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페브르 가문의 부집사는 슐로이츠를 본성의 가장 좋은 손님방으로 안내했다.
나도 본성에 있는 내 방에 돌아온 건 오랜만이었다. 흰 모슬린 숄을 걸치고 진주 브로치를 고정하고 있을 때였다.
똑똑.
창문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비너스?”
문을 열어 주자 비너스가 훌쩍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야? 왜 창문으로 기어 올라온 거야?”
“드릴 말씀이 있어서 조용히 왔습니다. 아가씨, 총사령관이 아가씨를 의심하는 것 같습니다.”
“알아.”
“예? 알고 계셨습니까?”
“오기 직전에 일이 하나 있었거든.”
다른 누구도 아닌 티모테 프로키온이 내 어릴 때의 초상화를 수배했다니….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나라도 의심하겠다.
군부에서 있었던 일들을 간략히 얘기해 주자 비너스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어쩌실 겁니까?”
“시에도 가주가 거짓말을 잘해 주길 바라야지.”
“더 의심하면요?”
“시에도 가문의 납골당을 열어 달라고 할 예정이야. 엔리케 시에도가 매장된 관까지 보면 의심이 지워질 테니까.”
“예. 마님이 시체까지 수배해 관에 넣어 두었다고 하셨지요. 관 속의 시체는 이미 썩어서 얼굴을 확인할 수 없을 거고…. 없긴 한데 말이지요. 아가씨.”
비너스는 바로 말을 잇지 않고, 조각 같은 얼굴을 서서히 찡그렸다. 그는 어릴 때부터 내 호위 기사였고, 그래서 나는 그가 어떨 때 저렇게 미간을 사정없이 찌푸리는지 잘 알고 있었다.
불안함이 해갈되지 않을 때였다.
그가 입을 열었다.
“고인의 얼굴을 알 수 있는 방법이 아예 없는 건 아니잖습니까.”
비너스의 말이 맞다.
괴수가 목 위를 뜯어 먹어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시신은, 신전의 성물을 이용해 생전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반드시 ‘괴수에게 죽은’ 시체만이 성물을 사용할 수 있었으나, 신전의 판단하에 다른 원인으로 발생한 시체라도 괴수에게 훼손만 되었다면 성물을 사용할 수 있기도 했다.
물론 대단한 권력자들에게만 한해 적용되는 너그러움이다.
슐로이츠는 세상의 거의 모든 판단과 원칙에서 너그러움을 맛볼 수 있는 권력자였고.
“엔리케 시에도의 시체를 내놓으라고 요구할 순 없을 겁니다. 그럴 일 없겠지만 혹 제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괴수 앞에 시체를 내던질 거라고 협박까지 한다면 이는 국왕이라도 불가능하니까요.”
그 정도면 가신에게 모욕을 가하는 정도가 아니라 가신의 주군인 르페브르의 문양을 공식 석상에서 발로 짓밟아 침을 뱉는 수준이었다.
영지전이라는 소리였고 무엇보다 너무나 불경한 짓이었다.
백성들의 사랑을 아낌없이 받던 성군이어도, 세상의 온갖 비난과 지탄을 한 몸에 받다가 독이 든 잔을 마시게 될 폭정이었다.
그런 끔찍한 짓은 어떤 왕국에서도 용납되지 않는다.
“슐로이츠가 그렇게 무도한 성격은 아니야.”
“아가씨는 어릴 때부터 그 소년에게 유독 관대했죠.”
생각에 잠긴 듯했던 비너스가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입가에 사람을 안심시켜 주는 희미한 미소가 그려졌다.
“고작 숙부 놈이 아가씨의 어릴 적 초상화를 구해 왔다, 정도가 근거의 전부잖습니까. 엔리케 시에도가 죽었다는 사실을 확인하게 되면 결국 의심도 사라질 겁니다.”
***
한편, 말 한 번 똑바로 못하고 군부령에서 쫓겨난 티모테 프로키온은 씨근덕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도대체 그 녀석은 나를 그 군부령까지 왜 부른 거란 말이냐!”
라파엘과 디오스의 추측과는 달리, 슐로이츠는 티모테에게 토벌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내린 게 아니었다.
그냥 오라고 했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간 미뤄 뒀던 영지의 관리 보고에 대해서 듣겠다는 거였고.
하지만 그건 굳이 티모테가 와서 직접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매 분기 산처럼 쌓인 보고서는 슐로이츠가 원하기만 한다면 바로 군부령으로 발송이 될 테니까.
그래서 티모테 역시 슐로이츠가 자신을 부른 진짜 이유를 알지 못했다. 알지 못한 채로 쫓겨나기까지 했다.
“젠장!”
프로키온 영지에서 몇 년이나 납작 기어 살게 하더니! 갑자기 군부령으로 불러 꽁지가 빠져라 뛰어왔더니!
물론 슐로이츠 프로키온이 자신을 살려 놓은 것만 해도 대단히 관대한 처분이었지만, 사람은 본디 가장 최근에 겪은 일에 크게 영향력을 받는 법이다.
와중에 보좌관이 허겁지겁 다가왔다.
“티모테 경, 방금 접한 소식입니다.”
“또 무슨 소식인데! 또 그 앞뒤 모르는 녀석이 나더러 군부로 뛰어오라더냐!”
“그게 아닙니다! 프로키온 공이 일전에 같은 화가에게 르페브르 영애의 초상화를 한 번 구해 갔다지 뭡니까!”
“뭐? 무슨…. 언제?”
보좌관에게 날짜를 들은 티모테는 더욱 혼란스러워졌다. 제법 됐다.
“뺨에 상처가 나서 왔다고 하더군요.”
“상처? 그 괴물 같은 놈이 얼굴에 상처를 입을 때도 있어?”
“화가는 그렇게 말했습니다.”
“하….”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티모테 프로키온은 미간을 구겼다.
슐로이츠가 르페브르 영애의 초상화를 수배해 갔다는 것은 사실 이해가 안 가는 행동이었다.
어릴 적의 그 녀석은 분명히 눈이 멀어 있었다. 그 소녀의 얼굴을 보았을 리 없었다.
그렇다고 자신을 불러 수배해 놓은 초상화를 내보이며 물어본 것도 아니었다.
자신에게 물어보는 게 가장 확실한 방법일 텐데도, 슐로이츠는 초상화의 끄트머리도 보여 준 적이 없었다.
이 말이 뜻하는 바는 하나였다.
어떤 연유로 인해 슐로이츠는 이미 확신을 하고 있다.
‘그 영애도…. 신분만 높지 별거 아니구만. 얼마나 칠칠치 못하길래 그놈한테 벌써 들켰단 말이야.’
쯧쯧.
‘아니지. 슐로이츠 프로키온 그 빌어 처먹을 놈이 유독 집요한 놈이긴 하지. 르페브르가 잘못 걸린 거다.’
순간이었다.
아귀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퍼뜩 스쳐 갔다.
“그 녀석이… 화가한테 입단속을 왜 그렇게 허술하게 시켰지?”
그럴 놈이 아닌데.
이상했다.
덕분에 자신은 더 이상 르페브르 영애에게 협박을 지속할 수 없게 되질 않았나. 최초의 협박, 그게 전부였다.
“…….”
그러고 보면 의아할 정도로 모든 게 수월했다.
생각보다 쉽게 르페브르 영애의 어릴 적 초상화를 구할 수 있었고.
생각보다 쉽게 블란데아 르페브르가 새벽 연무장에서 혼자 나온다는 정보를 입수할 수도 있었다.
너무 쉽게…. 그는 블란데아 르페브르를 협박할 수 있었다.
그녀가 시체처럼 창백해지는 걸 볼 수 있었고, 뺨이 굳어 버리는 것도 볼 수 있었다.
덕분에 블란데아 르페브르가 슐로이츠에게 제 정체를 들킨다는 사실을 얼마나 무서워하고 있는지 간접적으로 깨달을 수 있었고.
산산조각이 나기 직전에, 금이 갈 대로 간 유리잔을 꽉 쥐고 있는 사람도 그보단 덜 긴장할 것이다.
덕분에 더 희희낙락해 그녀를 즐겁게 협박할 수 있었는데.
“…….”
슐로이츠가 군부령으로 자신을 불러낸 진짜 이유는 아직도 전해 듣지 못했다.
그가 군부령에서 한 일이라고는 르페브르 영애를 만나 알아보고, 그녀에게 협박을 한 것뿐이었다.
추가로 르페브르 영애가 얼마나 긴장해 있는지 알게 된 것….
되짚어 볼수록 이상하게 입맛이 아주 더러웠다.
이용해 먹고 버려진 일회용 도구로 쓰였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빌어먹을! 르페브르에서 프로키온한테 영지전을 선포할 일이라도 생겼으면 좋겠군!”
***
비너스를 내보내고, 나는 다시 화장대 앞에서 머리를 마저 빗었다. 마음이 복잡해도 어쩔 수가 없었다.
나는 슐로이츠의 부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이 영지 내에 있는 유일한 르페브르의 직계였기에 그를 제대로 대접할 의무가 있었다.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들어와도 좋다는 뜻으로 화장대에 있는 종을 울렸다.
방문을 열고 들어온 부집사가 내 예상보다 훨씬 빠른 소식을 전해 주었다.
“아가씨.”
“무슨 일이야?”
“저, 총사령관님이 시에도 가문으로의 방문….”
“블란데아.”
갑자기 집사의 뒤편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나는 헉하고 숨을 들이켰다.
난 그나마 평정심이 있었던 거고, 부집사는 거의 기절할 만큼 놀라서 붙잡아 넘어지지 않게 도와줘야 했다.
“프… 슐로이츠 경?”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온 슐로이츠가 입을 열었다.
“시에도 가문을 방문하고 싶은데.”
“…시에도는 수년 전부터 칩거 중인 가문입니다.”
“들었어. 르페브르의 부집사에게.”
턱짓으로 부집사를 가리킨 슐로이츠가 재차 물었다.
“죽어도 안 되나?”
“아뇨. 죽어도 안 될 정도는 아닙니다. 하지만 관례상 이유가 있어야 해요. 중요한 일이 있으신….”
“엔리케 시에도.”
순간 숨이 턱 하고 막혔다. 아니, 잠시나마 정말로 심장이 멎었던 게 분명했다.
“그녀를 봐야 할 이유가 있어서.”
그사이 겨우 품위를 되찾은 부집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총사령관님. 외람되오나 혹시… 시에도 가문의 엔리케 영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본분을 잊지 않은, 대귀족 가문의 관리인다운 질문이었다. 그러나 슐로이츠는 부집사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래.”
그저 내게 붙박여 있는 시선.
“그 여자를 넘겨받아야겠어.”
“…….”
“필요하다면 청혼도 해 줄 테니.”
나를 내려다보는 슐로이츠의 눈동자 아래에 도대체 무슨 감정이 서리고 있는지. 도저히 읽을 수가 없다.
“그녀를 내 앞에 데려다 놔, 블란데아 르페브르.”
***
르페브르 가문에서는 칩거를 택한 가신에게 성채를 내어 준다. 시에도가 받아 간 것은 민가 스무 채 정도는 충분히 들어갈 만한 중소 규모의 성채였다.
정원을 끼고 있는 저택, 꽃이 핀 후원, 오두막, 연못, 우물, 창고, 납골당. 이 정도가 들어갈 정도의 크지는 않지만 작지도 않은 성채.
“…아가씨.”
시에도 가주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그는 방금 전, 슐로이츠에게 ‘엔리케 시에도’가 칩거를 시작했을 즈음 죽었다고 말해 준 참이었다.
굳게 닫힌 시에도의 납골당이 열리기까지는 얼마 걸리지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