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프로키온 영지-(11) (93/190)

장미꽃을 구획 가득 심는 건 사실… 나한테도 좀 모험이었다.

‘너무 달짝지근하게 보이잖아.’

난 사교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지만, 르페브르 저택이나 영지에 자리한 성의 정원은 매일 보며 자랐다.

어머니는 르페브르 정원을 아주 우아하고 장엄하게 꾸며 놓으셨다. 그리고 가끔 가서 본 휘하 가문들의 정원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규모만 다를 뿐이지.

햇볕이 울창한 녹음 사이로 비산하는 정경을 가장 아름답게 치는 왕국의 오래된 유행이자 전통을 따라, 잎사귀 하나하나는 작지만 싱그럽게 우거지는 수목을 선택해 심고, 계절이 달라져도 정원에 색깔을 분명히 두기 위해 개화 시기가 다른 꽃들을 골라 심고….

“블란아, 보렴. 요즘 젊은 사람들 사이에는 일부러 꽃만 한가득 심어 둔 구획을 만드는 양식이 유행한다는구나. 보통 사랑에 푹 빠진 신혼부부들이지.”

물론 어머니가 말씀하신 ‘요즘’도 근 20년은 된 이야기이지만 말이다. 무릇 달마다 분기마다 유행이 바뀌는 드레스나 비즈, 보석, 구두의 앞코 모양이나 보닛에 매달린 리본과 달리, 정원 양식이란 유행이 바뀌는 속도가 현저히 느려서.

슐로이츠가 정원의 양식 같은 걸 알지는 못하겠지만….

며칠 동안 눈을 감았다 뜨기만 하면 정원은 다른 모습이 되어 갔다. 상인들이 내게 스케치를 해서 보여 준 모습에 점점 가까워지는 게, 그렇게 구현이 되어 가는 과정이 꼭 마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돈과 권력이 만들어 낸 마법이란 이런 거겠지. 나는 문득 다른 생각도 들었다. 가문의 안주인이 바뀌면 정원도 손을 보는 게 보통인데, 이전의 정원은 누구의 손을 탔을까?

슐로이츠의 어머니?

아니면 선대 공의 후처?

묻지는 않았지만. 정원을 들이 엎다 보면 드는 생각이었고, 한편으로 다른 인물도 내 머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차림새는 참 고상한데 말이지.’

가끔 레이디 레슬리나를 만날 때마다 드는 생각이었다. 만났다기보다는 내 쪽에서 일방적으로 본 것이긴 하지만. 그녀는 볼 때마다 다른 귀족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우리 사이엔 넓은 정원이 있었기에 굳이 마주칠 일은 없었다. 나는 날 보며 가볍게 묵례를 한 후, 자기들끼리 서둘러 사라지는 귀족들을 보며 물었다.

“페니.”

“예. 아가씨.”

“프로키온 공의 침실에, 머리카락이 그렇게 많이 붙어 있었어?”

“처음 봤을 땐. 바퀴벌레들이 침실을. 점령한 줄. 알았습니다.”

“으응….”

징그러워라.

“타국에선 짝사랑하는 상대방에게, 머리카락 매듭을 주거나… 그의 방에 두면 짝사랑이 이루어진다는 미신이 있어.”

“다들 그렇게나. 붙입니까?”

“그건 아니지만.”

가주의 침실에 멋대로 그런 걸 수십 개나 넣어 두는 건 조금… 문제가 매우 많은 행위긴 했다. 하지만 당시 페니는 슐로이츠에게 아무런 보고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침실에 다닥다닥 붙은 머리카락들을 보고 충격을 받은 페니가, 뒤늦게 정신을 차린 후 보고를 위해 침실로 다시 잠입했지만…. 그땐 이미 침실이 깨끗해진 상태였다고 한다. 머리카락 매듭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페니가 정신을 차리는데 필요했던 시간은 고작 30분이었다고 했으니, 그 말인즉슨….

성 전체가 레이디 레슬리나의 완벽한 지배하에 있었다는 소리였다. 좋게 말하면 통솔, 노골적으로 말하면 감시.

어쨌든 증거가 없어진 데다가 레이디 레슬리나는 그녀의 말마따나 선대 프로키온의 부인과 아주 인연이 깊은 사이이니…. 사실상 성의 안주인 역할을 하고 있기도 했고.

레이디 레슬리나는 두둑한 연금과 농장, 번듯한 규모의 저택 세 채를 얻어 프로키온 성을 떠나게 되었다.

내가 내린 결정은 아니었고, 얼마 전 슐로이츠가 주관했던 그 지옥 같던 가신 회의에서 결정이 난 사항이라고 했다. 그에 따라 실권은 다 회수되었고.

슐로이츠는 언제나 일 처리에 머뭇거림이 없었다. 공적인 일만큼이나 사적인 일에서도 그랬다.

“레이디 레슬리나를 로글린 저택으로 보내신다니…. 너무 아쉬워요.”

“성의 안주인이 바뀌는 느낌이잖아.”

“그러게요. 그냥 성에 모셔 두어도 되지 않나요? 프로키온 성이 얼마나 넓은데. 별관만 해도 스무 채가 넘는걸요?”

“하지만 그건… 사교계 관례와 법도상 어려울 일이야.”

“어려워도 말이에요! 귀족들은 관용이란 단어를 좋아하시잖아요!”

“내가 듣기로는 레이디 레슬리나께서 그 영애에게 성의 내정을 알려 주려고 하셨는데 영애가 딱 잘라 거절했다고….”

“정말요?”

하녀들이 나누는 작은 얘기가 내 귓가를 파고들었다. 어딜 가든 고용인들이 나누는 얘기가 대체로 비슷했다.

‘혹시나 했는데.’

아는 게 적을수록 무서운 것도 적어지는 법이다. 또한 소작농에게는 먼 곳에 있을 국왕보다는 가까이 있는 영주가 하늘처럼 느껴지는 법이고.

르페브르라는 이름만 들어도 벌벌 떠는 귀족들과는 달리, 성에서만 지낸 사용인들은 ‘르페브르’라는 대귀족보다는 오랫동안 자신들을 다스려 온 레이디 레슬리나를 더 경외하고 있었다.

물론 레이디 레슬리나가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서서히 잡아 놓았겠지만.

‘내가 아니라 다른 영애가 안주인으로 들어오게 됐으면 문제가 많았겠는걸.’

그나마 나는 출신으로 찍어 누를 수나 있지.

그녀가 슐로이츠를 짝사랑하는 건 잘 알겠다. 그리고 차기 프로키온 부인의 자리를 원했다는 사실도 충분히 파악을 할 수 있었다.

나는 페니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이 정도면 됐어.”

페니는 나를 업고 아주 재빠르게 움직였다. 하녀들의 대화를 엿들을 수 있었던 작은 틈새 사이에서 빠져나오니 눈 깜빡할 새 멀쩡한 복도였다.

‘여기도 마법을 부리는 것 같네….’

나는 페니와 아무렇지 않게 복도를 걸으며 물었다.

“페니. 저런 길은 어떻게 알았어?”

“일전에 가주님께서. 제게 내리신 명령이. 성을 순찰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구나….”

보통 순찰을 하면서 저런 비밀 길을 알아내곤 하는구나….

“유사시를 대비해. 알아 놓았습니다.”

“덕분에 잘 쓰긴 했어.”

“별말씀을. 그리고 보통 소설을 보면. 이런 곳이. 유용하게 쓰이곤. 하잖습니까. 잘생겼지만 무뚝뚝한 남편을 피해. 비밀리에 빠져나가. 정부와 밀회를 가지는. 젊고 아름다운 귀부인…. 근데 사실 정부가 아니라. 그냥 주종 관계였던. 아름다운 기사였던 거죠. 하지만 그 사실을. 믿어 주지 않는 남편은. 질투에 눈이 돌아서 부인을 침대에 감금….”

페니한테 도대체 뭘 읽은 거냐고 물으려던 참이었다.

“아가씨.”

닉이 침실 문 앞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리 불러 놓았던 닉과 페니를 함께 침실로 데리고 들어간 후, 나는 속닥이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성 내부에서 일했던 사용인들은 다 갈아야겠어. 정원사나… 이런 이들은 둬도 괜찮고.”

“전부 다 말씀입니까?”

“응. 아, 한 명은 빼고. 그리고… 오랫동안 주인이 부재한 성에서 근로한 공로를 높게 사서, 고용인들의 퇴직금은 통상의 두 배를 지불할게. 그건 내가 낼 테니까 계산을 해서….”

“아닙니다. 아가씨. 쌓일 만큼 쌓인 성의 내정금을 사실 좀 소모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 또 가주님이 아시면 좋아하지 않으실 것 같습니다.”

“…그런가?”

“예. 확신합니다. 아가씨.”

하긴 전에도 슐로이츠는 내게 가구를 사라고 했다. 그제야 눈매가 조금 누그러지기도 했고. 내가 그의 돈을 쓰는 게 좋은 걸까?

그럼 알겠다고 말하자 닉이 다른 것을 물었다.

“아가씨. 추천장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추천장은 누구에게도 써 주지 마.”

“예. 알겠습니다.”

놀라서 한마디 되물을 법도 한데 닉은 그저 고개만 숙였다.

안주인이 바뀐다느니 레이디 레슬리나에게 별채를 내어 주라고 성에서 조용히 떠드는 사용인들에게 내줄 추천장은 없다.

풍족한 퇴직금만 해도 나는 충분히 도리를 다했고.

일부러 레이디 레슬리나가 로글린 저택으로 떠나게 되었다는 소식을 크게 알린 보람이 있었다.

‘내가 계속 성에 있으면 시간이 좀 넉넉할 텐데.’

이렇게 몰아치듯 정리해야 하는 이유에는 내가 몇 주 후 슐로이츠와 함께 군부령으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었다.

와중에 슐로이츠는 이상한 말을 했다.

“주방장이 새로 올 테니까 조금만 기다려.”

함께 저녁을 먹던 중이었다. 정확히는 내가 침대에 앉아 저녁을 먹고, 슐로이츠가 물끄러미 날 쳐다보던 때였다.

‘음식이 많이 별로인가? 확실히 군부에 비하면 너무 뒤떨어지긴 하지만….’

막상 슐로이츠는 음식 투정을 전혀 하지 않았다. 나는 그가 내온 음식을 남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니면 내가 너무 남겼나?’

그 말을 듣고 조금 더 성의껏 쟁반 위의 음식을 먹으려고 했지만…. 애초에 르페브르의 주방장들이 혼신을 다해 내오는 음식도 그리 많이는 먹지 못하던 나였다.

온종일 연무장을 뛰니까 온몸의 영양소가 고갈되어 허겁지겁 위에 집어넣느라 잘 먹는 것처럼 보인 거지….

그나마도 오파츠의 내상 때문에 산책 외의 신체 활동은 완전히 금지된 지가 벌써 한 달이 넘어가는 중이었고.

덕택에 오늘도 음식을 먹는 행위는 고역이었다. 나는 조금 더 먹으려고 노력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포크를 내려놓았다.

‘새로 온 주방장도 그저 그러면 어떡하지?’

너무 까다로운 대귀족 아가씨처럼 비추어질까 봐 조금 염려가 되었다.

***

“블란데아 아가씨!”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주방장 기준으로는 어리지만, 중년의 연령대에 들어선 지는 제법 오래인 남자가 정원을 가로질러 뛰어오고 있었다.

“헬디?”

나는 얼떨떨하게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가 정신을 차렸다.

헬디는 르페브르가의 막내 주방장이었다. 새로 온다던 주방장이 헬디였나? 르페브르에서 어떻게 온 걸까? 슐로이츠가 대체 얼마를 제시한 거지?

나는 활짝 웃으며 헬디에게 뛰어갔다.

“오랜만이야!”

“아이고, 우리 아가씨는 아직도 아이 같으시군요!”

헬디가 나를 번쩍 안아 들어 빙글빙글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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