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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 움켜쥔 비밀-(1) (78/190)

06. 움켜쥔 비밀

“아니! 르페브르의 귀한 분께서! 저리 비틀거리시다니요! 괜찮으십니까?”

티모테 프로키온은 호들갑을 떨면서 블란데아에게로 서둘러 접근했다.

방금 전,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막 간부들에게 가호를 전부 내린 상태였다.

르페브르의 직계만이 내릴 수 있다는 가호. 그리고 오파츠. 이미 알 만한 귀족들은 다 알고 있는 것이었다.

지휘관, 준사관, 이하 상부사관에게까지 새로 전부 가호를 내린 블란데아는 몹시 지친 듯했다.

가호라는 것이 체력을 소모하는 일이란 건 티모테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나름대로 기회는 기회였다.

르페브르 영애의 환심을 사기 위해 달려왔던 티모테는 아쉽게도 야망을 달성하진 못했다.

블란데아 르페브르의 주변에는 이미 지휘관이 두 명이 더 붙어 있었다.

하나는 그 여동생으로 인해 익히 아는 라파엘이었으며 다른 하나는 제8 지휘관이라던데.

티모테는 한 발짝 떨어진, 다소 불리한 거리에서도 어떻게든 블란데아의 비위를 맞추려 노력했다.

“어허!”

근처에 서 있는 기사에게 얼른 찬물을 대령하지 않고 뭐 하냐고 호통을 친 티모테는 싱글벙글 웃으며 블란데아를 돌아보았다가 문득 멈춰 섰다.

“블란데아 경.”

슐로이츠가 부른다는 이유로 자리에서 일어난 블란데아 르페브르는, 순간 현기증이 강하게 온 듯했다.

순식간이었다.

젖은 천의 물기를 있는 힘껏 쥐어짠 것처럼. 연분홍색 꽃잎을 찧어 물을 들인 것 같던 핏기가 쭉 빠져나갔다.

옆에 있던 여자 준사관이 서둘러 붙잡아 주어 별일은 없었지만….

뺨에 머물던 복숭앗빛 혈색이 죄 사라진 낯.

그것만으로는 티모테 프로키온을 멈추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음악이 중간에 끊긴 무용수처럼 우뚝 정지해 버린 이유는 다른 게 아니었다.

문제는 다른 쪽에 있었다.

순간적으로 강렬한 햇빛이 절묘하게 비치면서 블란데아의 짙은 금발이 한순간 회백색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

“예? 르페브르 영애의 어릴 적 초상화요? 그건 갑자기 왜 찾으시는지….”

티모테 프로키온의 보좌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갑자기 떨어진 명령이 너무도 이상했기 때문이었다.

“군말 말고 조용히 구해 와라.”

하루 종일 뒷짐을 진 채 방을 왔다 갔다 하던 티모테 프로키온은 무언가를 깊이 되짚는 얼굴이었다.

“살롱에서 구할 수 있는 흔한 초상화들 말고, 정말로 가문에서 그렸을 어릴 적 초상화 말이야.”

“그런 건….”

“그림에 보석을 많이 갈아 넣는 화가로 수배해. 재료 값 때문에 분명 돈에 더 쉽게 넘어올 테니까. 반드시 구해 와야 한다.”

턱을 매만지던 티모테 프로키온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그리고 슐로이츠 그 녀석이 절대 모르게 구해 와.”

***

“근데 총사령관님은 왜 티모테 경을 부르신 거지?”

라파엘이 고개를 갸웃했다.

“티모테 경은 총사령관님의 명령이 없으면 프로키온 영지 밖으로 나오지도 못하는 신세잖아.”

이것은 슐로이츠의 몇몇 최측근만 알고 있는 비밀이었다.

티모테 프로키온은 명문가의 피를 이어받았으나 활동 범위가 철저히 제한되어 있었다.

거주할 수 있는 곳, 이동할 수 있는 곳은 오직 프로키온 영지뿐.

티모테는 프로키온 영지를 착실히 관리했다. 그렇다고 막중한 권한을 부여받았다는 소리는 또 아니었다.

비록 티모테는 슐로이츠의 숙부였으나, 프로키온의 수많은 가신들 중 하나와 다를 바 없는 취급을 받았다.

사실 라파엘은 슐로이츠가 프로키온 가주의 자리를 꿰차면서, 티모테를 국외로 추방하거나 아예 죽여 버릴 거라고 내심 짐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슐로이츠는 티모테에게 성이 있는 프로키온 영지를 관리하게 내버려 두었다. 아주 의외로.

티모테 프로키온도 처지를 알아 납작 엎드려 영지나 열심히 관리했고.

“아! 혹시 총사령관님이 결혼할 마음이 드셨나? 듣기로는 프로키온의 가신들끼리 영애들을 계속 물색하고 있다고 하던데.

“총사령관님께 보고는 드렸나?”

“왕비의 초청장도 거들떠보지 않는 분인데 그런 걸 보겠냐?”

“아니. 안 보시겠지.”

디오스 역시 왜 갑자기 슐로이츠가 티모테 프로키온을 군부로 소환했는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조금 후 의문이 해결되었다.

슐로이츠가 책상 위로 툭 던진 새 토벌 조 편성표를 본 라파엘이 눈을 깜빡였다.

블란데아의 이름도, 라파엘의 이름도 빠져 있었다.

심지어 슐로이츠의 이름조차.

상급 지휘관 두 명이 자리를 비우게 되니, 티모테 프로키온으로 하여금 손에 보탬이 되게끔 군부령으로 부른 모양이었다.

그런데 우린 어디를 가는 거지….

‘아.’

순간 라파엘의 눈이 번뜩였다.

“총사령관님. 혹시 왕비의 초청장에 드디어 응하실 생각입니까?”

슐로이츠는 대꾸도 않고 디오스에게 턱짓했다.

“디오스. 르페브르 공에게 편지를 보내라.”

“예.”

“나흘 후에 르페브르 영지에 방문하겠다고 전해.”

“……?”

깃펜을 움직이던 디오스가 손을 잠깐 멈췄다. 당황한 것은 라파엘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왕실에서 내려왔다는 공문을 보고서야 아, 하고 깨달은 표정을 했다.

군부에서도 매시 매분 기억의 수반을 확인해 괴수의 동향을 확인하듯, 거대한 기억의 수반을 가지고 있는 왕실에서도 괴수의 동향을 매초마다 엄격하게 체크했다.

특정 영지에 괴수가 많이 나타날 것 같으면 군부에 미리 자료를 보내 준다.

다시 말해 지금 슐로이츠는 출몰할 것으로 예고된 괴수를 토벌하기 위해 르페브르 영지로 가겠다는 뜻이었다.

“…총사령관님이 직접 르페브르 영지로 가신다고요?”

“그래.”

슐로이츠는 의자에 앉은 채, 손에 쥔 오파츠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신사적으로 요청할 때 들어주길 바란다고 적어 보내.”

그 말에 라파엘은 미소 유지가 조금 힘들어졌다.

‘협박… 아닌가?’

이상하다.

왕도 사교계가 한 달은 떠들썩해질 정도로 파격적인 도움을 주러 가는 건데. 왜 편지에 적으라고 하시는 문구가 협박처럼 들리지?

“라파엘.”

슐로이츠가 부르는 목소리에 라파엘은 정신을 차렸다.

“예, 총사령관님.”

“르페브르 영지로 향한다는 얘기는 출발 세 시간 전까지 함구해라. 짐도 미리 준비할 필요 없다.”

당연한 얘기였다. 군부 내의 일은 대부분 기밀로 처리되니까.

고개를 끄덕이던 라파엘은 문득 의아함을 느꼈다. 슐로이츠의 곁을 오래 지키며 생긴 눈치로 얻어 챈 감. 라파엘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블란데아 경에게도 전하지 말라는 말씀입니까?”

***

동이 막 터 오는 새벽이었다.

지휘관 연무장을 막 빠져나온 나는 문 바로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이를 보고 깜짝 놀랐다.

“커흠. 르페브르 경.”

티모테 프로키온이었다. 그는 다짜고짜 화려한 색감의 비단을 몇 필 내밀었다.

특별히 구해 온 어느 지방의 특산품이다, 하는 말을 덧붙인 티모테가 내게 비단을 넘겼다.

“하나씩 확인해 보십시오.”

꺼림칙한 눈으로 비단들을 펼쳐 본 나는, 제일 아래에 놓인 것까지 보고서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비단 안쪽에 초상화가 있었다.

어릴 적 내 모습을 그렸던 초상화. 창백하고, 유약하고. 마땅히 가져야 할 색소의 대부분을 병마에 빼앗겨 얼굴에서 선명한 거라곤 붉은 눈동자밖에 없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때 그 허약해 곧 죽을 것 같던 소녀가 설마 귀하디귀한 르페브르의 직계일 거라고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었으며, 초상화도 정말 구하기 힘들었다고 말한 티모테 프로키온이 히죽 웃었다.

“슐로이츠 녀석이 어릴 적에 눈이 잠깐 멀어 있었다는 건 군의관에게 들어서 알고 있단 말입니다. 그럼… 역시 녀석은 르페브르 경이 그때 그 소녀임을 전혀 모르는 거겠지요?”

왜 속이고 있냐. 속여야만 하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는 것 아니겠느냐. 보통 그런 건 아주 훌륭한 약점이다….

그의 말들은 전부 놀라울 정도로 적중률이 높았다.

나와 슐로이츠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전혀 모를 거라는 걸 감안하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르페브르 경. 귀하신 분께 제가 감히 조언을 하나 올리자면, 제 말을 들을 때마다 그렇게 얼굴이 창백해지면 슐로이츠 녀석도 오래는 못 속이실 겁니다.”

“…….”

티모테 프로키온의 두 눈은 욕심과 기대로 번들거렸다.

지금 그래서 뭘 바라냐고 물으면, 나를 아주 한계까지 뽑아 먹으려고 하겠지.

개소리 말라고 응수하면? 더 집요한 방법을 찾아 나를 들들 볶을 거고.

차라리 슐로이츠도 이미 다 알고 있다고 거짓말을 하기에는….

조금도 믿지 않을 것 같았다.

인성 쓰레기지만 프로키온의 피가 흐르긴 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집요하고 정확한 추측을 하고 있는 놈이었으니까.

저놈은 아직 본인이 들고 있는 패의 가치를 확신하진 못하고 있었다. 막연히 추정만 하고 있는 상태니, 당장 슐로이츠에게 고하러 가진 않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부터 저자세로 나갈 필요는 없긴 한데.

나도 모르게 입가를 만지작거리게 됐다.

이 모든 계산이 틀려서, 슐로이츠의 손에 내 입이 찢어지면 어떡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티모테 프로키온이 아주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 물었다.

“크흠. 슐로이츠 녀석에게 말하는 건 역시 아직은 원치 않으시겠지요?”

“르페브르를 협박이라도 하는 중인가.”

그때, 뒤에서부터 들려오는 목소리에 등골이 오싹해졌다.

만약 모르는 목소리였다면, 누군가가 내 마음을 읽었다 싶어서 분명 반가워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 목소리의 주인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프로키온 경.”

내 쪽으로 걸어오는 슐로이츠를 볼 때마다, 나는 맹수가 연상되곤 했다. 느긋하며 조금은 무료해 보이는 포식자.

하지만 오늘은 아니었다. 기이하게 달랐다. 지금의 그는 무언가를 낚아채 물어뜯기 위해 숨을 죽인 짐승처럼 느껴졌다. 이상할 정도로 형형한 눈빛 때문인지.

늘 그랬지만 오늘은 유독 더 긴장이 되었다.

“뭐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천천히 입을 열려고 할 때, 티모테 프로키온이 서둘러 입을 열었다.

“하, 한담! 한담을 나누고 있었습니다!”

그사이에 초상화는 비단 안으로 잽싸게 갈무리되어 있었다.

와중에도 슐로이츠의 자리가 대단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 시건방졌던 숙부도 쩔쩔매며 공대를 쓰는 걸 보면.

하기야 군부니까 당연한 건가. 영지에서라면 모를까, 군부에서는 슐로이츠에게 감히 말을 놓을 수 있는 기사가 없었다.

슐로이츠는 잠시 티모테 프로키온을 쳐다보았지만 찰나였다.

그의 시선이 내게 고정되었다.

“무슨 한담. 이 새벽부터?”

“그, 그게….”

“경에게 물은 게 아닌 거, 알고 있지 않습니까.”

숙부 놈이 깜짝 놀라 입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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