을 뻔했잖아.”

모래를 한가득 입 속으로 삼켜 버린 기분이다. 가슴이 온통 까끌거리고 거슬리는데 뱉어 낼 수도 없어서. 그대로 폐까지 짓눌러 버리는 좁쌀 같은 무수한 통증들….

“…총사령관님은 죽지 않으셨습니다. 죽지 않으실 거고요. 해독제는 언제나 준비해 다녔습니다.”

라파엘의 말은 분명히 사람을 안심시키는 힘이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저 화가 나기만 했다. 이상할 정도로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라파엘이 함께 날아갔으면?”

“…….”

“마차가 반파가 났으면 도대체 어쨌으려고.”

“블란데아 경…. 오히려 잘된 겁니다. 이젠 깨끗하게 해결할 수 있잖습니까. 고위급 귀족으로서 정치적 입장을 고려하는 상황은 저보다 르페브르 영애이신 경께서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알지. 알아.”

“그러니까 그만 좀 우시고요….”

라파엘은 틀린 말을 하지 않았으나, 나는 정말로 이해가 가지 않았다. 원작에서는 슐로이츠가 티모테 프로키온을 빠르게 처리해 버리는 걸로 나왔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던 그 짧은 구절….

영지 같은 건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으면서 왜 지금은. 한 번도 그런 걸 신경 쓴 적이 없었으면서.

이번은 왜 이렇게 영지를 신경 쓰고 평판을 관리하는데. 그러다가 죽었으면?

도대체 그는 자신의 목숨에 왜 이렇게 무심하고 느슨하게 굴지?

내가 어떻게 네 목숨을 살렸는데.

화가 났다. 이를 악물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화가 나 견딜 수가 없었다. 언제부터인가 내 마음은 잿더미 아래의 숨죽인 불씨처럼 조용히 불타고 있었다.

애써 삭이고 있던, 그래서 나조차도 가끔은 잊어버렸던 불티는 바싹 메마른 숲을 만나 한순간 들불처럼 번졌다.

걷잡을 수도 돌이킬 수도 없었다.

나는 한 손으로 젖은 뺨을 쓸어 닦았다. 속눈썹 부근이 화하게 아렸다.

화가 나서인지 슐로이츠는 꼴도 보고 싶지 않았다. 나는 붙잡고 있던 그의 손을 놨다가 이를 악물고 다시 잡았다.

지금은 그래. 비상사태니까. 혹시 모르니까. 성에 돌아가 의사에게 보일 때까지는 잡고 있어야겠지….

목 아래가 꽉 눌린 듯 갑갑했다.

그래도 여전히 슐로이츠가 보고 싶지 않아, 나는 라파엘이 쥐여 준 손수건에 눈가를 파묻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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