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프로키온 영지-(15) (97/190)

쾅!

티모테 프로키온이 테이블을 세게 치며 일어났다. 그의 얼굴은 납처럼 창백해진 상태였다. 없었다. 철저히 숨겨 놓은 ‘그 물건’이 없어졌다!

“도대체…! 그게 어디로 사라진 것이냐…!”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았으나 마지막 이성을 닥닥 끌어모아, 겨우 소리를 꽥꽥 지르지 않을 수 있었다.

“‘야라의 관’이 어디 있냐고 묻지 않아…!”

이를 악문 티모테는 보좌관에게 간신히 작은 목소리로 다그치듯 물었다.

야라의 관.

티모테 프로키온이 오래전 간신히 구입에 성공한 극독이었다.

주목 씨앗, 사리풀의 잎, 꽃이 피는 시기에 채취한 독미나리의 열매, 그 외의 값비싸고 희귀하기 그지없는 독극물들의 혼합…. 야라의 관 한 병을 만들기 위해 숲 하나와 백 마리의 동물이 갈려 들어갔다고 했다.

대부분의 극독은 유효 기간이 극단적으로 짧았다. 시간이 지나면 약효를 잃거나 혹은 극도로 약효가 떨어져 쓸모가 없어졌다.

하지만 야라의 관은 시간이 오래 지나도 극독인 반면, 구하는 게 아득할 정도로 까다로웠다.

프로키온 가주 자리에 대한 티모테의 욕망은 이제 와서 굳이 되짚을 필요도 없었다. 숙원. 욕심. 야욕.

기껏 독을 구해 놓았으나 슐로이츠를 처리할 방법이 요원했다. 성에 내려오지도 않는 녀석을 무슨 수로!

이번 연회는 처음이자 마지막 기회였다. 어떻게든 슐로이츠에게 먹이기 위해 위험도 무릅쓰고 성의 별채까지 가지고 왔으나, 그 잘난 대귀족가의 영애는 또 어찌나 배워 먹었는지 잔이란 잔을 전부 은잔으로 바꿔 놔 또 골머리를 앓던 참이었다.

그런데 그 독이 없어지다니!

하지만 자신이 머무는 별채에 들어올 수 있는 이는 극히 적었다. 드나드는 이라고는 전부 자신의 심복이었다. 충분한 금화로 매수해 놓은 하인들이 청소까지 도맡고 있….

순간 머리에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여길 치우던 놈들 다 어디로 갔느냐!”

“예? 아, 티모테 공. 혹시 이안을 말씀하시는 거라면 어젯밤 그만두겠단 의사를 표하곤 새벽에 떠났습니다.”

“뭐?!”

“레이디 레슬리나께서 로글린 저택에 데려가시겠다고….”

레이디 레슬리나?

“설마….”

티모테 프로키온은 허겁지겁 해독제를 따로 숨겨 놓은 상자를 뒤졌다. 당연히도, 해독제를 숨겨 놓은 상자 역시 텅 비어 있었다.

“이런 미친!”

티모테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당장 레이디 레슬리나의 멱살을 낚아채기 위해 별채로 쳐들어갔으나….

“저 마차들은 다 뭐냐? 어? 관료들의 마차가 아니잖아!”

뜻밖의 광경이 티모테를 맞이했다.

수십 대의 화려한 귀족 마차들. 색색깔의 비단을 덧대거나 보석을 박은 마차들은, 폭우에 푹 젖어 시든 꽃다발처럼 지저분해 보였다.

“레이디 레슬리나께서 별관에서 작은 파티를 여셨습니다만… 무슨 일이신지요? 초대를 받으셨습니까?”

‘이런… 이런 미친! 저 계집이 정말 정신이 나갔군!’

사람으로, 귀족들로 벽을 쳐 보겠다? 산 채로 불길을 삼킨 듯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티모테는 연거푸 심호흡을 반복한 후 간신히 걸음을 뗐다.

“티모테 공? 갑자기 여기까진 무슨 일이신가요?”

작은 파티라고 해 놓고 얼마나 많은 귀부인과 레이디들을 불러 놓았는지 모를 일이다. 자신을 보는 레이디 레슬리나의 놀란 표정은 늘 그렇듯 완벽하게 가식적이었다.

하지만 도살당하기 직전의 짐승처럼 그저 꺼림칙하고 가련하게 반들거리는 눈동자. 그리고 보란 듯이 가슴 위에 은줄을 달아 걸어 놓은 해독제 병.

이 정신 나간. 정신 나간. 정신 나간. 정신 나간. 정신 나간. 정신 나간. 정신 나간. 정신 나간…!

“레이디… 레슬리나…. 우리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겠소?”

“곤란하네요. 티모테 공. 지금은….”

애간장을 태우듯 말꼬리를 늘인 레슬리나가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하지만 이리 부탁하시니… 무슨 용건인지 모르겠네요. 저쪽에서라도 잠시 얘기를 나누실까요?”

쾅!

얇은 휴게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티모테가 레슬리나의 어깨를 벽으로 밀쳤다.

“네가 감히 내 방을 뒤졌느냐?”

“숙부님.”

“숙부라는 소리 좀 집어치워!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 같으니까!”

“그렇게 위험한 독을 준비하시면 어떡해요? 숙부님.”

“너…!”

“누가 드시면, 그것도 귀한 분께서 자칫 중독이라도 되면 어쩌시려고요.”

심상치 않은 말에 티모테가 두 눈을 부릅떴다.

“너…. 너…. 설마, 혹시….”

“제가 이 많은 여인들로 벽을 세워 놓은 거라고 생각하셨을까요? 어쩜, 숙부님께서는 여전하셔요. 어떻게 이렇게까지 변치 않고 뻔하실 수가 있나요?”

레슬리나는 오늘 아주 공들여 치장한 상태였다. 비록 분노로 가득 찬 티모테의 눈엔 제대로 들어오지도 않았지만, 초청받은 손님들이 하나같이 놀라서 물어볼 정도였다.

레슬리나가 사랑스럽게 웃었다.

“독약은 숙부님이 준비한 것이고.”

“……!”

“저는 이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해독제를 먹여 드릴 거랍니다.”

긴 연극의 한 장면처럼 말이다. 가장 중요한 장면. 가장 핵심인 클라이맥스. 인생에 다시없을 그 무대 한복판에 자신과 슐로이츠가 있을 것이다.

“해독제? 해독제…? 너, 설마… 슐로이츠 녀석에게…? 도, 도대체 어떻게?”

“숙부님. 잊으셨나요? 그 여자가 오기 전까진 제가 이 성의 안주인이었답니다.”

남모를 안전장치를 암시하는 레슬리나의 미소가 비밀스럽게 깊어졌다.

레슬리나의 손바닥에는 채 털어 내지 못한 진주 가루가 붙어 반짝이고 있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가 잔이란 잔을 죄 은잔으로 바꿔 놓아서 조금 애를 먹긴 했지만….

조금 후 성으로 돌아올 그 근사한 남자는 이미 사경을 헤매고 있을 테지.

모든 귀족들의 선망을 받는 그 남자에게, 해독제를 먹여 주는 제 모습을 떠올리면….

그 구세주 같은 정경을 두고, 누구도 레슬리나 외의 다른 프로키온 부인을 상상하지 못할 것이다.

“프로키온이라면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숙부님. 사랑에 빠지면 제정신이 아니게 되는 거 말이에요. 선대 공께서도 정부에게 반해 가문의 평판이며 지위를 바닥에 내버리셨잖아요.”

“하!”

티모테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그렇지요? 숙부님.”

“망상에서 제발 깨어나! 미친 것도 정도가 있지! 네가 정말로 프로키온인 줄 아느냐!”

티모테가 결국 노호를 내질렀지만 레슬리나는 볼까지 발그레하게 붉히고 웃었다.

“이제 곧 될 텐데요.”

“미친, 진짜 제정신이 아닌 계집…! 그 정도면 정신병도 단단히 들린 거다!”

“마음껏 떠드세요. 하지만 숙부님. 지금이라도 제게 잘 보이시면, 프로키온 부인이 된 제가 숙부님을 살려 주자고 자비를 베풀 수도 있지 않을까요?”

레슬리나가 목에 걸고 있는 해독제를 당장이라도 잡아 뜯고 싶었으나 그럴 수 없었다.

저 금속 병은 레슬리나가 차려입은 청록색 드레스와 사파이어 장신구와는 조금도 어울리지 않았다. 눈에 띄게 이질적이었으니, 자리에 참석한 모든 귀족이 분명히 똑똑히 기억할 해독제 병….

그런데 이 자리에서 티모테가 금속 병을 탈취하려고 했다가는 분명히 어마어마하게 불리한 쪽으로 소란이….

애초에 저 목에 걸고 있는 게 진짜일 확률도 절반이었다.

진퇴양난. 티모테 프로키온이 결국 참지 못하고 비명을 내지르며 제 머리만 마구 쥐어뜯었을 때였다.

쾅!

바깥에서부터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린 건 그때였다.

벌집을 들쑤신 듯 시끄러워져서, 파티의 주최자인 레슬리나 역시 황급히 나가 볼 수밖에 없는 큰 소란.

“무슨 일이죠? 본관에 무슨 일이 생겼나요?”

이곳에 초대된 귀부인과 레이디들도 실은 본관 쪽에 훨씬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그쪽으로 당장 하녀를 보낸 이들도 있었다.

덕택에 별관에는 상상도 못 한 소식들이 전해졌다.

“레, 레이디 레슬리나…!”

“군부에서 수색대를 방금 파견해 갔답니다!”

“수색대라뇨? 왜 갑자기 수색대를 꾸려 간 거죠?”

“프로키온 공과 르페브르 영애가 타고 계셨던 마차가 이블론 다리 아래로 추락해 찾을 수가 없답니다!”

‘추락?’

레슬리나의 얼굴에 핏기가 쭉 가셨다.

쨍그랑!

그녀가 비틀거리며 짚은 테이블 위, 와인 잔들이 우르르 깨지며 바닥을 굴렀다.

***

쿵. 쿵. 쿵. 딱딱한 표면을 두드리는 소리가 불규칙적으로 들려온다.

나는 어렴풋이 눈을 떴다. 머리가 핑 돌았다.

“아으….”

누군가 머리를 세게 때린 듯 고통스러웠다. 머리를 부여잡고 웅크린 것도 잠시, 마지막으로 보았던 얼굴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슐로이츠.

나는 서둘러 주변을 둘러보았다. 슐로이츠가 내 옆에 누워 있었다. 젖힌 머리. 목 뒤에 받쳐져 있는 돌돌 말린 수건…. 슐로이츠가 의식을 잃었으니 기도를 확보해 놓았다는 뜻이다.

허겁지겁 슐로이츠의 뺨을 붙잡았다. 대리석을 만진 듯 체온이라곤 느껴지지 않는다.

몸을 굽혀 가슴에 귀를 대어 보자 그의 심장은 아직 뛰고 있었다. 미약한 고동 소리에, 발밑은 그저 바닥으로 한없이 꺼지는 기분이었지만….

“라파엘….”

라파엘은 어디 있지? 여기는 어디지?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파 입술을 세게 깨물었을 때, 라파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블란데아 경!”

문제는 소리만 들리고 라파엘의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는 거였다.

“블란데아 경! 저 위층에 있습니다!”

나는 이마를 부여잡은 채 위를 올려다보았다. 사다리가 있고 위층과 이어지는 듯한 구멍이 있었다. 녹이 슨 덮개가 꽉 닫혀 있긴 했지만….

“경….”

“정신이 드십니까? 하, 정말 다행입니다. 저희 다리에서 굴러떨어졌습니다. 마침 근처에 은신처가 있었습니다.”

“은신처….”

그제야 이곳이 어디인지 알 수 있었다. 은신용 오두막. 괴수는 어두운 곳에서 출몰하니까, 숲과 가까운 외지일수록 이런 은신용 오두막을 설치해 두는 법이다.

높고 작으며 좁은 오두막.

“마차가 예전에 총사령관님이 직접 주문하신 특수 제작품이라 다행이죠. 아니었으면 전부 다 몸이 조각조각이 났을 겁….”

“슐츠가… 중독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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