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도 다치지 마.”
작중에선 저 말이 정말 그야말로… 데드 플래그 그 자체였다.
초중반에야 검파자들의 인사로 통용되는 말이었지, 후반에는 저 말만 내뱉었다 하면 다 죽어서 시체도 돌아오지 않았으니까.
물론 아직 괴수들이 들끓는 시기가 오지 않기도 했지만, 오파츠가 보급되고 난 후라 그런가. 좀 더 두려움의 무게가 걷힌 느낌이었다.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납골당 안으로 들어섰다.
특유의 스산한 냉기가 감돌았다.
나는 회중시계를 확인했다.
시계를 보고 있다가 준비된 시간이 되면 그때부터 성물의 태엽을 돌리면 된다. 괴수들을 현혹하는 성물.
그때가 되면 다른 쪽에서 괴수를 해치운 기사들도 합류할 것이다.
사실상 위험한 건 가장 먼저 현혹 성물의 태엽을 돌리는 이들이었다. 납골당은 아주 후순위였으니, 나는 안전한 후방에 배치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등 뒤에서부터 인기척이 들린 건 그때였다.
“이제 왔….”
오늘 나와 같은 구획을 맡게 된 기사들의 이름을 부르려다가….
“성실히도 일찍 오는 건 습성인가 보군.”
슐로이츠를 보고 굳었다.
왜 그가 여기로 들어오는 거지?
아연한 기분으로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는 기사들을 응시했다. 기사들은 납골당에 여섯 개나 되는 현혹 성물을 배치해 놓고, 꾸벅 인사를 한 후 물러났다.
심지어 한 개는 계단 아래 지하 문 바로 앞에 두기까지….
나는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1분이나 조용히 기다렸는데 다시 들어오는 기사가 없었다. 싸한 직감이 들었다.
“슐로이츠 경.”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계획이 바뀌었나요?”
“그래. 직전에 바꿨지. 경 말고도 모르는 이가 태반일 거고.”
“그럼 본래 저와 함께하기로 한 분대는….”
“17구획으로 재배치했어.”
“저도 그곳으로 이동하겠습니다.”
“아니. 경은 여기에 있어. 나와 함께.”
“…다른 기사들은 오지 않나요?”
“둘이면 충분해.”
“하지만 이 납골당은 성채의 입구와 너무 먼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입구는 하나 더 뚫으면 그만이고, 괴수를 빠르게 처리하기엔 사방이 막혀 있는 좁은 곳이 나아.”
“너무… 무리하시는 것 아닌가요?”
“총사령관이란 놈이 여기까지 왔는데 적어도 사망자는 없어야 타산이 맞지.”
“…….”
“질문 다 했나?”
“네. …감사합니다.”
대답하면서도 도통 정신을 차리기가 어려웠다.
너무 많은 현혹 성물들. 얼마나 많은 괴수들이 이 납골당으로 뛰어 들어올까? 또 얼마나 많은 괴수들이 지하 계단의 문으로 돌진할까.
괴수들은 언제나 예측 불가였다. 닫힌 철문이 열린다면….
내가 10분 전, 슐로이츠에게 ‘슐츠’라는 말을 듣지 않았다면 그저 최선을 다해 납골당을 지키느라 여념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는 나를 의심하고 있었다. 그저 그런 의심이 아니라, 확신에 아주 가까운.
왜?
짐작 가는 거라고는 그저 숙부 놈이 내 초상화를 구해 왔다는 점인데. 고작 그 사실 하나로, 이렇게까지 확신을 할 수 있는 걸까?
나는 내 모든 생각이 과한 추측이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발버둥 치듯 미약한 희망에 매달렸다.
“블란데아.”
“네?”
“내게 할 말 없나?”
“…….”
나는 잠시 슐로이츠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게 듣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원하면 무슨 말이든 해 주려고?”
“제가 할 수 있는 말이면 기꺼이요.”
“경은 내게 참 너그러워.”
슐로이츠는 몸을 굽혀 성물의 태엽을 돌렸다. 다섯 개가 차례로 태엽 감기는 소리를 냈다.
“끝까지 그래 주길 바라지.”
“…네. 슐로이츠 경.”
어떤 확신이 들었다.
나는 이 전투가 끝나는 대로 어떤 식으로든 그에게 모든 것을 실토해야 할 거라는.
진실이든 기만이든.
전자는 죽을 거고, 후자도 죽을 것 같았다.
나는 계단을 내려가 얼어붙은 손으로 천천히 성물의 태엽을 돌렸다. 그리고 숨을 내쉰 후 다시 위로 올라갔다.
한순간 등골이 섬뜩했다.
거대한 얼굴‘들’이 입구로 빠르게 기어들어 오며 히죽 웃고 있었다.
숨을 들이켰다. 쥐고 있던 성검을 휘두르는 것보다 내 앞에서 날아가는 성검들이 더 빨랐다.
수백 개의 성검이 말도 못 할 위력으로 괴수들을 절단했다. 동시에 강렬하게 풍기는 피 냄새. 한동안 요새 위에서는 비가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오파츠를 끝도 없이 사용할 수 있는 슐로이츠는 규격 외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강했다. 수많은 괴수들이 숨이 끊어져 바닥에 뒹굴었다.
죽지 않은 몇 마리의 괴수 중 나 역시 한 마리는 힘겹게 없앨 수 있었다.
그렇게 두 마리쯤을 간신히 쳐 냈을 때 알 수 있었다.
슐로이츠는 지하로 내려갈 괴수의 숫자까지 조절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의 말도 안 되는 힘이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고, 나를 두렵게 만들었으며, 그 둘을 합친 것보다 조금 더 많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깨진 오파츠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건축물의 구조상 창문은 없었고, 성물에서 나오는 강한 향은 코를 찔렀다.
누군가 나를 방 안에 가두고 아주 독한 향기를 오랫동안 맡게 하고 있는 기분이었다.
머리가 조금씩 몽롱해졌다.
쾅!
귀를 찢는 듯한 굉음과 함께 무언가가 무너져 내리는 소리가 들린 건 그즈음이었다.
석벽이 튀고 두꺼운 금속이 우그러지는 소리. 가벼운 지진과 함께 벽이 조금 흔들렸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그 굳게 닫힌 두꺼운 철문이 기어이 떨어져 나갔다는 사실을.
나는 계단 밑을 내려다보았다.
“문이 열렸나?”
그렇다고 대답을 하자 슐로이츠가 길게 숨을 내쉬었다.
“그래.”
“…….”
“그럼 더 내려보낼 필요가 없겠군.”
나는 이를 악물었다. 다시 아래를 살폈고, 이윽고 눈이 커졌다.
괴수들 두 마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벽돌 파편이 튀며 무거운 성물이 납골당 안쪽으로 날아간 것 같았다.
납골당에 있는 석관들은 뒤집어질 게 분명했고 엔리케 시에도의 시체 역시 괴수에게 훼손될 게 뻔했다.
이대로라면, 비너스의 말처럼 흘러갈 수도 있었다. 아니, 분명히 그렇게 흘러갈 것이다.
나는 괴수들의 숫자를 확인하고 계산을 끝낸 후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철문에 머리를 처박은 괴수들은 팔다리가 온전치 못했다. 덕분에 오파츠가 한 번 깨졌지만 무려 세 마리를 해치울 수 있었다.
숨을 헐떡이며 우그러져 벌어진 문 사이로 들어갔다.
남은 괴수는 두 마리였다. 무리한다면 충분히 해치울 수 있었다.
성물이 반쯤 부서지며 특유의 향을 더 내뿜고 있었다. 오랫동안 봉해져 있던 납골당은 습한 냄새로 가득했다.
석관들은 헤집어져 있었다.
나는 성검을 꽉 틀어잡았다.
괴수들은 날뛰고 있었지만 마찬가지로 사지가 온전치 않았다. 저 괴수들까지 해치우면.
그러면 슐로이츠에게 무슨 증거가 남아 있을까.
티모테 프로키온?
그는 결국 르페브르의 이름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협박? 나는 티모테 당신 때문에 군부에 오파츠의 공급을 끊겠다고 협박해 버리면 그만이다.
몰릴 대로 몰리니 반감처럼 난폭한 생각만 들었다.
나는 두 번째 오파츠를 깨뜨리며 두 마리의 괴수들을 죽이는 데 겨우 성공할 수 있었다.
‘됐다….’
“으흑….”
안도한 것도 잠시, 눈앞이 핑 돌았다. 나는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무릎을 꺾었다. 기침이 미친 듯이 쏟아져 나왔다.
몸을 둥글게 말고 정신없이 기침을 하면서도 엔리케 시에도의 석관으로 기어갔다.
어떤 처리를 해 둔 것인지, 아니면 내 후각이 마비가 된 것인지 시체 썩는 냄새는 나지 않았다.
나는 죽을힘을 다해 석관의 뚜껑을 다시 덮었다. 관 안은 굳이 보고 싶지 않았고.
석관 위에 쓰러져 숨을 고르는데, 납골당 건물에 큰 충격이 갔는지 천장에서부터 돌이 떨어졌다. 몇 개는 피했으나 몇 개는 그러지 못했다.
정수리를 타고 흐른 피가 이마를 따라 눈썹 뼈에서 걸려 천천히 떨어졌다.
간신히 고개를 들었을 때, 시야 바로 앞에는….
히죽 웃는 괴수가 있었다.
“……!”
반사적으로 몸을 피했다. 간발의 차였다. 내 목을 낚아채려고 한 괴수의 거대하고 기괴한 손이 허공을 스쳤다.
‘어디서 나온 거지?’
왜 이렇게 늦게 나를 공격한 건가 싶었더니, 이 괴수는 하반신이 완전히 없었다. 한쪽 팔도 없었다. 순전히 한 팔로 기어 오느라 늦은 것이다.
도망을 치면 된다.
나는 한 번 뒹굴었고, 세 번째 오파츠가 기어이 깨졌다. 기괴하게 변형된 괴수의 손톱 때문에 묶어 뒀던 머리채가 아예 뭉텅이로 잘려 나갔다. 잘린 머리카락이 바닥을 뒹굴었다.
오파츠는 세 개까지만 가져올 수 있었고, 무엇보다 눈앞이 점멸해 더 이상 움직일 수도 없었다.
괴수가 내게 입을 벌리고 달려든 그때.
나는 괴수의 위로 꽂히는 수많은 검들을 보았다.
괴수를 베어 죽이는 게 아니라, 압사시켜 죽이려는 듯 어마어마하게 쏟아진 성검들이었다.
평소라면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 진귀한 광경을 보았을 텐데, 지금의 나는 기침이 멎지 않아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목에서부터 피 맛이 났고, 가슴에 불이 붙은 듯 괴로웠다.
겨우 숨을 고르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나를 구한 남자가 알 수 없는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석관들이 하나만 빼고 다 헤집어졌군.”
“…….”
“영애가 닫았나?”
“…….”
“괴수들이 시체에 손을 댔는지 안 댔는지 모르겠어.”
“대지, 않….”
나는 입을 다물었다. 순간 손이 차갑게 식었다. 세차게 요동치는 심장.
‘말이….’
“영애.”
“…….”
“고개 들어.”
나는 벌벌 떨면서 슐로이츠를 올려다보았다. 누군가 내 머리를 물속에 밀어 처넣은 것 같았다. 그의 눈빛이 나를 그렇게나 선득하게 만들었다.
“입 똑바로 열어서 대답해.”
“…네. 경.”
짧은 말은 간신히 할 수 있었다. 순간 슐로이츠의 입가에 분노와 조소가 동시에 스쳤다.
“아, 그래. 그렇게 불러도 되는군.”
“…….”
“내 이름을 불러 봐, 영애.”
“…….”
“불러 보라고. 알려 준 대로.”
슐로이츠.
그의 이름은 길었다. 지금의 나는 결코 한 번에 발음할 수 없었다.
슐로… 이츠. 이따위로 더듬거리게 될 그의 이름….
머리가 하얘졌다. 지금 누군가 내 가슴에 귀를 갖다 대도,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슐츠.”
“…….”
슐로이츠가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웃었다. 약간의 즐거움도 묻어 나오지 않는 웃음에는 묘한 체념이 섞여 있었다.
그도 잠시.
슐로이츠가 내 손목을 아플 정도로 틀어쥐었다. 뿌리치려고 해도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게 엔리케 시에도를 넘겨, 블란데아 영애.”
오파츠가 깨지며 입힌 큰 충격이 조금씩 완화되고 있었으나 그뿐이다. 이마를 타고 흘러내린 피 때문에 눈앞이 흐렸다.
나는 더 이상 그를 기만할 수가 없었다.
“이미… 죽은 사람을… 꼭… 찾으셔야 하나요? 슐로이츠… 경.”
조금만 더 기다릴걸. 이만큼이나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 쓴웃음이 나왔지만 이젠 돌이킬 수 없었다.
어떤 것도.
“그녀가 정말로 죽었다면 찾을 필요 없겠지.”
가슴이 자꾸 조여들었다.
“그런데 죽은 것 같지가 않잖아.”
“…….”
“도저히 죽은 것 같지가 않은데.”
내 발버둥은 아무 의미가 없었다. 아무리 숨기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결국 나는 그에게 붙잡혔다.
내가 가면처럼 움켜쥐고 있던 비밀을 그는 잡아 뜯어 바닥에 던져 버렸다. 짓밟혀 망가진 가면은 다시 쓸 수 없다. 갈라져 속이 드러난 비밀도 이제는 아무 쓸모가 없었다.
아무 쓸모도….
“대답해 봐, 영애.”
눈앞이 자꾸 흐려졌다.
“내 의심이 사실이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변명해 보라고.”
“나는….”
“그동안 끊임없이 그랬잖아. 블란데아 르페브르.”
나는 입술을 아플 정도로 깨물었다. 피가 맺혔는지 붉은 맛이 났다. 눈물이 흘러나올 것 같은 걸 필사적으로 참은 대신일까. 어깨 위로 머리카락이 흘러내렸다.
잘려 나갔던 금빛 머리카락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내 손목을 틀어쥐고 있던 슐로이츠의 손에도 얼마간 머리카락이 흘러 닿았다.
그 출렁거리는 황금빛 머리카락조차도 슐로이츠에겐 조롱으로 보였을까.
“그래. 영애 눈엔 내가 아주 병신 새끼로 보이겠지.”
“…….”
“늘 그랬잖아. 네 눈에는.”
눈가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눈물이 당장이라도 쏟아질 것 같아 나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니… 에요.”
슐로이츠의 목울대가 꿈틀거렸다. 나는 더 이상 슐로이츠의 눈을 볼 수 없었다.
헥토르는 내게 평소에도 모이라 반지를 끼고 다니라고 말했다. 뺐다 끼웠다 하면 오히려 몸에 무리가 갈 것이라며.
개량했다던 헥토르의 말대로, 머리카락이 길어진다고 해서 전처럼 피를 토하고 쓰러질 정도는 아니었다. 그저 가볍게 어지러운 정도.
만약 오파츠가 세 개나 부서진 상황이 아니었으면 아무것도 아닐, 기억조차 못 했을 찰나의 어지러움이었지만….
지금 내 몸은 그마저도 견디지 못할 만큼 상태가 좋지 않았다.
발목에 무거운 추가 달린 것처럼 몸이 축축 처졌다. 누군가 나를 물속으로 한없이 끌어당기는 것 같았다.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눈앞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비틀거리던 나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고, 그게 의식의 마지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