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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7. 프로키온 영지-(6) (88/190)

“블란데아.”

“…네.”

“넌 항상 말은 그렇게 하지.”

진심이라고, 조심스럽게 항변하려고 했으나 말을 이을 수는 없었다. 그가 내 뺨을 감싸 잡더니 고개를 숙여 입을 맞춰 왔기 때문이었다.

예민한 부위를 뒤섞어 대니 멋대로 따라붙는 열기. 슐로이츠의 입맞춤은 언제나 눈 깜빡할 새 격정적으로 변하곤 했다. 슐로이츠가 혀를 쓸어 올릴 때마다 그의 어깨를 붙잡은 두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날 밤.

슐로이츠는 내게 약을 먹였다. 며칠 내내 그랬듯이.

“약이 좀 약해졌다고… 들었는데. 진짜 다리에… 힘이 안 풀려요.”

턱을 괴고 나를 쳐다보고 있던 슐로이츠가 물었다.

“잠도 좀 덜 오나?”

“안 와요.”

그렇게 말해 놓고 아주 깊게 잠들었다 정신을 차렸다.

‘…괜히 자신 있게 말했다.’

잠은 잘 수록 끝없이 늘어난다더니, 그간 너무 많이 자긴 했던 모양이다.

창피함과 더불어 잠기운도 여전했다. 나는 졸린 눈을 깜빡였다. 맑지 않은 시야로 슐로이츠가 걸어 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커튼 틈으로 미약하게 들어오는 여명 같은 새벽빛.

슐로이츠가 침실을 나가고, 나는 힘이 잘 들어가지 않는 팔을 움직여 옆자리를 더듬어 보았다.

시트가 따뜻했다. 누군가 오래 머물다 간 체온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슐로이츠가 이제까지 내 옆에서 자다가 간 건가?

물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나는 다시 잠에 빠졌다.

“제 방에서, 아니…. 제게 빌려주신 방에서….”

“네 방 맞아.”

“제 방에서… 주무시고 가세요?”

“그걸 이제 알았다고?”

점심 즈음에 다시 나를 찾아온 슐로이츠가 내 질문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하긴 어제도 눈 몇 번 깜빡이다가 기절해 버리더군.”

“…그게.”

“잠 안 온다면서 곧장 잠들어 버리던데. 블란데아.”

괜히 물었다. 뺨이 또 빨개졌다. 시선을 피하자 슐로이츠가 낮게 웃는 소리가 귓가로 스며들었다.

다음 날.

약이 확실히 약해졌는지, 나는 정말 오랜만에 일찍 눈을 뜰 수 있었다.

그리고 심장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슐로이츠가 나를 껴안은 채 잠들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속 이랬던 건가?’

나만 약 기운에 취해서 몰랐던 거고?

어안이 벙벙했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넓고 탄탄한 가슴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가 옷을 벗고 자는 버릇이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다.

꿈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다가 눈을 떴는데 잠든 슐로이츠가 내 앞에 있다는 사실이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슐로이츠는 내가 또 어디로 멋대로 도망이라도 칠까 봐 껴안고 자는 거겠지만, 그래도….

그래도 괜히 기분이.

나는 팔을 움직여 슐로이츠의 허리를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혹시 무슨 일이 있진 않았겠지?’

아침에 일어나 목욕을 할 때마다 특별히 몸에 이상은 없었다. 어디 쓰리거나 부어 있는 곳도 없었고.

그리고 슐로이츠가 굳이 잠든 나를 어떻게 할 것 같진 않았다.

내가 쳐다보지 않으면 화가 난다고 했으니까.

나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뺨이 조금 붉어져서 다시 잠에 빠졌다.

어차피 자고 일어나면 늘 그랬듯이 슐로이츠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슐로이츠는 여전히 내 앞에 누워 있었다.

그가 너무 세게 껴안고 있어서 움직이기도 힘들었다. 나는 몸을 비틀어 빠져나오려다가 그냥 포기했다. 숨은 쉬어지니까….

천천히 잠에 빠지는데 슐로이츠가 내 머리를 깊숙이 감싸 안는 게 느껴졌다. 그가 내 머리카락에 입술을 파묻었다.

“…블란데아.”

혼잣말 같은 중얼거림에 가슴이 빠듯하게 내려앉았다. 더듬으면 어떤 윤곽이 잡힐 것 같은… 낮은 속삭임.

그가 깨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아무 말도 하고 싶지 않았다. 놓아 달라든지, 숨이 막힌다든지.

그저 이대로 있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

“블란데아 경. 2주 만에 밖에 나와서 걸으니까 기분이 어떠십니까?”

“내가 잘 걷는 건가… 의심이 들어.”

라파엘이 내 주변을 한 바퀴 빙글 걸어 보며 살피고는 말했다.

“여전히 르페브르답게 걸으십니다.”

“다행이네.”

나는 빙긋 웃었다.

슐로이츠의 눈에는 내가 테라스 난간도 똑바로 못 잡아 떨어질 천치 또는 희대의 병자처럼 보이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이제야 침실에서 나올 수 있었다.

다행인 일이었다. 약이 약해져서 전처럼 하루 스무 시간을 자는 것도 아니었고, 계속 침실에서 깨어만 있어야 했다면 정말 심심했을 텐데.

나온 김에 성 내부도 하나하나 둘러볼까 했는데 시간이 조금 부족할 것 같았다. 대신 본래 목적대로 정원을 살펴보고 있었다.

‘사람이 엄청 많네.’

하기야 몇 년이나 내려오지 않던 가주가 영지로 왔으니, 내가 가신이어도 할 말이 많아서 뛰어오겠다.

슐로이츠는 저렇게 바쁜데, 내 침실엔 어떻게 하루에 열 번도 넘게 찾아오는지 모를 일이었다.

드나드는 사람 중에는 가신들만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이게 말이 되나요?!”

사랑스러운 산호색 드레스를 차려입은 한 레이디가 화가 난 듯 소리를 치고 있었다.

‘가신은 아닌 듯한데.’

나는 성의 내부 정원, 그러니까 가신들이나 외부인들이 출입 허락을 받지 못한 곳에 있었다.

그녀는 가신들에게 화를 내다가 문득 내 시선을 눈치챈 듯 내 쪽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커지는 눈동자.

느낌이 왔다. 저렇게 날 쳐다보는 귀족은 필시 내게 할 말이 있는 것이다.

라파엘도 보았는지 물었다.

“집사님. 저 영애는 누굽니까?”

닉이 잠깐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가주님께서 오랫동안 결혼이나 약혼에 흥미를 보이지 않으셔서, 가신들이 몇몇 레이디를 가주님의 정혼자로 물망에 올렸는데… 그 레이디들 중 한 명입니다. 미네 데릭스 영애시지요.”

‘아하.’

“아가씨.”

페니가 물었다.

“가서. 뺨 한 대. 치실 겁니까?”

“뺨을? …아니?”

“필요하면. 말씀하십시오.”

“……?”

라파엘이 창피한 듯 내 귓가에 소곤거렸다.

“죄송합니다. 블란데아 경. 제 여동생이 옛날부터 폭력적인 로맨스 소설만 골라 탐독해서 성격이 좀 저렇습니다….”

폭력적인 로맨스 소설?

나는 웃음을 흘렸다. 나중에 한 번 칠 일이 생기면 페니를 불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슐로이츠는 내가 멀리 가는 걸 좋아하지 않았으니 나도 내부 정원이나 빙글빙글 돌 생각이었으니까.

그러니 굳이 만날 일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다음 날.

나는 놀랍게도 그녀와 바로 마주쳤다. 정확히는 본관 정원에서 닉에게 울분을 토해 내고 있는 그녀의 아버지와.

“도대체 프로키온 공께서 왜 갑자기 약혼에 대한 얘기를 전부 백지로 되돌리셨단 말이오? 그 자리는 내 여식의 것이나 마찬가지였단 말이오!”

닉이 차분하게 응대했다.

“데릭스 공. 그런 얘기라면 제가 아니라 가주님께 드리는 게 맞습니다.”

“프로키온 공께서 만나 주지 않으시니 이러는 것 아니오! 그리고, 내 딸에게 듣기로는 본관 정원에 웬 듣도 보도 못한 영애가 있다던데! 그 영애는 누구요? 그 영애 때문에 내 딸의 약혼이 물 건너간 것이오?!”

‘아. 나를 모를 수도 있겠구나.’

프로키온 성은 넓었고, 나는 페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첫날부터 납치당한 듯 안겨 와 내실 가장 안쪽에 갇혔으니까.

그때, 불만에 찬 표정으로 닉을 노려보고 있던 레이디가 나를 알아보더니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순식간이었다.

“안녕하세요, 영애? 저는 미네 데릭스입니다. 실례지만, 어디서 온 누구신가요?”

***

“세상에. 저것 좀 보세요. 프로키온 공께서 계시는 성에서 저렇게 안하무인으로 소리를 지르는 꼴이라뇨.”

요안나 영애가 화가 난 듯 눈썹을 올렸다.

요안나 영애의 옆에 있던 레이디도 표정이 좋지 못했다.

“가서 말려야겠네요.”

“하지만… 그냥 내버려 두시는 게 어떨까요?”

요안나 영애가 남들 귀에 들리지 않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분, 르페브르 영애시라면서요?”

“맞아요.”

“사실 프로키온 공께서 너무하셨어요. 아무리 르페브르의 직계라지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성까지 데려오셔서…. 이건 관례에 맞지 않잖아요. 레이디 레슬리나.”

레이디 레슬리나가 곤란한 표정을 지으며 웃었다.

“관례는 프로키온 공께서 정하시는 거죠. 제가 뭐라고 불평을 하겠어요.”

“레이디 레슬리나….”

요안나 영애가 안타까운 듯한 목소리를 흘렸다. 레이디 레슬리나는 내내 온화한 표정이었다.

“게다가 곤경을 당하는 손님을 보고도 어떻게 못 본 척하겠어요? 르페브르의 직계라면 더 잘 대접해 드려야죠. 그래야 프로키온에 좋은 인상을 받으시지 않겠어요?”

“세상에, 레이디 레슬리나…. 너무 마음씨가 고우세요.”

“그런 말 말아요. 전부 프로키온 공을 위해서 마땅히 해야 하는 일인데요.”

“이렇게 프로키온 공을 사려 깊게 위하시는 건 레이디 레슬리나인데…. 야속하셔라.”

레이디 레슬리나는 힘없이 웃고는 블란데아 르페브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미네 데릭스. 영애.”

씨근덕대는 미네 데릭스 영애 앞에, 갑자기 커다란 그늘이 졌다.

“이분은. 왕도에서 오신.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십니다.”

정원을 걷는 내내 나와 함께 걷던 페니였다.

“네? 어… 디…?”

“르페브르.”

“르, 르페….”

미네 데릭스는 얼굴이 흙빛이 되어 주춤 물러섰다.

나는 항상 내 신분을 잘 아는 이들과 지냈던 탓에, 이런 반응을 보이는 귀족은 처음이었다.

“미네! 왜 그러느냐!”

그사이 마찬가지로 뛰어온 데릭스 공이 내게 눈을 부라렸다.

“아, 영애가 그 영애입니까? 대체 이 얼마나 경우가 없는 짓입니까, 예? 굴러 들어온 돌이 박힌 돌을 빼는 격이잖습니까…!”

“아, 아버지…!”

미네 데릭스 영애가 허겁지겁 데릭스 공의 팔을 붙잡았다.

“르, 르페, 르페, 르페브르르….”

“뭐?”

“르, 르페브르 영애시래요…!”

“……?!”

데릭스 공의 얼굴이 한 박자 늦게 굳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홱 쳐다보았다.

눈 깜짝할 새 데릭스 공의 안색이 푸르죽죽하게 변했다. 옆에 있는 영애는 아예 숨까지 멈춘 것 같았고.

내가 국왕도 아니고,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고 죄가 생기는 건 아니었다. 물론 내게 삿대질을 좀 하긴 했지만….

지금 당장 저들에게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여길 어떻게 들어온 거지?’

그때, 우아한 목소리가 공기를 가르듯 울려 퍼졌다.

“이게 무슨 소란이지요?”

시선을 옮기자, 두 명의 레이디가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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