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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프로키온 영지-(10) (92/190)

페니는 친절하게도 라파엘을 침실까지 데려와 침대에 던져 주었다. 라파엘은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웅얼거렸다.

“내가 그래도… 어? 지휘관인데. 총사령관님을 모시는 기사로서! 비리비리한 가신들처럼 푹 쓰러질 순 없잖아.”

“알겠으니. 좀. 조용히 하고. 자라.”

“어. 고맙다….”

손만 흔들어 보인 라파엘은 그대로 기절했다.

성은 그날 쥐 죽은 듯 조용했고, 라파엘이 배가 고파 정신을 차렸을 땐 하루가 꼬박 지나 있었다.

씻자마자 주방으로 간 라파엘은 음식을 잔뜩 배식받아 먹었다. 따뜻하지만 조직이 질긴 갈색 빵을 입 안에 밀어 넣고, 나름대로 기교를 부린다고 발사믹 소스와 물소 젖 치즈를 뒤섞어 놓은 샐러드까지 싹싹 비웠다.

“이런 저품질의 음식을 블란데아 경께 어떻게 먹여. 내가 다 먹어 치우는 수밖에….”

그렇게 변명하며 라파엘은 열심히 턱을 움직여 씹었다. 오가는 가신들이 없어 휑한 것과 반대로, 정원은 그 며칠 사이 완전히 들이 엎어진 상태였다.

라파엘의 예상보다도 더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역시 대귀족 가문의 영애라 그런가 일하는 방식이 아주 화끈했다.

뜨거운 차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던 라파엘은 몸단장을 끝내고 블란데아를 보러 갔다.

페니도 거기 있을 거고. 닉도 정원 공사 문제 때문에 거기 있을 거고.

아주 당연히도… 총사령관님께서도 계셨다. 블란데아 경의 치장하는 모습까지 지켜보는 건가?

블란데아는 커다란 거울 앞에 앉아 있었고, 슐로이츠는 거울과 조금 떨어진 곳에 놓인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은 채였다. 물론 시선은 블란데아에게 고정된 상태였고.

라파엘은 닉에게 슬쩍 다가가 말했다.

“블란데아 경의 침실에 장미꽃을 어마어마하게 갖다 둬 놨네요.”

“예. 회의에 참석하시는 동안, 상인들이 많이 드나들었습니다. 아가씨께 선물로 드리고 간 게 이만큼이고 나머지는 정원에 갖다 놓았습니다.”

“어쩐지 오는 내내 좋은 향기가 난다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여기 와서는 장미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그간은 의식하지 못했는데 생각해 보니 그랬다.

귀족 대부분은 장미를 좋아했다. 키우기도 쉬워서, 어느 성의 정원을 가든 여름 장미가 흐드러져 있곤 했는데.

“그나저나 여긴 꽃을 더 둘 곳도 없네요.”

라파엘은 새삼스럽게 장미꽃이 가득한 침실을 둘러보았다. 맨날 페니한테 얄짤없이 내쫓기느라 블란데아한테 겨우 용건만 전하기만 해서 마주할 기회가 없었다. 영애의 침실을 처음으로 제대로 둘러볼 기회였다.

지금 페니는 블란데아의 머리에 장미꽃을 엮어 땋느라 바빠 보이니 쫓겨날 염려도 없었다.

블란데아의 침실은, 성 이곳저곳을 이미 확인해 본 라파엘의 눈에도 독보적으로 아름다운 곳이었다.

다른 곳들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는 소리기도 했고, 또 다른 곳에는 누군가의 성의가 이만큼이나 담겨 있지 않다는 소리기도 했다.

라파엘은 싱긋 웃으면서 블란데아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블란데아의 침실엔 가구들이 있다 말았다. 그래서 화장대도 없었다. 대신 커다란 거울이 하나 있었는데, 옆에는 우아한 곡선의 협탁이 있었고, 그 위에 향긋한 장미꽃들이 한가득 놓여 있었다.

손질용 가위와 초록색 줄기. 풀 냄새가 풋풋한 잎사귀들은 협탁이며 카펫이 깔린 바닥 위에도 조금 떨어져 있고….

미처 블란데아의 머리에 꽂지 못한 장미꽃들은 수반에 띄워 두었다. 물방울이 맺힌 꽃봉오리들이 싱그럽다.

평생 한 번 만나는 것도 어려울 르페브르의 직계. 그래서인지 상인들은 특별히 향이 좋은 품종만 엄선해 선물한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자신의 상단의 이름을 기억해 준다면 그보다 더한 성공은 없으리라. 최상급의 장미는 향기마다 생기가 넘친다. 꽃이 만개한 끝없는 들판 위에 서 있는 기분마저 들었다.

이런 곳에 자리하게 된다면 누구든 기분이 좋아지고 들뜰 수밖에 없으리라.

라파엘은 닉과 작은 목소리로 사소한 잡담을 나누면서 두 눈으로는 페니의 손이 놀라운 속도로 움직이는 걸 지켜보았다. 자신의 여동생이지만 참 대단했다. 검만 빠르게 휘두르는 게 아닌 모양이었다.

머리 손질은 얼마 후 끝났다. 그제야 블란데아를 제대로 본 라파엘은 헉하면서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충격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꿀과 설탕과 초콜릿과 과일잼을 한 국자로 듬뿍 떠 입 안에 밀어 넣었을 때와 비슷한 충격.

“어우…. 블란데아 경 진짜 미인이시구나.”

“이제. 알았다니. 오빠는. 눈알이. 바닥에 있구나.”

어느새 다가온 페니가 여동생다운 어조로 여상하게 비난했다.

“아니, 물론 알고는 있었는데 새삼 뼈저리게 깨닫게 됐다 이거지.”

짙은 금발과 함께 땋아 놓은 장미꽃들이 아주 잘 어울렸다.

“솜씨 좋네, 페니. 그런데 어릴 때 내 머리카락을 땋는 척하면서 왜 쥐어뜯기만 했던 건지 오라버니가 물어봐도 될까?”

“아가씨. 머리를 그렇게. 쥐어뜯으면. 멸문. 이다.”

“우리 동생이 참 사려가 깊어.”

이런 말을 속닥이며 라파엘은 블란데아와 슐로이츠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슐츠.”

블란데아는 거울에 얼굴을 비추어 보며 입을 열고 있었다.

“장미를 싫어하세요? 아쉽게도 정원에 장미가… 없더라고요.”

‘블란데아 경…!’

그 머리카락에 장미꽃을 잔뜩 땋은 채로 저런 걸 물어보시면….

“싫어할 리가 없잖아.”

당연히 저런 답이 나오겠지.

“다행이네요. 싫어하시나 싶어서요.”

블란데아가 미소를 지을 때마다 슐로이츠의 시선이 술렁였다.

라파엘은 지금 만약 괴수가 나타난다면 슐로이츠도 분명 어디 하나는 끊어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블란데아에게 고정되어 있는 푸른색 눈동자…. 솔직히 숨은 제대로 쉬고 계시나 싶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얼간이 같으셨다. 자신의 상사가 르페브르 경에게 특별 취급을 하는 것은 알았지만, 갑작스러운 구혼장은 물론이고 저렇게까지 얼이 빠져 있다니. 라파엘은 진귀한 경험에 입을 떡 하니 벌렸다.

그나마 생각이 남에게 들키지 않는 영역에 속해 있다는 게 참 다행으로 느껴졌다.

‘청탁을 해 볼까.’

블란데아 경이 머리카락에 군부 징표를 장식해 주시면 안 되겠지. 그럼 군부로 더 일찍 돌아갈 마음이 생길 수도 있으실 것 같은데..

아니면 성검 미니어처나. 혹은 괴수 모양의 인형이나….

안 될 거야.

슐로이츠와 몇 마디 더 대화를 한 블란데아는 웃으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의 손짓을 받은 닉이 한걸음에 다가갔다.

“예, 아가씨.”

“닉. 정원에 있는 상인들을 불러서…. 정원에 장미 구획을 만들겠다고, 전해 줘.”

“예. 아가씨. 그리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닉이 빙긋 웃더니 물었다.

“아가씨. 남은 이 장미꽃들은 어떡할까요? 침실에 새로 장식할까요? 그러려면 있는 꽃들을 좀 치우긴 해야 합니다만….”

“괜찮아. 선물하려고 했어.”

“아. 좋은 생각입니다. 아가씨. 장미꽃은 사랑과 감사를 뜻하기도 하지요. 초여름에 그보다 낭만적인 선물이 또 있겠습니까.”

끼고 있던 흰 장갑을 벗은 닉이 아직 줄기가 멀쩡한 장미꽃들만 그러모아 금세 다발로 만들어주었다.

블란데아는 장미꽃을 품에 가득 안아 든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가 슐로이츠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라파엘이 ‘좋아, 좋아.’ 하고 흐뭇하게 웃던 찰나.

“슐츠.”

블란데아가 품에서 아주 익숙한 보석 두 개를 꺼내 내밀었다.

“오파츠는 이게 마지막이라서…. 저택이나 군부에 편지를 보내야, 할 것 같아요.”

“…오파츠?”

“네. 어제 다 썼다고, 하셨잖아요. 혹시나 싶어서 찾아보니까, 두 개가 남아… 있더라고요.”

슐로이츠의 손에 직접 오파츠를 쥐여 준다. 슐로이츠의 두 눈이 블란데아가 안고 있는 장미 다발에 아주 잠시 머물렀지만 찰나였다.

그녀는 슐로이츠를 지나쳐 라파엘 쪽으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순간 라파엘은 뇌가 정지되었다.

‘아니, 잠깐만.’

설마 저 꽃다발을 내게 주시려는 건가?

총사령관님 앞에서?

혹시 내가 블란데아 경에게 무언가를 잘못했던가? 심기를 거스르는 짓을 했었나?

창문으로 뛰어내릴까?!

라파엘이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친 그때. 싱그러운 향을 풍기는 장미 꽃다발은 페니에게 안겨졌다.

“아가씨. 이걸 왜. 제게 주시는지.”

“그날 도와줘서 고마워.”

페니가 드물게 눈을 깜빡이며 장미꽃과 블란데아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페니의 뺨이 괴이쩍게도 살짝 붉어졌다. 그녀가 큼큼 목을 가다듬고 말했다.

“아가씨를. 돕는 건. 제 사명. 입니다.”

“내 시중들어 준 것도… 고맙고.”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라파엘이 슬쩍 시선을 돌려 슐로이츠를 흘긋댔다.

페니의 손에는 다채로운 색깔의 장미가. 슐로이츠의 손에는 다채로운 빛을 뿜는 오파츠가 도르륵….

오전의 햇빛은 눈부시게 쏟아졌다.

하필 또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채광이 오파츠의 표면을 두드려 반짝, 하고 영롱한 빛을 자아내게 했다.

슐로이츠는 다시 의자 팔걸이 위에 엉덩이를 걸쳐 앉은 상태였다. 야생 짐승처럼 길게 뻗은 다리. 그는 방금 받은 오파츠를 시야 앞까지 들어 올려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턱은 조금만 각도가 넘어가면 삐딱하게도 보일 것 같았다.

페니의 귓가에 장미꽃을 꽂아 주는 블란데아의 흰 손이 저렇게 다정할 수가 없다.

“아가씨. 저도. 꽂아도. 됩니까?”

“그럼. 머리에 많이 장식할수록… 좋아할걸. 상인들이?”

닉은 이 상황이 재미있는지, 저 점잖은 사람이 숨을 죽이고 웃음을 참고 있었다.

라파엘은 아무것도 모르는 척 시선을 피했다.

침실 정리를 해야겠다고 눈치 없는 놈처럼 중얼거리며 가위와 수반, 남은 장미꽃들을 챙겨 든다.

‘블란데아 경…. 들었다 놨다 잘하시잖아?’

생각이 남들에겐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 정말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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