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 움켜쥔 비밀-(4) (81/190)

슐로이츠는 굳게 닫힌 지하 철문 앞에 멈춰 섰다.

녹이 슬 대로 슨 두꺼운 문은 손을 대기 겁날 정도로 굳건히 닫혀 있었다.

“보시다시피… 5년 전에 이렇게 되었습니다. 납골당 보수를 하다가 잘못 건드린 바람에 문이 열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나도 처음 듣는 얘기인 걸 보니, 어머니가 일부러 그런 사고를 기획하신 건 아닌 것 같았다.

“그으, 이 문을 개폐하려면 강한 힘이 필요한데, 그만한 힘을 지속적으로 가할 수 있는 장비를 건축 구조상 들일 수가 없습니다.”

슐로이츠가 입을 열었다.

“들일 수 없다고?”

“예, 예. 그렇습니다. 총사령관님.”

“강한 힘이라. 괴수가 들이박긴 해야 겨우 열린다는 소리군.”

“예…. 적어도 여러 마리는 필요하겠지요.”

괴수는 생포할 수 없는 존재다. 다시 말해 이곳을 여는 건 불가능하단 소리였다.

슐로이츠는 가만히 서서 문 왼쪽에 걸린 대리석 명패를 바라보고 있었다.

가장 아래에 양각되어 있는 이름.

엔리케 시에도.

그가 나를 등지고 서 있는지라 나는 슐로이츠의 얼굴을 볼 수가 없었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도.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문득 슐로이츠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석관 같은 직사각형 명패의 서늘한 모서리를 만져 보는 손.

기분이 묘했다. 그는 꼭 석관을 만지는 것처럼 보였고, 닫힌 관을 열고 싶어 하는 이처럼 보였다.

“만약 이 문이 열리게 되면 엔리케 시에도의 관을 열어 봐도 되나?”

“예? 과, 관을요?”

시에도 가주는 정신을 못 차리는 표정이었다.

“왜. 가문에 대한 모욕인가?”

“그렇… 습니다…. 부디 재고해 주시기를…. 무엇보다 10년도 넘었습니다. 얼굴을 확인할 수 없으실 겁니다. 무, 물론 당연히 알고 계시겠지만….”

슐로이츠에게서는 고인에 대한 최소한의 애도도, 슬픔도 하다못해 성사되지 못한 만남에 대한 희미한 분노도 느껴지지 않았다.

“너무 일찍 죽었군.”

그의 목소리는 그렇게 물기 하나 없이 건조했다.

“더 일찍 올 걸 그랬어.”

그런데 왜일까. 나는 단 한 번도 마른 적이 없는 그늘이 생각나기만 했다. 짓무를 대로 짓물러 볕은 감히 바라지도 못하는 어두운 군락.

시에도 가주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 딸에게, 혹시…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셨습니까?”

“죽이려고 했어.”

“……!”

뺨이 딱딱하게 굳었다.

“왜, 그… 제 딸이… 무, 무슨 잘못이라도….”

“별건 아니고.”

“별게 아니신데 왜….”

“나를 그만큼이나 기만한 게 그녀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어서 말이야.”

“…….”

“몇 년간 한 사람의 잘못만을 죽을 듯 곱씹다 보니 차라리 죽여 버리고 싶어지더군.”

“…….”

시에도 가주는 입이 얼어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죽었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

와중에도 시에도 가주는 단 한 번도 나를 쳐다보며 곤란한 눈빛을 던지지 않았다.

그는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면서도 정말이지 최선을 다해 연기를 해 주었다. 할 수만 있다면 고맙다고 손을 잡아 주고 싶을 정도로.

슐로이츠는 명패에 적힌 이름을 조금 더 내려다보다가 몸을 일으켰다.

“나가지.”

***

그날로부터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나는 슐로이츠를 제대로 만나지 못했다. 당초 파악됐던 것보다 괴수의 출몰이 더 빈번했기 때문이다.

가호는 매일 내릴 수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슐로이츠는 전처럼 내 어디도 붙잡지 않았다. 그저 보고서를 받아 보는 듯, 건조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가호를 받고 나를 돌려보냈을 뿐이었다.

이해는 했다.

슐로이츠가 내게 원했던 목숨값이라는 게 더 이상 의미가 없었으니까.

마음은 좀 허전했지만 그뿐이다. 이게 맞기도 했다.

그는 내가 르페브르의 직계라고 해도 전혀 관심이 없으니까.

오파츠가 아니었으면, 가호가 아니었으면 나는 관례대로 제7 지휘관으로 임명되었을 것이다.

수많은 레이디들이 그러하듯 멀리서 젊고 근사한 총사령관을 선망만 하다가 얌전히 저택으로 돌아왔겠지.

후일 그가 어떤 신분 높은 영애와 약혼을 했다는 소식을 듣고, 나중엔 결혼식에 르페브르의 직계로서 초청도 받고. 그러지 않았을까?

이젠 그렇게 될 것 같기도 하고.

그때 기사 하나가 서둘러 뛰어왔다.

“제1 지휘관님! 긴급 소집 명령입니다! 2급 경보가 울렸습니다!”

***

“2급이긴 한데, 1.5급에 가까운 2급입니다. 숫자가 아슬아슬하게 걸칩니다.”

“더군다나 유적이 아닌, 거주지와 밀접한 곳에서 출몰하는 괴수는 상대하기가 훨씬 까다롭습니다.”

“지원군을 긴급히 요청해야 할 것 같습니다, 총사령관님.”

마지막은 라파엘의 말이었다. 무슨 의견들이 쏟아지든 결국 결정은 총사령관의 것이었으니까.

슐로이츠는 영지의 지도를 내려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지원군은 요청하지 않겠다. 대신 성채 하나를 빌려야겠군.”

“성채 말입니까.”

“블란데아 경.”

“네, 슐로이츠 경.”

슐로이츠가 지도의 한 부분을 짚었다. 그가 짚는 선은 벽에 걸린 열 개의 지도에 똑같이 그려지는 중이었다. 열 명의 참모들이 눈으로 복사한 듯 똑같이 그리고 있었다.

“여길 군부에 한시적으로 제공해. 이곳으로 괴수들을 전부 유인한 후 몰살시키는 쪽으로.”

슐로이츠의 명령에 테이블이 순식간에 쑥대밭이 됐다. 참모들의 깃펜이 바삐 움직였다.

내 눈 역시 커질 수밖에 없었다.

슐로이츠가 요구하는 성채는 다름 아닌 시에도 가문이 머물고 있는 그 성채였다.

“성채의 점유 기간은 금사 기둥에서 괴수의 흔적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성채 안에 있는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시간은 30분. 성채의 공식적인 사용 허가는.”

참모들의 깃펜이 잠시 멎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에게 받겠다.”

***

시에도 가문이 머무는 성채, 일명 푸른 성채에 일대 대피령이 내려졌다.

값나가는 것들과 중요한 집기는 병사들까지 동원해 전부 빼내고 있지만, 미처 빼내지 못하는 것들도 있었다.

난전이 예상되니 크게 파손될 것들도 분명히 있었다.

“시에도가 입을 손실 비용은 전부 군부에서 보상해 줄 거니까….”

시에도 가주는 얼마나 황당할까. 갑자기 집을 빼라니.

“더 부풀려서 적어도 돼. 눈감아 줄 테니까, 우리 군부를 벗겨 먹자. 공도 이참에 인생 역전 노려 봐.”

시에도 가주가 하하, 하고 웃었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제가 그… 잘했나 모르겠습니다. 실수를 할까 봐 너무 조마조마하더군요.”

“아냐. 너무 잘해 줬지. 정말 고마워.”

나는 가주를 꼭 껴안아 주었다.

“진심이야. 정말로 고마워.”

귀족끼리 가벼운 포옹은 흔히 하는 인사였지만, 방금 내 포옹은 감사과 사과의 의미를 담은 것이었다.

가주는 깜짝 놀라는 것 같더니 내 등을 가볍게 도닥였다.

“가신에게 그렇게까지 말씀하실 것 없습니다.”

나는 웃으면서 시에도 가주를 놓았다. 그리고 미리 가져왔던 오파츠들을 내밀었다. 그간 칩거해 있던 시에도 가주는 이게 무엇인지도 몰랐기에, 간단히 설명을 해 주었다.

“가호가 없으면 내상이 심해서 피를 토하게 되고 죽을 만큼 괴롭긴 하겠지만, 그래도 죽는 것보단 낫잖아.”

“다정도 하셔라. 생각보다 엉뚱하기도 하시군요.”

시에도 가주는 감사히 받겠다며 영롱한 오파츠들을 기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가호를 받아 가. 일주일이 한계지만….”

“실례하겠습니다.”

내 손등에 입을 맞춘 시에도 가주는 30초 후 토끼 눈을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가호를 처음 받는 사람들의 특징이라 놀랄 것도 없었다.

이윽고 빼낼 수 있는 짐들이 다 빠졌다는 보고를 받았다. 시에도 가주는 정중하게 허리를 굽힌 후, 내 손등에 입을 맞췄다.

“시에도의 행운과 제 신의 가호가 블란데아 르페브르 영애께 깃들기를 기원합니다.”

호의로 가득 찬 목소리.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미소를 지었다.

“블란데아 경.”

슐로이츠의 목소리가 들렸다. 가볍게 턱짓해 시에도 가주를 물려 보내고, 나는 그에게로 걸어갔다.

“인사는 다 받았나?”

‘들었나?’

“오래 기다리셨나요?”

“그다지. 따라와.”

“넵.”

난 서둘러 슐로이츠를 따라갔다.

“경에게 행운이 필요할 때에는 영애라고 불러 줘야겠어. 시에도 가주의 기원이 헛되면 안 되잖나.”

‘들었구나.’

한편으로는 조금 기뻤다. 슐로이츠가 내게 이렇게 업무 용건 외 사담을 걸어 준 게 일주일 만이었기 때문이다.

“저도 프로키온 공이라고 부를까요?”

“아니.”

슐로이츠는 무심하게 말을 이었다.

“이름으로 부르라고 했잖아.”

“네. 그럼 그냥 슐로이츠 경이라고 부르겠습니다.”

“다르게 부를 수도 있지 않나?”

“네? 어떻게 불러 드릴까요?”

성큼성큼 걸어가던 슐로이츠가 문득 내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눈길이 내게 머무르는 것은 잠시였다.

언뜻 보기엔 별 의미가 없었을 그의 건조한 눈길.

일주일 넘게 내게 그런 무성의한 서늘함만을 안겨 주었던 남자가, 그래서 나를 힘없이 가라앉게 만들던 남자가.

내게는, 그러니까 블란데아 르페브르에게만은 결코 말해서는 안 되는 두 음절을 입 위에 올린다.

“슐츠.”

***

“…란데아, 블… 경…? 경!”

나는 깜짝 놀라 정신을 차렸다. 라파엘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괜찮으십니까? 왜 갑자기 넋이 나가셨습니까?”

“아냐. 잠깐 딴생각을 했어.”

슐츠라고 말하던 그의 목소리가 도무지 귓가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 두 음절은 아주 오래전부터 내 가슴에 달라붙어 가끔씩, 아니. 실은… 걸핏하면 숨을 막히게 만들곤 했는데.

라파엘은 더 묻지 않았다. 대신 당부했다.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나중에 하십시오. 이제 곧 전투잖습니까.”

“알겠어. 그만할게.”

“예. 그런데 블란데아 경께서도 꼭 요새에 들어가셔야겠습니까?”

“가신들 앞이잖아. 나도 체면이라는 게 있어서.”

아무리 그래도 총사령관까지 대동해 왔는데 나만 밖에 있는 것도 예의는 아니었다. 대외적인 이미지도 있고.

“근데 경. 왜 굳이 납골당을 맡으신 겁니까? 총 25구획 중에 하필 거길 맡으신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납골당에 있는 석관까지는 바깥으로 이송하지 못했잖아. 가신들이 묻힌 곳인데 주군의 딸로서 마땅히 지켜 줘야지. 그게 르페브르의 명예야.”

“블란데아 경…!”

감동받은 라파엘이 내 손을 덥석 잡아서 밀어냈다. 그는 내 성검을 다시 한번 확인하더니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그럼, 블란데아 경. 부디 안전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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