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6. 움켜쥔 비밀-(2) (79/190)

나는 다른 의미로 놀랐다.

‘슐로이츠도 공대를 하네.’

원래 슐로이츠는 국왕 외엔 누구한테도 공대를 안 하는 설정이었는데….

하긴 작중에선 숙부 놈 자체가 고인으로 나오긴 한다. 그냥 회상 몇 줄에 나오던.

아마 슐로이츠가 가주 자리에 올라가며 처분했겠지. 왜 원작과는 달리 티모테 프로키온이 살아 있나 하는 의문은 품지도 않았다. 어릴 때 내 얼굴을 봤던 티모테니까 살려 둔 거겠지.

“블란데아 르페브르.”

슐로이츠가 나를 불렀다. 나는 서둘러 입을 열었다.

“가벼운 담소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티모테 경이 르페브르가의 후원에 대해 궁금해하더군요. 하여 나중에 한번 르페브르 저택으로 초청을 할까 했지요.”

숨까지 죽이고 내 얘기를 듣는 것 같던 티모테의 표정이 오묘해졌다.

두 가지의 극단적인 기분이 상충하는 것 같았다.

그는 지금 날 협박하는 중이라 몹시 신중할 텐데, 내가 한담의 주체를 그에게 휙 넘겼으니. 혹시라도 슐로이츠가 물으면 대답을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머리가 핑핑 돌 것이다.

한편으로는 르페브르 저택에 초청을 해 준다는 내 말에 환희에 차서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었다.

저 숙부 놈 잠시라도 머리 터져 보라고 일부러 그렇게 말한 거였다. 그건 그럭저럭 먹힌 것 같은데….

문제는 슐로이츠였다.

그는 묘한 표정이었다. 특유의 형형한 삼백안이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툭 떨어지는 반문.

“그래?”

거의 동시였다. 슐로이츠가 갑자기 내 손을 잡았고, 나는 그대로 굳어 버릴 수밖에 없었다.

…왜 갑자기 내 손을 잡는 거지?

슐로이츠와의 접촉이 낯선 건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나는 그와 접촉을 자주 한 편이었다.

당장 슐로이츠를 임시로 보좌할 때부터도 토벌을 졸졸 따라다녔으니까.

나무뿌리에 발이 걸려 넘어질 뻔하거나 할 때 슐로이츠는 혀를 차며 내 손을 아무렇지도 않게 잡아 똑바로 세워 주었다.

하지만 전부 이유가 있었던 접촉이었다.

슐로이츠가 아무 이유도 없이 내 손을 잡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심지어 그의 손가락이 사이사이를 파고들어 조금 아플 정도로 힘을 주어 잡았다.

심장이 두근거려야 하는데. 그래야 할 것 같은 상황인데.

슐로이츠의 두 눈이 나를 꼭 탐색하는 느낌이라 그저 무섭기만 했다. 더군다나 방금 전, 숙부 놈한테 협박을 받았던 터라 그 긴장감이 아직 몸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목이 바싹바싹 말랐다. 경직된 가슴은 아플 정도로 조여들었다.

슐로이츠는 내 손을 놓아주지도 않았다. 내 손에서 식은땀이 쉬지 않고 배어나는데도 그는 개의치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여전히 내게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티모테 경.”

“예, 예에.”

“한 시간 안으로 군부령에서 나가 복귀하십시오.”

“…예?”

숙부 놈은 순식간에 쫓겨났다.

나는 여전히 그에게 손이 붙잡혀 있는 상태였고.

“르페브르 경.”

“…말씀하세요. 프로키온 경.”

“내 숙부가 경의 어릴 적 초상화를 비밀리에 수배했다던데.”

순간 심장이 바닥으로 꺼졌다. 동시에 두 손에 힘이 강하게 들어갈 뻔한 걸 간신히 억눌렀다.

‘이런 초짜 새끼!’

협박을 할 거면 들키지나 말든가!

이렇게 다 들킬 거면서 도대체 무슨 협박을 하겠다고!

부글부글 타는 속마음과 달리 나는 정말 최선을 다해서 숨을 골랐다.

“르페브르 직계의 초상화를 수집하는 귀족들이 적잖습니다.”

“살롱에 널린 그런 것들 말고.”

“…….”

“경의 어릴 적 모습 말이야.”

“…그렇군요.”

“왜 경의 어릴 적 초상화를 굳이 수배했는지 짐작 가는 점이 있나?”

“글쎄요…. 특이한 수집품은 귀족들의 취미니까요. 티모테 경도 새로운 수집품을 모으시는 것 아닐까요?”

긴장할수록 다행히 목소리는 침착하게 나왔다.

하지만….

등은 식은땀으로 젖어 가고 있었다. 슐로이츠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는 게 너무 힘이 들었다.

시선을 천천히 내리깔게 된다. 힘이 빠지는 것도 같았다.

슐로이츠에게 붙들린 손은 아까부터 빼내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하고 있었지만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잡힌 건 손뿐인데 온몸이 쇠심에 꽁꽁 묶인 것 같았다.

슐로이츠의 목소리가 정수리 위로 뚝 떨어졌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네.”

“숙소로 돌아가서 르페브르 영지로 갈 준비를 해.”

나는 고개를 번쩍 들어 올렸다.

“네? 언제 말씀이신가요?”

슐로이츠는 시선을 옮겨 군부령 중앙에 크게 솟아 있는 시계탑을 바라보았다.

“세 시간 안으로 준비해.”

당황스러울 정도로 짧은 시간이었다.

“…알겠습니다. 아직 따로 들은 바가 없는데, 어떤 목적으로 가는 건가요?”

“토벌 지원이 목적이다. 경과 함께 라파엘도 함께 차출됐어.”

“아. 알겠습니다. 그럼 지휘 편제는….”

…하고 묻던 나는 서서히 입을 다물었다.

나와 라파엘이 나란히 빠졌던 새로운 토벌 조 명단이 생각난 것이다.

새로 작성된 그 명단에는 슐로이츠의 이름 역시 빠져 있었다.

설마.

“프로키온 경께서도 함께 가시는 건가요?”

슐로이츠가 짧게 대답했다.

“그래.”

걷다가 벼락을 맞으면 이런 느낌일까?

말도 못 하게 당황스러웠으나 일단 축축하게 젖어 들고 있는 손부터 제발 빼고 싶었다.

그는 식은땀이 가득한 내 손이 찝찝하지도 않나. 르페브르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는 건가.

이 정도를 인내심 있게 기다렸으면 이젠 물어도 될 것 같다.

“프로키온 경. …제 손은 왜 계속 놓아주지 않으시는지요?”

“경이 또 비틀거리다 쓰러질까 봐.”

“…….”

며칠 전에 가호를 간부들에게 내리고 로라한테 업혀 간 걸 얘기하는 건가? 아까도 숙부 놈이 나더러 얼굴이 창백하다고 조롱했으니….

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

“지금은 괜찮으니 르페브르 영지로 떠날 준비를 하게 손을 좀 놔주셨으면 합니다.”

“그럴까.”

슐로이츠는 순순히 내 손을 놓아주었다. 꾸벅 인사를 하고 서둘러 가려는데 그가 입을 열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

나를 멈춰 세운 슐로이츠는 뜻밖의 말을 했다.

“이름으로 불러 봐.”

“이름이요? 누구를 말씀하시는 건가요?”

“여기 나 말고 누가 있지?”

“…네?”

나는 당황해서 그를 쳐다보았다. 슐로이츠는 여전히 나를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난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말했다.

“제가 어떻게 감히.”

“저번엔 울면서 내 이름을 불렀잖아.”

그렇게 들으니까 좀… 이상한데?

“…슐로이츠 경?”

그의 눈빛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말은 달랐다.

“앞으로 그렇게 불러.”

***

르페브르 영지는 떠들썩했다.

괴수 출몰은 예고가 없다는 점에서 자연재해와 다를 바 없었다.

각 영지의 영주나 영지민들은 계절마다 괴수가 나타나지 않기를 바랐다. 여름엔 폭풍이 몰아치지 않기를 바라고, 겨울에는 혹한이 되지 않기를 비는 것과 비슷했다.

비교적 안전했던 르페브르 영지는 이번에 괴수가 출몰할 거라는 통지를 받았지만….

군부에서 총사령관이 직접 올 줄이야!

그렇게 괴수들이 크게 출몰하나, 하는 불안감과 그 총사령관이 직접 왔다는 사실에 강렬한 고양감이 뒤섞였다. 아직 어느 영지도 이런 영광을 누려 본 적이 없었다. 르페브르의 가신들도 몹시 흥분한 눈치였다.

르페브르 영지로 기사단을 끌고 온 비너스는 생각이 달랐다.

‘저 녀석 왜 아가씨를 못 만나게 하는 거지?’

군부의 총사령관이 직접 영지로 온 전대미문의 상황이라, 원활한 지휘 편제를 위해 기사단장인 발록 대신 비너스가 오게 되었다.

비너스는 군부에서 파견된 검파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었으나 정작 블란데아와는 인사 한 번 하지 못했다.

그녀를 보고 다가가려고 하면 묘하게 막혔다.

총사령관이 아가씨를 부르거나.

총사령관이 아가씨를 호출하거나.

총사령관이 아가씨의 손목을 잡아끌어 똑바로 세워 놓았다.

마지막은 좀 과하지 않나?

비너스는 총사령관 앞을 지나가다 일부러 넘어지는 척을 해 보았으나 아무 관심도 끌지 못했다.

다음엔 제2 지휘관의 동선을 파악해 바닥에 약간의 장난을 쳐 놓았다. 제2 지휘관은 총사령관 앞에서 비틀거리다가 넘어질 뻔했으나 총사령관은 시선도 주지 않았다.

‘아가씨만 잡아 세워 놓잖아.’

미인도 아니고 부하도 아니면. 뭐지?

여자라서?

블란데아에게 말을 걸 기회만 엿보던 비너스가 멈춰 섰다.

그녀가 총사령관에게 무어라 말을 하고 있었다. 잔뜩 주눅이 들어 있을 줄 알았는데, 비너스의 생각보다는 사이가 좋아 보였다. 정확히는 블란데아가 그리 슐로이츠를 어려워하진 않는 것 같았다.

심지어 슐로이츠에게 빙그레 웃기까지 한 블란데아는 그에게 오파츠를 내밀었다.

아가씨가 총사령관의 입술에다가 가호를 내리는 걸로 바뀌었다는 것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알긴 아는데, 총사령관이 아가씨를 향해 입을 맞출 듯이 고개를 숙일 땐 솔직히 헉할 수밖에 없었다.

사교계에 둘의 얘기가 몇 번 오르락내리락하는 건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래 봤자 몇 번 돌고 말았을 소문이, 몇 달은 꾸준히 이어질 거라고 생각이 바뀐 건….

총사령관의 눈빛 때문이었다.

그는 아름답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너무 냉담한 성격이었다. 얼어붙은 불꽃, 타오르는 얼음…. 그 특유의 서늘함 덕에 무슨 짓을 해도 담백하게 느껴졌던 총사령관이 가호를 받는 동안에는 이상할 정도로 아가씨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시선쯤이야 저 기감 좋은 총사령관은 어렵지 않게 눈치를 챌 수 있을 텐데, 총사령관은 이쪽엔 약간의 반응조차 보이지 않았다.

무시가 아니라 아예 아가씨한테 몰두해 있는 것 같은데?

꼭 어릴 때처럼….

순간 얼음송곳이 꽂힌 듯한 싸한 기분이 비너스의 등골을 스쳤다.

단순히 아가씨가 너무 예뻐서 반한 건 아닐 테고. 그럴 위인은 아닌 것 같고.

비너스는 이번에도 블란데아와 인사를 나누고 안부를 묻는 것에 실패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비너스는 심각하게 중얼거렸다.

“저놈, 혹시 아가씨가 누군지 눈치챈 건 아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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