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프로키온 영지-(5) (87/190)

“여기도 텅 비어서 볼 게 없어.”

“아니에요. 전부… 아주 구하기 힘든 가구들인데…. 제 방에 있는 거랑… 같은 장인의 작품이라 알아요.”

“그건 듣던 중 반가운 말이군. 내일 집사를 불러다 줄 테니 사고 싶은 건 그에게 얘기해 놔.”

“제가 보기엔… 딱히 모자란 게….”

“사.”

“알겠어요.”

그제야 슐로이츠는 미미한 만족감이 들었다. 그녀의 손등을 만지는 손길이 조금 더 부드러워졌다. 블란데아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저를.”

“너를?”

“죽이려고 할… 생각이었다고 했잖아요.”

“그래. 지금도 죽이고 싶어.”

“…그렇군요.”

“그런 건 왜 물어.”

“그냥요.”

“대답해. 얼버무리지 말고.”

“절 죽일 거라고… 하셨잖아요.”

“아.”

슐로이츠가 픽 웃었다.

“네가 생각해도 이상하나? 죽이겠다고 떠들어 놓고 골 빈 구혼자처럼 성을 관리시켜 둔 게.”

“그렇게까지는 생각… 안 했어요.”

“그러면?”

“말씀하신 대로… 그냥 조금 의아하다고… 생각했을 뿐인….”

“그게 다라고?”

“네.”

“그게 궁금하다고?”

“…네.”

“내가 그날로부터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한 등신 새끼라서 그래.”

블란데아의 눈동자가 순간 멎는 걸 보면서 슐로이츠는 뒤틀린 듯한 쾌감과 그보다 더 가라앉은 막막하고 묵직한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너한테 버려진 게 전부였는데 무슨 짓을 해도 벗어날 수가 없어.”

한편으로 그녀에게 하는 말에 거짓은 없었다. 단 한 줌도.

프로키온 가주가 되고 왕국의 총사령관이 되었음에도, 그는 아직도 그때의 초라하고 보잘것없던 소년일 뿐이었다.

자신을 찾아와 구해 주고, 손을 잡고 이름을 불러 주던 소녀에게 멍청하게 속아 넘어가 마음까지 죄다 빼앗겼던.

심지어 그녀가 끝끝내 변명 한마디 하지 않는다고 해도.

블란데아는 속눈썹이 떨렸지만 그뿐이다. 또 죄송하다느니 뭐니 그딴 의미 없는 사과를 반복해 자신을 화나게 하지 않았다.

그녀는 예전부터 참 열심히 제 눈치를 살폈고, 덕분에 그 짧은 사이 그냥 입을 다물고 있는 게 자신의 분노를 가라앉히는 데 좋다는 사실을 깨달은 모양이다.

참 입맛 잘 맞춰 주는 공주님이시지. 빌어 처먹게도.

슐로이츠는 블란데아에게 고개를 숙였다. 지난 며칠간 수없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멋대로 또 입을 맞췄다.

등 뒤에 제대로 된 지지대가 없는 블란데아는 자꾸만 밀려나다가 결국 제 어깨를 붙잡았다. 입을 맞추다가 기꺼이 목을 껴안아 주는 상냥한 연인과 다를 바가 없었다.

슐로이츠는 블란데아의 등을 감싸고 허리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틈도 없이 그녀의 몸을 제게 완전히 붙였다. 미약하게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는 차라리 그를 죽여 버리려고 흘리는 것 같았다.

이토록 너절한 갈증이 또 있을까.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그녀를 씹어 삼키고 싶었다. 내게 왜 그랬는지 기어이 설명을 할 수 없다면. 해 줄 마음이 없다면.

고귀한 영애의 한갓 장난질로 그저 어렸던 나를 가지고 논 거라면 이제는 네가 내 것이 되라고.

내 품 안에 평생 갇혀 있으라고. 내 성에서 나만 기다리고 있으라고. 그 두 눈으로 감히 다른 걸 볼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맞닿아 있는 몸 너머로 블란데아의 심장이 정신없이 고동치는 게 느껴졌다.

왜 침대 위에서 상대를 원할 때 옷을 전부 벗어 버리는지, 슐로이츠는 최근에야 제대로 실감을 하곤 했다.

그는 제 몸에 닿을 블란데아의 살갗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그 얇은 천 조각 몇 겹이 거슬려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옷을 벗는 건 싫다고 했지.

옷을 찢으면 경멸스러운 표정을 짓거나 울음을 터뜨릴 테고.

힘이 빠진 블란데아의 팔이 맥없이 흘러내리기 시작하고서야 슐로이츠는 겨우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름 불러 봐.”

“슐츠….”

“…그래.”

그녀는 가쁘게 숨이라도 몰아쉬지 자신은 숨을 쉬는 방법도 잊어버린 머저리가 된 기분이었다.

열기가 피어오른 블란데아의 붉은 눈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니, 역시나 자꾸 목이 말랐다. 하기야 뭘 해도 채워지지 않던 갈증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그는 그녀를 안아 든 채 카펫 위에서 일어났다.

약을 먹인 후, 슐로이츠는 블란데아를 침대 위로 돌려놓을까 하다가 마음이 바뀌어 그냥 껴안은 채 창가로 걸어갔다.

커다란 유리가 달린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자 봄날 특유의 부드러운 밤바람이 불어왔다.

긴 황금색 머리카락이 날려 슐로이츠의 뺨에 닿아 왔다. 그는 그녀의 머리카락을 그러모아 목 뒤로 넘겨 주었다.

테라스 아래로 보이는 정원은 적당히 조경되어 있었다. 아주 적당히.

레이디 레슬리나든 티모테 프로키온이든 그들의 권한으로 쓸 수 있는 내정금에 한계가 있었으니 그럭저럭 볼 만하게 구색만 겨우 갖춰 둔 것 같았다.

“정원도 밝게 해 두는 게 좋나?”

“…밝아야 예쁘잖아요.”

“어두운 게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고?”

“별로… 그렇게 무섭지 않아요.”

블란데아는 약이 끌고 온 독한 잠기운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평소와 달리 대답이 조금 새침하게도 들렸다.

“…먼저 자도 되나요?”

“자. 약도 먹었잖아.”

블란데아가 고개를 약간 끄덕였다.

“잘 자요.”

그녀는 슐로이츠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천천히 잠에 빠졌다.

정원을 틈틈이 밝히던 조명들은 그나마도 현관 쪽을 제외하곤 꺼 버리고 있었다. 금세 어둑어둑해졌다.

테라스에서 돌아 나온 슐로이츠는 블란데아를 침대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침대에 올라가 그녀를 품으로 끌어안았다. 계속 그랬던 것처럼.

싫어지면 일어나서 화라도 내겠지. 때리든가.

슐로이츠는 냉소적으로 생각하면서도 블란데아의 몸을 껴안은 팔에서 힘을 풀지 못했다.

그녀의 침실은 한밤중에도 어둡지 않게 수정등을 갖다 놓았지만, 수면에 방해가 될 정도는 아니었다.

눈을 감으면 어두웠고, 이렇게 보이는 게 없이 어두울 때는 과거의 한때가 생각이 났다. 지금은 그녀의 몸이라도 품에 껴안고 있을 수라도 있으니 그때보단.

비교할 수 없게 낫다.

***

“안녕하십니까. 아가씨. 이렇게 뵙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저는 프로키온가의 집사입니다. 닉이라고 편히 불러 주십시오.”

“반가워, 닉.”

그는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점잖은 집사였다. 사실 작중에서도 프로키온 영지에 대한 얘기는 거의 나오지 않아서 나는 조금쯤 신기한 기분으로 닉을 응시했다.

수많은 카탈로그 중 샤를 크레상의 것들을 고르자 닉이 물었다.

“샤를 크레상의 작품을 좋아하십니까?”

“응. 내 방에 있는… 가구들도 다 샤를 크레상의… 물건들이야.”

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입니다. 사실 저 방을 준비하면서 가주님께서 그저 가장 좋은 걸로만 채워 놓으라고 하셔서…. 얼마나 고심을 했는지 모릅니다.”

“그대가 고른 거야?”

“부끄럽게도 저 혼자 결정하기에는 예산이 너무 컸습니다.”

하기야 이 방을 채우고 있는 것들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그래서 샤를 크레상의 가구를 포함해 여러 제품의 견적들을 내서 가주님께 들고 갔습니다. 가주님이 가장 가격이 나가는 것들로만 결정하셨고요.”

샤를 크레상의 가구라 고른 게 아니라 제일 비싼 걸 선택했다는 소리구나.

나는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일전에 가주님께 그리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도대체 어느 레이디가 쓰실 방인진 모르지만, 샤를 크레상의 가구로 채워 넣으면 설령 취향에 맞지 않아도 솔직하게 말하진 못할 거라고요.”

“그래?”

“예. 그래서 이렇게 방이 채워지다 말았지요.”

나는 웃음을 흘렸다.

“현명했네. 가주를 말리는… 방법을 잘 알고 있어.”

“감사합니다. 아가씨. 참, 가주님께서 정원을 아가씨가 원하는 대로 손보라고 하셨는데 특별히 원하는 양식이 있으십니까?”

“특별히 생각해 둔 건… 없는데….”

그냥 적당히 더 밝게만 하면 될 텐데, 하고 속으로 읊조리며 닉과 테라스에 나간 나는 고심하다 결정했다.

“다 뜯어고쳐야겠어.”

상대의 신분을 들으면 사람들이 으레 기대하는 것들이 있다. 르페브르의 직계가 한 가문의 정원을 손보겠다는데 적당히 보수하면 실망할 수도 있었다.

보통의 귀족이라면 어중간히 괜찮은 결과를 내놓아도 그러려니 하겠지만, ‘르페브르의 안목이라더니 글쎄, 기대만큼은….’ 하는 말을 듣기도 쉽다는 소리였다.

닉이 인부와 상인들을 수배해 놓겠다는 말을 했고, 나는 종일 테라스에 머물며 정원을 둘러보았다.

대대로 명문가인 데다가, 최연소 총사령관을 배출한 가문답게 프로키온 역시 성이 무척 넓었다. 너무 넓어서 정원이 한눈에 다 보이지 않았다.

하기야, 이 침실에만 쭉 머물면서 정원이 다 보이길 바라는 것도 과욕이긴 하지.

대충 머리로 구상을 해 놔야 정원을 새로 시공하는 시간이 단축될 텐데. 난간을 붙잡고 앞으로 몸을 쭉 빼는데 갑자기 홱 허리가 붙잡혔다.

“미쳤나?”

거칠게 파고드는 목소리. 나는 눈 깜짝할 새 돌려 세워져 슐로이츠를 똑바로 쳐다보게 되었다. 그의 눈빛이 타오르는 분노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어쩐지 얌전히 있는다 싶었지. 테라스에서 뛰어내려서 도망이라도 칠 계획이었나?”

“아뇨, 아니에요.”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니라… 정원을 둘러보고 있었어요!”

“정원은 왜.”

정원을 뜯어고치기 위해 살펴보고 있었다는 말을 했지만 슐로이츠의 표정은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더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나마 그게 다행이었다. 나는 그가 화를 낼 때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하면 더 화를 북돋을 것 같아서 아무 말도 못 하고 쩔쩔맸다.

‘그러고 보니 처음 여기서 눈 떴을 때도….’

슐로이츠는 나더러 어디로 도망가려고 한 거냐고 물었었지.

그는 내가 또 어릴 때처럼 멋대로 사라질까 봐 화가 나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나는 어디로 도망갈 생각이 없었다. 이번에 도망가면 진짜로 그 자리에서 죽을 것 같았고, 또 그런 문제와는 별개로….

“이젠 아무 데도… 안 가요, 슐츠.”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르페브르가에 구혼장도… 보내셨잖아요. 제 말을, 물론 믿진… 않으시겠지만….”

그는 내가 하는 말을 전부 기만으로 듣는 걸 알지만.

슐로이츠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하지만 나를 내려다보는 슐로이츠의 눈동자는 평소와 달리 깊게 잠겨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